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시 속에 나타나는 엽기를 찾아서 -시와 반시-

2009.02.01 10:02

임혜신 조회 수:421 추천:37

미국 현대시 속에 나타나는 엽기를 찾아서                

        
    며칠 전 뉴욕의 무명화가들이 거리에 있는 개똥을 찾아다니며 똥 위에 스프레이 물감을 칠하고 장식품을 얹어 개똥조각을 만들고 다니는 모습이 TV에 잠깐 방영된 적이 있었다. 얼음조각이나 모래조각이라면 몰라도 개똥조각이라니, 말문을 막히게 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미국은 과연 엽기의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이 나라는 온갖 엽기를 속속 생산할 뿐 아니라 즐겁게 소비해주는 나라이다. 사람들은 엽기적 행위를 은근히 기다리고 엽기는 대중의 유혹을 꿈꾼다. 그것은 마지막 기로에 오른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엽기에도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 사회에 실상 진정 엽기는 없는 지도 모른다. 너무나 많은 새 것들 속에 갇힌 이들에게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근육 속에 일종의 면역체계가 생긴 것이다. 역사가 가르쳤고 예술이 보여줬고 과학이 증명해준 현대인의 축적된 정보위에 대중매체, 특히 인터넷이 상상을 불허하는 기상천외의 사건과 사실들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만들어주고 꾸며주고 있는 지가 얼마인가. 우리는 전쟁도 중계방송 받으며 생체의 내부를 파헤치는 수술과정을 관람하며 디스카버리호를 따라 태양계을 밖으로 나가보기도 하고 대학에서 온갖 시청각자료를 동원한 성교육을 받기도 한다. 코미디 채널에서는 노골적으로 성과 정치와 사회를 우롱하고 블락버스터 휩쓰는 영화들은 혐오스런 범죄의 장면들로 가득하다. 문득 세상이 이런 즈음에 문학이 엽기일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스친다. 문학은 차라리 엽기를 평정하고 있는 축이 혹시 아닌가. 멋진 플랏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고 칼라도 없고 형체도 소리도 없는 몇 줄의 문자로 시인이 어떻게 그의 엽기적 힘을 세상에 노출한단 말인가. 게다가 엽기적 사회 속의 엽기적 시란 얼마나 비엽기적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던 터라 생소하기만 한 엽기라는 말에 접근을 해본다. 사전을 찾아보니 엽기의 정의는 특이한, 남다른, 기이한 행동이나 생각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 엽기 문학은 특이한, 남다른, 기이한 문학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문학에 대한 반생각과 반행위를 담은 반문학으로 우울한 형색일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아주 발랄한 세계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전통과 고정관념과의 불화를 동반하며 그것들이 담긴 사회의 진보적인 영역을 대변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엽기는 현사회를 대변, 반영하는 과거사회와의 불협화음이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엽기시들은 21세기를 떠나 저 혼자 멀리 너무 멀리 가지 않을 것이고 못할 것이다. 이제 전후의 우울한 엽기는 천천히 사라져간다. 역사와 더불어 엽기도 엽기적 시도 그로테스크한 괴기의 좁은 영역을 뛰쳐나와 발랄하고 발칙한 엽기적 신세대의 대변자로 변신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 이르러 엽기는 그 엽기적 힘을 대부분 상실한 셈이다. 모두 함께 각자의 끼를 열심히 발하는 이 시대, 아무리 엽기적이려해도 엽기적일 수 없을 것 같은 이 시대의 시들 중 독특한 개성을 가진 몇몇 시들을 찾아 그저 소개의 차원에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로테스크한 시들을 열어본다. 이런 부류의 시들은 일단 부정적이며 어두운 단어를 사용한다는 데서 쉽게 다른 시와 구분된다.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시들이다. 성한 것 없이 뜯고 파헤치고 부숴놓으니까. 심약한 사람은 며칠 앓아누울지도 모른다. 병적인 시들이다. 병에서 태어난 병의 꽃들이며 병의 정수들이다. 어째서 그런 것이 시인가? 하고 물으면 그들은 되묻는다. 어째서 이것이 시가 아닌가? 라고. 그런 류의 시를 말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찰리 시믹이다. 그는 몇 십 년을 한결같이 어둡고 침울한 시를 쓴다. 우울하지만 범죄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는 수동적 비극의 미학이 담겨 있다. 그래서 화자의 광기가 아니라 관찰자의 관점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말한다, 삶은 죽음을 향한 행진이며 한 순간의 무사는 단지 지연된 참사일 뿐이라고. 그의 시는 삶을 신뢰하지 않고 자연을 신뢰하지 않고 사랑도 미래도 쾌락도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버림받은 영혼은 망령처럼 파괴된 도시의 우울한 거리들을 헤매고 있다. 어디를 봐도 종말적 비극이 있을 뿐이다. 희망이 끝난 비극적 챈스의 존재가 있을 뿐이다. Children of Men( 인류의 자손)이라는 영화의 장면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러나 공상과학영화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 리얼한 현실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종말 짓겠다고 2만 여명의 군사를 더 투입하려는 있는 지금, 날마다 자살 폭탄과 죽음과 테러의 소식이 들려오는 지금 찰리 시믹의 시들은 미국으로 흘러든 잔혹한 전쟁의 처절한 기록필름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은 그의 시 [눈먼자의 거리]의 일부이다

