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목소리

2022.03.09 20:29

설촌 조회 수: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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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0                                                  집 나간 목소리

                                                                                               노기제 (수필가)

 

   언니, 우리 코랄 다시 모여요. 나오실거죠?”

  팬더믹 때문에 연습실이 닫힌 지 13개월 째란다. 어느새 꾀꼬리들이 목청을 풀지 못한 세월이 그렇게나 길었나? 그럼 난? “Sound of Music” 공연을 끝으로 연습에 불참했으니 5년은 족히 날려 보냈으리라.

  여고 선후배가 함께 화음을 맞추며 서로의 가슴을 온기로 나눠온 지 25. 크게는 뉴욕 링컨센터에서의 공연을 비롯해 작게는 로컬 교회에서, 더러는 미국 내 도시를 순방하며 따뜻한 소리를 전하곤 했다.

  대수롭지 않게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고 노래를 한다는 것이 뭐 특별한 은혜라고 감사했겠는가. 다른 취미생활에 몰입하면 코랄 모임에 냉큼 등을 돌리곤 불참으로 지내 온 시간들. 티끌만큼도 미안한 마음 없이 결석에, 무관심에, 난 평안하다 여기며 살았다.

  언제부터라고 콕 집어낼 수 없는 어느 순간에 목이 불편함을 느꼈다. 말하기가 쉽지 않아 짜증이 난다. 노인성 질환처럼 가래가 생기더니 급기야 호흡까지 불편하다. 목감기 증상인가 싶어 따스하게 감싸주며 소금물 양치를 반복해도 차도가 없다. 말소리도 시원치 않아 답답한데 노래까지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중동계의 젊은 주치의에게 하소연했더니 오늘 만난 환자중에도 서너명이 그런 증상을 호소하더란다. 한마디로 노인성 질환이라나. 그래도 너는 그들과 비교하면 엄청 건강한 편이라며 단칼에 내 고민을 일축해버린다.

  일 년에 한 번씩 혈액 검사하고 잠깐 면담하면서 건강한 편이다. 네 나이에 복용하는 약도 없이 너 같은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각종 달콤한 멘트에 혼이 나가 일 년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소용없는 칭찬에 넋 나가서 건강에 방심하면 곤란하다. 확실한 증상을 말했음에도 나이 들면 다들 그런 증상이 온다며 그냥저냥 그러면서 살라는 것처럼 들린다. 실력이 없는 의사란 생각이 든다. 주치의 갈아 치우자.

  말하기도 불편하고 노래도 안 나오고 목에서 뭔가 이물질이 살림을 차렸나 걱정도 된다. 입을 열고 환한 손전등 켜고 들여다보는, 그 혼한 목 검사라도 해야 의사지. 이게 무슨 야바위꾼 손놀림 같은 의견이란 말인가.

  팬더믹 핑계로 될 수 있으면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대화로 진료를 한다는 방침인 모양이다. 백신이라도 맞고 가라. 유방암 검사 안 받겠냐? 독감 예방 접종도 안 했더라. 의사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후 접견을 끝냈다.

  증상을 지켜보며 심란한 날들이 이어진다. 말이야 줄이고 살면 그런대로 견디겠지만, 노래도 미련 없이 포기해도 상관없다.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건, 낭독을 못 하겠다는 사실이다. 가끔 단체 카톡방에 올라오는 좋은 시나 혹은 동창들의 자작시 등을 읽고 마음에 들면 내 목소리로 낭독을 해서 다시 올려놓는다.

  내 능력으로 뭔가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낭독이다. 즐거움을 넘어 행복감에 취하는 종목이다. 내가 내 목소리에 홀딱 빠진다. 마음이 하늘을 품고 날아오른다. 이건 분명 하늘이 주신 특별한 은혜다. 내가 잘하는 것이 아닌 받은 특혜임을 깨닫는다.

  그 좋은 탈렌트를 받아 내 멋대로 과용했다.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과정을 무시하고 내 기쁨을 얻기에 급급했다. 이제 소리가 안 나온다. 잔기침이 심하다. 말소리를 높여도 본다. 코럴 모임에서 소리를 내려 노력한다. 안 된다. 안 된다. 어쩌지?

  간절함으로 집 나간 내 소리 찾아오려 기도한다. 식초 요법도 써본다. 줄기세포 활성화를 시킨다는 패치도 부친다. 실망도 말고 포기도 말자. 하느님께 매달리자. 다행히 통증은 없으니 계속 소리를 질러 본다. 악보 펼치고 제 음대로 맞게 나오기까지 살살 어르고 달래주자. 할 수 있다. 꼭 내 소리 찾아올 수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계속 노력하며 기다려보자. 이건 축복이다. 합창이라도, 할 수 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소리를 보태고 완성된 좋은 노래를 청중들께 들려드리자. 소리를 다시 낼 수 있게 되면 온 정성을 다해 열심히 노래할 것이다.

2021년 7월 16일 금요일 중앙일보 문예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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