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미’ 반이 택했던 엄숙함
2016.08.08 15:21
20150611 아름다운 ‘미’ 반이 택했던 엄숙함
“각 반 대표는 저쪽 구속 테이블로 모이세요”
남해 힐튼 호텔 만찬장이다. 내일 펼쳐 질, 반 대항 장기자랑 순서를 위해 대표들을 소집하는 주최측의 방송이다. 20년 전, 30주년 재상봉 때 보았던 반 대항 장기자랑 장면들이 떠올랐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내게 간절하게 부탁을 했었다. “기순아 그래도 네가 제일 잘 할 것 같으니, 뭔가 좀 해봐. 큰일 났다. 우리 어떡하니?”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미 반, 신 반 합동으로 뽑은 삼삼한 가수, 최현숙이 총대 메고 노래 한 곡 불렀던 기억이다.
마침 곁을 지나는 우리 반 대표 강유순을 불러 세웠다. 뭔가 계획 된 것 있느냐 물었다. “아니, 나도 몰라. 누가 우리 반 인지도 모르겠어. 어떡하니? 모이라니까 가긴 가지만....”
정말 아무 계획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스물세명이 이번 여행에 참가 했다는 ‘미’ 반 친구 전체를 모아서 뭔가를 꾸며 볼 재간은 나도 없다. 준비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낭송이다. 마침 재상봉을 위해 썼던 시 한 편 전화기에 저장 한 것이 있다.
대표 모임에 가는 강유순에게 내가 시 한 편 낭송할 수 있음을 알렸다. 괜찮겠느냐 물었더니 단박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한시름 놓았다며 얼굴이 밝아진다. 그래도 혹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기다리기로 했다. 스물세 명 참가에 혼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 망설이며 하루를 지냈다. 확실히 결정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전화기에서 종이로 옮겨 써 놓으며 나름대로 준비를 끝냈다.
만찬장엔 화려하게 꾸며 진 디너가 나를 유혹한다. 흰 살이 꽉 찬 비싼 대게가 쌓인 곳에 눈길이 멈춘다. 아무 생각 없이 잔뜩 담으려다 주춤 했다. 시간이 넉넉지 않다. 마구잡이 식성을 충족시키려면 손으로 뜯고, 입 언저리에 게살을 바르면서 느긋하게 먹어야 하는데, 식후 처리가 만만치 않으니 아쉽게 비켜간다. 충분하게 채우지 못한 배를 달래며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낭송 할 글을 한 번 소리 없이 읽어 본다.
그 때, “너 뭐해? 한참 찾았잖아. 빨리 저기로 모여. 다들 너 오기만 기다리는데.” 아하, 하기는 하나 보네. 그제야 마음을 다스리며 모이라는 곳으로 갔다. 확신 없이 준비 하던 내게, ‘미’ 반 친구들의 얼굴이 뭉게구름 되어 내 주위를 감싼다. 순간, 자신감이 솟는다. 이어지는 감독님의 무대 동선 지시. 권혜순이다. 오늘 우리 공연의 컨셒(concept)은 엄숙함이다. 다른 반들 모두 흥에 겨워 떠들썩이며 웃기기가 전부지만, 우린 반드시 엄숙해야 한다. 얼굴에서 미소는 깡그리 지워라. 혹시 관중석에서 떠들거나 주위가 산만해지면 모두 그쪽을 향해 째려보며 엄숙할 것을 강요해야한다.
우선 내가 읽을 글의 내용을 알려야 했다. 바다 바람이 제법 한기를 느끼게 하는 만찬장 넓은 베란다엔 공연 준비에 바쁜 다른 팀들이 북적인다. 그렇다고 목청을 높일 수도 없다.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인 친구들의 온기를 느끼며 나지막이 자작시를 낭독 했다.
중간에 잠깐 울컥하며 낭독을 멈췄던 내게 혜순 감독님의 특별 지시가 떨어졌다. 기순이는 이따 울지 말고, 너희들은 절대 키득대거나 웃거나 하지 말고 시종일관 딱딱한 표정으로 관중을 압도해야 한다는 명령이다. 무대로 들어가는 순서를 혜순 감독이 직접 알려 준다 그럴듯한 의상의 네 사람은 중간에 서서 기순이와 같은 위치를 유지 할 것이며, 낭독이 끝난 후에도 인사는 안 하고 여전히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히 나간다는 독특한 설정이었다. 관객의 예상을 완전 뒤집어서 대상을 목표로 삼은, 야심 찬 권혜순 감독님의 순발력이다.
우린 지금 열일곱
어제는 설레임에 잠 한 숨 못 잤네 그려
잘룩한 허리 잘 드러내는 멋진 교복
자유 평화 사랑 깊은 뜻 담긴 세 줄 뚜렷한 하얀 카라
우린 오늘 이렇게 열일곱 꽃다운 모습으로
모여 있잖은가
고단한 삶을 진즉에 접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닿지 못할 곳에 먼저 가버린 친구들
그들의 손을 잡지 못 하고 우리만 모인 이 자리
그들 몫까지 우리 신명나게 한바탕 놀아 보세나
누군들 한번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 안 했겠나
그래도 눈물보다는 웃음이 쬐끔 더 많았던 까닭에
아니 눈물이 더 많았다 해도 우리 열일곱 그 꿈 많던 때를
뒤돌아보며 내닫고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또 내 닫고
뒷심 좋게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았겠나
이보게나 친구들,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대가 품었던 흔치 않은 그 꿈은
이제 얼마나 이루어 냈는가.
세상이 내 뜻대로 잘 따라주어 이루고 싶은 만큼 다 이루었다 해도
내 양팔을 얹어 놓을 그대들 어깨가 없었다면
그 무슨 대단한 꿈을 이루었겠나
열 손가락 모자라 세고 또 세며 적어나가던 꿈 보따리
그중 한 가지도 맞아떨어지지 않아 상심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이제 그대들과 나란히 얼굴을 마주하니
이게 바로 성공한 내 인생이구려
아직도 가야 할 길 남아 있으니
이 보게나 친구들 오늘 다시 열일곱 그 때로 돌아가
손에 손 맞잡고 우리 다시 꿈을 꾸어보세.
그 무엇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나
우리 모두 아름다운 열일곱
우리의 새로운 꿈을 가지고 함께 가꾸어 보세나
고운 배꽃 향기 이화 동산에 돌아와 모인
우린 열일곱, 다시 가슴 설레는 열일곱이라네
2007년 2월 25일 탄생한 작품
부동자세로 엄숙한 표정으로 무대를 빛내준 우리 ‘미’반 친구들에게 뜨거운 포옹 드립니다. 스물세 명 모두가 합하여 이루어 낸 멋진 무대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봅니다. 모두 거물급들 따스한 친구들입니다. 기약 없는 다음 공연 준비를 함께 시작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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