죽음은 언제나 일찍 일어나지/ 거리에서 당신을 향해 벌리는 팔/ 그 아래로 빠져나가려면/ 당신은 아주 재빨라야해/벽에 몸을 바싹 붙이도록 /그가 하얀 눈가리개 속에서/눈을 크게 뜨고 /두 팔을 풍차처럼 / 혹은 거대한 가위처럼 벌려서/당신을 선회하는 동안  

        일찍 일어나는 것이 죽음이라면, 풍차처럼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죽음은 첫 아침의 태양인지 모른다.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눈부신 백색의 아침이 죽음이라니, 이 얼마나 비극적 심상인가. 죽음의 빠르고 민첩하고 냉정한 힘에 맞서 시 속의 화자는 싸우는 법을 찾고 있다. 어떻게 하면 죽음에게 잡히지 않을 것인가가. 그것은 죽음보다 더 신속하게 죽음의 날개 죽지 밑을 빠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매일 제 생명의 보초를 서면서 죽음과의 정면충돌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존재, 그는 지옥의 수배자이며 어둠과 잠복전을 벌이는 게릴라이며 쫒기며 숨으며 피하며 살아가는 죽음의 파편일 뿐인 것이다. 다음은 같은 시인의  [불을 켜줘]라는 시이다.

아주 작은 보이지 않는 파리/윙윙 온 밤내 /귀찮게 구네/그의 작은 지옥/ 작은 머리의 /양옆에서 눌러대네/여기, 가위를 받아봐 /네 손으로/이 새 모양의 가위를/가위를 재빨리 놀려/ 아니면 지독히 느리게 /너의 손톱, 내가 보니/벌써 붉게 물들어있군/어둠 속에서 /생으로 씹히고 있어.  

   하수구나 썩은 시체에서 날아다니는 파리. 파멸의 구덩이를 날아다니는 파리떼들. 주검 위를 선회하는 파리들, 그것과 싸우는 이들도 똑 같이 파멸의 구덩이로 몰려가는 눈 먼 파리 같은 자들이다. 그것이 그가 보는 인간들이다. 파리는 어쩌면 떠나지 않는 고통스런 사념인지 모른다. 아무리 잘라내도 아무리 손톱을 뜯으며 소리쳐 봐도 그대로 생으로 씹히기만 하는 생의 고통스런 사념.  마지막 칼날이 떨어질 때까지 죽음이 임박한 것을 의심하지 못하는 자들, 그러나 피에 묻은 발로 달리는 이 생존자들은 이미 죽음에 발을 들여놓은 자이다. 다음은 [밤의 산책]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밤은 그의 새장을 내던져 열어주었어/나무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척 했지/아주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에도/나무들은 일순의 격렬한 발작을 했지/그리고는 곧/긴 순간의 귀 기울임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지.

  문뜩 헤머타잇이라는 검은 금속성의 광석을 떠오르게 하는 이 시는 차고 고요한 동시에 발작적이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아름다움이다. 고요의 안쪽에서 격렬하게 발작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악마인가, 인간의 악마적 상상력인가. 작고 무력한 인간존재를 이렇게 불안하게 하는 숲의 깊은 어둠을 본적 있는가. 나무들이 달빛에 때때로 발작하고 다시 고요한 잠복의 세계로 숨어버리는 곳. 음모와 주검에 둘러싸인 적막의 숲 속을 본 적이 있는가. 바로 그런 순간이 이 시에 포착되어 있다. 이러한 찰리 시믹의 시가 고전적으로 엽기적인 시라면 다음에 소개하는 젊은 시인 가브리엘 거딩의 ‘사랑하는 닭에게’는 온갖 엽기적 사건이 터지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견디지 못하고 그만 미친 시이다.

