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인의 발자취

2004.05.13 15:51

박경숙 조회 수:209 추천:14

작고한 구상 시인 발자취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이 하루는저 강물의 한 방울이/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있듯/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시 ’오늘’ 전문) 11일 새벽 작고한 구상(具常) 시인은 중환자실의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투병중이면서도 ’영원’을 노래했다. 격월간 문예지 「한국문인」(2003년 10, 11월호)에 유언과 함께 남긴 시 ’오늘’에서 보듯 그는 ’오늘을 영원’으로 여긴 구도자이자, 청빈한 삶을 추구한 ’성자같은 시인’이었다.

함남 문천 태생인 그는 서울에서 자라다가 네 살때 원산에서 가까운 덕원으로이사했다. 퇴직관리였던 아버지가 독일계 가톨릭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아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열다섯 살에 가톨릭 사제가 될 것을 지망하고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만에 환속했다. 자전 에세이 ’구.불구(具.不具)의 변’에서 “인생을 결론부터 출발하였다가 실패하였다는 것은 탕아의 비극-즉, 끊임없는 방황을 운명과 약속함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듯, 그의 일생은 종교와 예술사이의 끊임없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머나먼 구도의 여정이었다.

수도원 신학교에서 나온 그는 전입했던 일반 중학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문학을하겠다며 이른바 ’불령선인’들과 어울려 다니던 그는 유치장 신세를 지기 일쑤였다.

교회에선 이단아요 집안에선 불효자였던 것이다. 이십세를 전후한 시기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노동판 인부, 야학당 지도 등으로 전전하다가 급기야 도쿄(東京)로 밀항했다. 그곳에서 일급 노동자와 연필공장 직공으로 연명하다가 도쿄 니혼(日本)대학 종교과에 입학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는 불교를 전공했던 대학시절에 대해 “젊음의활기를 맛보지 못하고 이승에서 저승을 사는 괴이한 느낌을 주곤 하였지만 지금 와서 보면 나의 정신적 근원을 다져 준 다시없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시야를 범종교적으로 넓힌 시기였다.

그는 해방후 고향 원산에서 동인시집 「응향(凝香)」에 ’밤’ ’여명도’ ’길’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이중섭이 표지화를 그린 이 동인지의 수록작품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자 월남했다.

이어 잡지 「백민(白民)」에 ’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 ’유언’(1948), ’사랑을 지키리’(1949)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48-50년에는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이후 6·25전쟁 종군작가단 부단장, 승리일보, 영남일보,경향신문, 가톨릭신문 등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효성여대, 서강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하다 1970-74년 미국 하와이대에서초빙교수를 지내는 등 오랫동안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가 전임교수가 되지 않았던 것은 두 차례에 결친 폐수술로 정규강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6년부터는 중앙대에서 시론을 강의했으며, 1979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96년부터 중앙대 대학원 객원교수, 1998년부터 흥사단 명예단우 등으로 활동하며시를 비롯해 희곡, 시나리오, 수필 등의 작품활동도 병행해 왔다.

구 시인은 기독교적 존재론을 기반으로 미의식을 추구했다. 여기에 전통사상과선불교적 명상 및 노장사상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수용해 인간존재와우주의 의미를 탐구하는 구도적 경향의 작품을 많이 썼다.

또 시적 기교와 이미지에 주력하기보다 풍부한 의미와 암시를 자아내는 평범한시어를 택해 존재와 현상에 대한 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담아내는 점도 특징으로 들수 있다.

대표작으로 1956년에 발표한 연작시 ’초토의 시’를 들 수 있다. 6·25전쟁을 다룬 이 시는 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견고한 시어로 잘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으로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1980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은 영어, 불어, 독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로도 다수 번역됐다.

저서에 시집 ’구상시집’(1951), ’말씀의 실상’(1980), ’까마귀’(1981), ’드레퓌스의 벤치에서’(1984), ’구상연작시집’(1985), ’개똥밭’(1987), ’유치찬란’(1989), ’조화 속에서’(1991),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1996), ’인류의 맹점에서’(1998),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2001) 등이 있다.


수상집으로는 ’침언부어(沈言浮語)’(1960), ’영원 속의 오늘’(1976), ’실존적확신을 위하여’(1982), ’삶의 보람과 기쁨’(1986), ’시와 삶의 노트’(1988) 등이 있다. 그밖에 사회평론집 ’민주고발’(1953), 묵상집 ’나자렛 예수’(1979), 시론집 ’현대시창작입문’(1988), 희곡 시나리오집 ’황진이’(1994) 등을 남겼다.

그는 말년에 「구상문학총서」(전10권. 홍성사 刊)를 기획, 제1권으로 자전 시문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를 출간했으나 완간을 보지 못했다.

그는 병실에서 투병중이던 지난해 10월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에 2억원을 쾌척하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 적극적이었다.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무기수 감형돼 복역중이던 최재만씨를 의아들로 삼아 석방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청빈한 삶을 살았던 그는 박정희 정권 때 대학총장직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세상의 시비에 휘말리기 싫다며 조용히 초야에 묻히길 자처했다. 문단의 큰어른이면서도이렇다할 감투 하나 쓰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생전의 업적으로 금성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동백장,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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