그는 가고 없지만 우리는 그를 생각합니다.
그가 남긴 계절을 생각하고 광야를 생각합니다.
죄수번호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를 지금 다시 만납니다.

1904-1944
민족시인.저항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생가터 참고>
지금은 그가 태어난 곳에 '청포도'시비가 우리를 맞고 있습니다.

1904년 음력 4월 4일은 그의 생일입니다.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詩 '절정<絶頂>'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진'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습니다.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 단체였습니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6.10만세사건후 1926년 북경에 갑니다.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 -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에 선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입니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통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1946)이 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의 정신이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