사랑하는 닭아, /안됐구나 저 시골 녀석이 너를 걸고 놀음을 하니. 우리의 집고양이는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널 아라비아 참새쯤으로 취급해. 나비들은 다 조잡한 종이 위에 못박혀버렸어. 너의 발은 왜 그러니: 마치 차려입은 도마뱀 같군. 내가 만일 소의 꼬리를 직장에 넣어버리면 어쩌겠니? 발굽이 지글지글타서 그만 누전이 될까? 호박은 카톨릭이니? 루터파니? 저 선교사는 내 어머니에게 홀딱 빠졌었어. 선교의 용해물이 어머니를 온통 덮어버렸지./어제 나는 냉동유충을 요로에 집어넣었어. 유충은 녹아서 기어 나왔지. 나는 토끼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있는 거야. 나는 토끼를 입에 먹지 않아. 입에 맞지 않지. 아무리 작은 토끼도 그래. 넌 나만의 닭이야. 너를 손톱 다듬는 곳에 보낼 거야, 부리도 칠하려면 칠해. 그럼 넌 예쁜 닭이 될 거야./진심으로,/가브리엘 거딩

   공격적 모놀로그형식의 이런 시는 현대시의 한 부류를 이룬다. 그만큼 많다는 것인데 이 시는 선뜻 읽어, 아니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른다. 아마 인간시장을 그린 것 같다고 짐작한다. 참새, 고양이, 나비, 호박, 선교사, 여자, 음식, 예쁜 것, 토끼 등을 통해 인종차별, 종교적 허위, 화려한 겉치레와 가식들이 서로 부대끼는 인간시장의 현 세태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시는 미친 자의 행세를 함으로서 들끓는 내면을 카타르시스시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다음은 자슈와 와이너의 [잡종의 죽음 부르스]의 일부이다

내 뒤에 있는 게 뭐지?/뒤에서 뭔가를 갉아먹는 자는 누구냐고?/ 개가 뼈의 골수를 갉아먹는 소리 같군/이 뼈들은 오래된 거야/태양이 골수를 이미 말려버린 거야/대체 어떤 개가 이따위 뼈를 쪼개는 거야?/가까이 오고 있어 돌아보지 마/돌아보지 마 돌아보지 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어/오, 내게 으르렁거리지 마, 취한 미친개야/나의 관절이 부서지는 듯, 하지만 뼈는 묻히지는 않았어 아직/말하는데, 뼈들이 말하는데, 내 뼈는 묻히지 않았어, 아직/내 배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들려? 그 어느 때보다도 배가 고파/진주빛 이빨을 드러내는 거야? 잡종개의 숨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그래, 너 으르렁거리는 진주빛들, 냄새나는 숨결/돌아서서 너를 애완견처럼 만져줄 수 있겠지만 나는 애완동물은 포기했어/나는 돌을 집으려 해/자신 있게 말하는 데 나의 목적은 정확해/자신 있게 말하는데 나의 팔은 튼튼해/어두워지는군, 하지만 난 놓치지 않아/더 어두워지는군, 나는 놓치지 않아/오, 빛나는 달빛 아래. 나의 전 생애가 여기를 향해 온 것이었거든.
                
     이 시는 그 무엇엔가 쫒기는 현대인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누구에게 왜 쫒기는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으나 그에게는 목적이 하나 있다. 쫒는 자를 처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무시시한 잡종개에게 쫒기면서 언젠가는 돌로 쳐 죽이리라는 목표를 향해 불안한 생을 밀어가는 자의 모습, 쫒기면서 마지막까지 살생을 계획하고 집착하는 모습이 비극적일 뿐이다. 싸움이 끝날 때 생이 끝나는 그런 비극. 잡종개, 미친개로 비유된 세상의 파란 속에서 화자는 마침내 돌을 집어 들고 마지막 순간의 결투를 시작한다. 하루가 가고 밤이 오고 한 평생이 가고 마지막이 오는가. 달빛은 빛나고 그의 전생애의 기다림은 그 순간에 집중된다. 생은 이 마지막 결투로 끝날 것인가 보다. 누가 이길까? 누가 이긴들 다를 것이 있겠는가? 다음은 러슬 에디슨의 [쥐 먹기에 대하여]라는 시이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쥐를 굽고 있었다; 불루베리와 함께 입에 넣어주려고/ 테이블에서 그는 치과의사의 기구, 외과의의 나이프, 그리고 보석상의 확대경을 들고 조그만 구인 것들에게 몸을 굽혔다 /20년 동안이다; 커리 뿌린 쥐, 마늘과 버터를 바른 쥐; 털까지 통째로 복은 쥐;샐즈베리식 쥐, 덫에 걸린 쥐, 그 덫 째로 구운 쥐; 타타르 소스 바른 쥐, 보름밤 생리의 피에 삶은 쥐/20년 동안의 그 짓, 그들의 방식으로 쥐들을 먹어온 것...하지만/잊지 마시길, 매일 밤 해로운 동물이 하나씩 사라져간다는 것을...
          
   참으로 해괴한 이 시는 인간적 고상함이 지닌 편협성에 대한 자학적 관찰이며 보고이다. 날마다 쥐를 먹는 부부, 실은 쥐가 아니라 소고기와 양고기와 연어를 먹는다 한들 잡아먹는 것에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괴기한 취향의 시지만 생명의 잔인성과 일상성을 한 밥상위에 놓는 기법이 냉정하고 독특하고 현대적이다. 우리는 먹는다. 우리는 동물을 잡아먹는 동물이다. 시의 관점은 전혀 감상적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다. 다만 비정하다. 나이프와 확대경처럼 차겁고 정확하게 먹는 자 쪽과 먹히는 자 쪽을 오가며 생태계의 차거운 안정성을 유지하는 듯, 자연계의 잔인성이 시의 불빛아래 자명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실 얼마나 잔인한 것이 생태계의 내부인가. 그것을 감정 없이 드러내는 이 시는 또 얼마나 잔인한 시인가.
   두 번째로 섹스와 엽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울한 시는 현대만의 특성을 아니다. 그러나 섹스는 현대의 것이다. 이 시대의 섹스는 맑은 공기, 좋은 음식, 깨끗한 물, 멋진 집처럼 하나의 유희적 물질이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도구이며 상품이다. 현대는 얼마나 효율적인가. 섹스는 원시성의 회복이며 생명의 회복이라 한다. 슬프게도 나는 섹스에 뒤지는 현대시는 읽지 못했다. 멋진 현대라는 도로, 그 놀랍게 건강하고 현명해진 엽기적 하이외이를 타고 이들은 어떻게 하면 오래 오래 멋지게 생존하며 더 사랑하고 잘 헤어지며 살 수 있는 지에 관한 일련의 연구에 몰두해있다. 그러나 통탄은 이미 과거에 속한다. 모든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이에게만 변화가 아닌가. 이미 대중의 개념이 바뀌는 데야 어쩌겠는가. 사랑과 유희와 집착과 망각의 모든 방정식이 바뀌었다는 데야. 더구나 앞서간 멋진 서정시인들에게 가슴에 새길 아름다운 연애시를 쓸 기회를 다 빼앗긴 오늘의 시인들, 이 가여운 시인들의 외침을, 울부짖음을 외면만 할 수는 없다. 소개하는 시는 반한국계 시인 노엘 스코르스키의 시이다.

지난 부활절에/할머니는 딸기 치즈케익을 자르시면서/오줌을 싸셨다, 이혼 전 해였다./
아버지가 케익을 사오셨었다 / 몇 주나 떨어진 먼 곳/ 펜실바니아 태너스빌에 있는 노인마을로 할머기께서 /가시기로 하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할머니는 오줌을 싸시면서 /계속 케익을 자르셨다/ 무질서한 손금자국/할머니의 밝은 파랑색의 바지가 젖어가는 것을/나는 바라보았다./지난 밤 켄의 그것(cock)처럼 자라나던, 짙어지던 얼룩 /전날 밤 나는 입으로 그의 그것을 세워주었다./그래서는 안돼 우리 그는 말했다. 나의 머리를 움켜쥐면서...중략...하지만 너무 기분이 좋아./그의 한 손은 나의 젖꼭지를 비틀었다/마치 켄의 새로구한 실버 M3의 점화장치처럼...중략...내 꼬리뼈가 할머니 얼굴의 홍조처럼 타오를 때/아버지는 내게 한 조각의 케익을 건네주었다./내가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어머니는 눈짓으로 저지하셨다./입 닥치고 있어‘( Just don't say a Fucken word) -  -첫 경험-

   이 시는 3대를 한 자리에 놓고 노인문제, 양로원과 첫 섹스와 함께 직조한 시이다. 아마도 노인문제를 섹스 없이 거론했다면 심심했을 거고 섹스만 늘어놓았다면 천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줌을 싸시는 늙으신 할머니, 가기 싫었던 노인 마을로 결국은 가시기로 한 일,  이별식겸 축하식, 그래서 사온 케익, 첫 섹스, 아마도 불륜의 섹스, 멀리 부모를 보내는 자식들, 그 속에 얽힌 아픔과 눈물과 서러움과 사랑과 비극과 현실, 그 모든 것은 알면서도 입 닥치고 있어야 하는 이들, 그리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얼굴들이 함께 얼룩져있다. 어쩔 것인가 이렇게 계속되는 생을. 섹스에 대한 부담감만 내려놓고 읽는다면 좋은 시 아닌가? 다음은 테렌스 윈치의 [섹스 엘레지]라는 현대판 서정시이다

    내 연인들은 사라져갔네, 예전엔 수도 없었지./ 하나는 보스톤으로 이사해서 일본 사진작가와 결혼했고/ 또 하나는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지./ 오랫동안 죽은 줄로 잘못 알았던 또 하나는/ 지금 맨하탄에 살고 있지./우리들 얼마나 가까웠던가 / 서로 빨고 물고 삽입하고 관통하고 폭발하며 하나가 되었었지. /소금기에 젖은 몸의 이상한 냄새, 촛불은 타오르고 옷들은 바닥과 침대에 흩어져 있었지...중략...헌데 내 사랑들아, 즐거움의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에 있네. 몸은 너를 아직도 느끼네./ 혀는 아직 너의 맛을 기억하네./그 외의 것은 다 잊었나보네./현재의 삶은 은행구좌에서 자동적으로 지출되는 생명보험료이네/ 과거는 저 먼 도시의 변방 텅 빈 땅에서/ 것 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데.

   요즘엔 연인들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쉽게 헤어지니 또 쉽게 만날 밖에. 그러나 이들은 아직 완전한 무병장수 치료를 받은 미래인이 아니다.  헤어짐의 아픔과 만남의 즐거움을 아침마다 샤워하듯 소독해 낼 수 있을 지도 모를 미래인이 아니다. 이들은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과거인이며 현재인이다. 저 기억의 변방에서 타오르는 경험된 과거를 생명보험료처럼 열심히 지불하며 미래를 향한 현실을 노를 젓는 인간들이다. 보험금처럼 안전하고도 불안한 말이 있을까. 재난과 구원을 한 몸에 진 보험이라는 것, 그것을 계산해주듯 오늘을 제공하며 어제의 불타는 물결 위에서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미래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샤론 올즈의 시이다. 섹스에 관한 시라면 단연코 샤론 올즈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악마가 말하기를’] 일부를 살펴본다,

   --내가 너를 잠긴 상자에서 꺼내줄 테니/말하거라, 네 아버지는 더러운 자식이라고/ 그래서 나는 말했다/내 아버지는 똥 같은 자식이라고/ 그러니 사탄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제 열린다./네 어머니는 매춘부 어머니라고 또 말해라...중략...출구는 사탄의 입을 통해서였다./나의 입속으로 들어와라, 그는 말했다,/거의 다 와 있구나, 그는 말했다 .그러자/거대한 돌쩌귀가 닫히기 시작했다... 중략 ...사탄은 키홀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잠긴 상자 속에 남겨져 있었다. 그는 하트모양의/ 자물통을 혀의 왁스로 봉해버렸다./이게 너의 관이니라, 사탄은 말했다.

   이 시는 인간의 탄생을 악마의 속임수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을 괴이한 성교로도 비유하면서 시인은 인간의 탄생 자체를 관 속에 갇히는 일이라 말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물론 시인의 그러한 관점이 아니라 표현의 대담한 엽기성이다. 이 시 속에는 성적인 단어 cock, cunt, fuck 등이 등장한다. 다음은 그의 시 [베비시터]의 일부이다.

.....불빛도 없는 화장실에서/ 나는 푸른 바닥에 누웠지. /가슴의 맨살을 찬 타일에 대고,
/나의 손을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지. /젖꼭지가 빛나는 푸른 바다빛으로부터/나를 받쳐주었지. 마치 나르는 것처럼./ 아래위가 바뀐 채. 세상이라는 지붕 아래서...

이 시의 전반부에서 화자는 이웃집 아이를 봐주는 틴에이저로 아기가 예뻐서 자신의 젖꼭지를 물리려한다. 하지만 아이는 방실 방실 웃을 뿐 자신의 젖꼭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자 화장실의 푸른 타일 바닥에서 자신을 몸을 만지는 것이다. 이 외에도 샤론 올즈의 시에는 sex관련된 신체의 이름들은 자주 거론된다. 성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노골적인 성이다.  sex에 관한 일체의 일은 샤론 올즈에게는 숨길 일이 아닌 것이다. 어머니가 되는 일, 아버지가 되는 일, 딸 아들이 되는 일이 성, 성교적 쾌락과 관련이 없는가? 또 한가지 특징은 샤론올즈의 시에는 성, 섹스는 있지만 방종은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같은 시인이 쓴 [단 한 번]이라는 시이다.

    단 한 번 나는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았다. 푸른 화장실의 문을 열자,/ 언제나 그는 문을 잠그고 있었다/ -열려 있으면 비어있었던 곳- 그런데 반짝이는 청록색 타일에 싸여/ 아버지가 변기에 앉아 있었다.. /나의 아버지, 그의 전부, 그의 모든/살결이. 그 순간 나는 약간 기울어진 방해받지 않는/급습으로 그를 응시해 올라갔다. 발가락, 발목/ 무릎, 엉덩이, 가슴, 목,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 나의 아버지. 그는 보호받지 않고 있었다,/바늘 자국 하나 없는, 부끄러운 소녀처럼 변기 위에/ 그가 볼일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을/알았지만, 그의 모습에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간적 평화가 있었다.....나의 아버지

   이 시는 화장실에서 볼일 보시는 아버지의 누드를 본 딸이 아버지와 인간적 공감대를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섹스로 남녀를 구분하기 이전의, 딸과 아버지 어머니와 아들을 구분하기 이전의, 모든 성적 금기 이전의 인간적 공감대의 세계에 이르는 방법의 하나로 이 시인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세 번 째로 다양한 주제를 보여주는 몇 몇 포스트모더니즘계의 시들을 살펴본다. 이들은 개인감정과 형용을 절제하며 바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고 하고 패자의 입장으로 인간사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거대한 정보의 현란한 바다에서 현대인들은 우리가 고독한 티끌이라는 것,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신에게서 운명에게서 자신에게서조차 버려졌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들은 그러나 왜냐고 묻지 않는다. 대답은 없을 것만은 그들이 확신하고 있으니까. 왜냐고 물어도 현대인이 아니고, 언젠가 신이 답하겠지요‘ 라고 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도도 아니다. 이들은 차라리 즐기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 피할 수 없을 바에게 즐기는 것이 현명하리라. 이들은 지식과 허식과 지혜까지를 우롱하며 성공의 빛나는 우아함을 비판한다. 그리고 조각으로서의 한계적 삶을 그 안에서 충분화 하려한다. 끝없이 당하면서 삶을 확인하는 이들은 우주의 역동적 티끌들, 구성소들 것이다. 다음은 제임스 테잇이 쓴 [실패자]의 일부다

  억눌린 듯 압박감을 느꼈다. 압박을 느끼면 난 일을 해내지 못한다./제니는 말했다. “넌 챔프야, 언제나 성공해. 이리와 트레니스, 넌 할 수 있어”/나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 나는 실패자야, 언제나 게임에 졌어. /이겼을 때조차도 나는 진 것처럼 느껴졌었어. 세 살 때 벌써 내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으리란 걸/ 난 확신했어. 아무도 원망은 하지 않아. 그저 그런 생각으로 내 영혼이 가득 차 있는 느낌이야/.....중략... “나는 마치 회오리에 갇힌 것 같아. 어지럽게 침몰해 내리고 있어. 우리 영혼 말고 다른/얘기할 것 없어? 결국. 이건 그저 나비야, 그냥 증거라고“ 라고 나는 말했다. 제니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후라이팬과 냄비들을 두들겨 패댔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서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어. 내 손에서 알이 깨고 있었다. 수달의 알. 수달은 알을 낳지 않아, 하지만 나는 너무 배가 고팠다.

     이 시는 인간의 가슴 속에 실패한 자로 남아있는 성공에 대한 불안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시의 주인공은 시인일 수도 있고 음악가일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그냥 아버지이거나 학생이거나 직장인일 수도 있다. 그들의 영혼 속에 있는 이 실패자는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스트레스다. 세상의 기대, 부모의 기대, 아내의 기대, 그리고 자식의 기대 때문에 진땀 흘리며 억지로 용감한 척 해본 일 있는 이들은 알 것이다. 자아가 눈뜨면서부터 우리는 싸워야하지 않았던가. 공부, 돈, 연애, 결혼, 아이, 노후의 문제까지. 다음은 소라야 샬포쉬의 [머퀴리의 퇴행]이라는 시이다.

  Newark까지 갔는데 시카고행 비행기가 운항취소가 되었어. /“ Fuck You" 라고 소리쳤지, 실은 ” 실례합니다“ 하고 말하고 싶었지/ 내 보스, 사람 사냥꾼 ( 간부인재 스카우트) 에게 이 메일을 했지“ 발사/ Sex를 하는 동안 난 고양이의 이름들 불러댔지...중략.../옛 애인과 마주친 나는 너무 보잘 것 없었지 /현찰카드를 삼켜버린 현금인찰기는 고장이 나고 /내 뒤에 섰던 사람들은 화를 냈지/전기가 나가고 치과의사는 드릴을 갖다 댔지/ 그는 소리쳤어, “너의 그곳은 (Pussies) 정말 크고 가슴은 탱탱하군”:/ 고양이가 전화카드를 씹어버렸고 핸드폰은 배러리가 나갔어/저기 높은 곳에 계신 이께서 텔레파시를 보내는군 날 미워한다고/Holland 터널은 완전히 막혔으니. 어떻게 단 한 번이라도 /비행장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가 있겠어?

     머퀴리의 퇴행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시는 직장을 가진 싱글 뉴욕의 아가씨의 초상이다. 문득 ‘Devil Wears Prada' 가 생각난다. 머퀴리는 길손의 신이니까 이 아가씨는 자신을 안내해야할 신이 사라져버린 상황을 뉴욕의 교통체증을 통해 표현한 듯싶다. 차가 밀리고 비행기 시간에 늦고 비행기는 취소되고 전화기도 현금카드도 못쓰게 되고 그 와중에 어쩌면 더 멋져진 옛 애인과 마주치고 치과와 Sex의 문제가 뒤섞인 이런 날을 하루, 또 하루 그렇게 365일을 혹시 우리 살고 있지 않은 걸까?  같은 시인이 쓴 [뉴욕여자]라는 시를 보면 그는 보드카과 가죽끈에 엄마가 네 식구의 식비로 쓴 것보다 많은 돈을 쓰면서 뉴욕에 산다고 한다.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거라 한다, 그는 뉴욕여자를 포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 주택지에서 뜰을 갖고 여유를 갖고 가족으로 서로 기다리며 어울려 산다는 것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한다. 그 위험이 무엇일까?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게 될까봐서일까? 멋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과거적 삶이 교외에, 시골에  그리고 얽힌 핏줄과 인연 속에는 있기 때문일까? 어쨋거나 뉴욕여자는 안정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보다 자유를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뉴욕여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17세와 17일의 추억은 아름답다. 다음은 [17세]라는 시이다

PJ와 헤어진 뒤 만난 남자친구는 1월 17일에 태어났지. 나는 그의 행운을 삼켰고/그 액체 속에서 꿈꾸었지. 섹스로 부르튼 입술들, 그는 코넷티컷 교외에서 별을/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지,/ 나는 별들이 우리를 기억해줄 것이라고 상상했었지. 우리의 이름은 동요처럼/ 운이 맞았었지. 나는 그의 달 위로 뛰어올랐었어

   17세에 만났던 애인의 생일을 기억하는 도시의 여자, 별과. 섹스로 부르튼 입술과 동요같은 사랑의 노래를 추억, 그것은 별보다도 멀다. 이 분방한 세대의 사랑은 그들이 떠나온 기억 속에 이렇게 잔해처럼 빛나며 남아 있는지 모른다. 다음은 역시 젊은 시인 토니 토스트의 시이다. 그의 생업은 커피집에서 라테와 카푸치노를 서브하는 일이라 한다. 나는 가끔 시인들이 좀 더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시인의 시에는 쉽게 이해되는 문장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읽으면 왠지 아름답다. 다음은 [12개의 자화상]의 일부다.

     눈(snow)은 어둡고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 나는 한 때, 어린이였다./나는 날씨가 무엇인지 모르고, 어린아이로서만 단단해져갔다./첫 번 째 10년은 가득히 비가 내렸다. 나는 그림자들이 달아나는 것을 바라보았다./눈은 오늘 밤 다르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자라나서, 벌거벗은 채( 나는 거실에 있고, 불은 꺼져 있다): 보이지 않으며 그리고 가득 차오르는./그것이 나다, 혀가 단단히 무의식에 잠겨있는. 느린 내면의 흐름, 숨결(비틀린다) 침묵 아마도 침묵, 그리고 슬픔/...중략....눈(雪)은 기교이다. 나는 방금 이리를 발견했다. 진짜 이리다, /부서진 거울이라 이름한다./그것의 갈비뼈가 보인다. 손을 넣어 숫자를 센다. 이리의 심장은 운율같은 것, 모래 같은 것,/ 나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리를 들고 다니다; 이리는 혀를 삼켰나보다. “ 내 목소리가 너와 함께 한다 내 목소리가 당신을 지탱해줄 것이다.”

    이런 시는 언어를 색체로 생각하듯 음악으로 생각하듯 그냥 쭉 읽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언어들은 독자의 가슴에서 서로 얽히고 풀리며 하나의 장면을 연출시킨다. 내 가슴속에서는 외로움 현대인의 모습이다. 순결한 유년과 욕망의 이리를 21세기라는 눈처럼 차고 넓고 고요한 배경에 놓고 서있는 젊은이의 서정과 고독이 만져질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특징 중 하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듯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 혀를 잃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다, 부와 편리와 섹스를 배경으로 그들은 진실을 침묵한다. 나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입을 잃은 시인의 노래를 들으면. 그 외에도 인종문제를 파헤치는 시들, 각 민족과 문화를 배경으로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시들, 랩이나 스탠드 업 코미디와 유사한 시들, 도덕성이 자리 잡지 않은 원시사회적 정직성과 냉혹함을 지닌 동요등 일반시론의 경계를 넘어가는 모든 작품들을 또한 엽기적시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차알스 브꼬브스키도 엽기로 성공한 시인이고 반엽기가 엽기라면 현대적 서정시인 빌리 콜린즈도 엽기적 힘이 있는 시인이다. 또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현대시의 또 하나 대중적 집단적 엽기적 요소는 유머이다. 현대라는 엽기적 바다에서 살아있게 하는 빛나는 고통의 비검이다.
   이렇게 끼 많은 현대사회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에 밀려 어딘가 폐선처럼 우주의 변방으로 멀어질 것이다. 문득 미래인들도 시를 쓸까를 생각해본다. 그들도 철학과 감성이 짜릿하게 반죽된 한 줄의 문장을 밤늦도록 매만져볼까. 그런 필요와 여유가 있을까. 그들은 시도 공장에서 생산할까. 개인 개인에게 맞는 스타일로 주문 제작 될까. 밤마다 침실로 그 시들이 배달될까. 아니면 아침식사를 준비하듯 손끝에서 흐르는 감성의 자장으로 매일아침 사람들마다 자신들을 위한 지상최고의 시를 쓸까. 그리고 그 지상최고의 시를 지상최고의 과일처럼 먹을까.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만일 기술로 통제되고 소독된 사회가 온다면 필시 시는 광고문정도로 축소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사회학자 제임스 마틴의 말대로 세상이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으로 천차를 보이며 이분화된다면 시도 이분화 되지 않겠는가. 어떤 시들은 타임머신의 역에서 푸른빛으로 빛날 것이며 어떤 시들은 지하에서 신음할 것이 아니겠는가. 3,4, 대전이 일어나 세상이 멸망한다면 우리는 작은 생물이 되어 작고 새로운 생물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것이다. 지극히 작고 느리고 축축한 원형동물의 노래같은 것을. 불행하게도 더 이상의 희망은 불가능하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의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엽기와 반엽기를 동시에 꿈꾸며 이렇게 사라져갈 것이다. 시 속에서 인류는 너무 오래 고민했다. 인류의 심장은 너무 아팠고 너무 슬펐고 너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 사라져야 한다면 사라져도 좋지 않겠는가.


시와 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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