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그륵*/시가 있는 수필

2009.10.05 03:15

성영라 조회 수:2023 추천:181

                                             어머니의 그륵*

                                                                                                                  성영라

                                                                                                                                                                                                                        
   한국에 계신 친정 어머니의 건강이 부쩍 안 좋아졌다.  생계를 위해 꾸리던 가게를 정리하시고 아들 내외와의 한 지붕 살림을 도맡아 하시면서 갓난이 손녀도 키우느라 힘에 부치셨던 모양이다.  원래도 심장이 약해서 거의 맥이 뛰지 않는다는 한의사의 진단에 늘 조마조마했는데 당뇨와 혈압이 합쳐지면서 부쩍 약해지신 것이다. 급기야는  집 욕실에서 한번, 시장 다녀오시다가 길에서 또 한번 맥없이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여 가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한달음에 달려올 수 없는 태평양 건너 딸에게는 마음 쓸까봐 내색도 않으셨기에,  몇 달이나 지난 후에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게 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남편 또한 디스크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었으니 알았다 해도 정말이지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더 큰 후회를 하기 전에 엄마를 보고 와야 겠다는 생각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왼쪽 귀의 신경이 완전히 죽어버려서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엉뚱한 대꾸를 하시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부쩍 외로움과 노여움을 타시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가슴을 베었다. 소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바람을 타고 도서 시장을 강타하고 있었던 것도 부채질을 했을 것이다.

   공항에 마중 나온 동생과 아파트에 들어서니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 나오신다. 두 팔로 안아드리기도 전에 속으로 ‘아니, 울 엄마 맞아?’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엄마, 왜 이렇게 뚱뚱해졌어. 운동 좀 열심히 하시랬더니 얼굴이 왜 이래” 라며 퉁바리를 놓고 말았다. 잠시 멈칫 머쓱해하시다가 “뭐, 사람들이 보름달처럼 훤하고 좋다고만 하더라. 니는 오자마자 잔소리가.” 하신다. 두해 전에 뵈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엄마가 늙어가시는 구나……

   다음 날 아침 느지막이 아침상 차리시는 걸 도와드린다고 알짱거리다가 국사발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투덜거리며 깨진 조각들을 줍고 있는데 뜨듯한 국물처럼 등짝에 흘러내리는 엄마의 말씀. “괘안타, 쓸만큼 썼다. 가끔 깨트리고 그래야 그륵 장사도 묵고 살 거 아이가. 평생 안 깨진다 카몬 그거 큰 일인기라. 새  그륵  사주고 써주고 해야 되는 기제.” “아이고, 울 엄마 속에 부처님 들앉아 있었네. 맞다, 맞다.” 맞장구를 쳐드리며 우리는 의기투합을 했다. 아, 울 엄마 맞네. 모습은 변했지만 울 엄마 맞아. 그제사 시장끼가 느껴지는 거였다.  

   딸 아이 교육상 좋지 않다며 바른말 쓰기를 주장하는 아들에게 입술을 오므려 내미시는 엄마. 5년 전 해넣은 반틀니 때문에 약간은 새는 발음으로 엉덩이를 궁디 엉디 하면서도 꿋꿋하신 엄마,  그 모습 위로 정일근 시인의 시 한 편이 얹혀졌다.


   어머니는 그륵이라고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시‘어머니의 그륵’ )



   내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닐 게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온몸으로 매일 써오던 시. 정일근 시인의 다른 시에서는 ‘읽으면서 배부른’ 이라고 표현한다. 언제쯤 나는 말과 하나 되는 사랑을 빚어 뜨겁게 꿈틀대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어머니에게 겨울배추는 詩다

   중략

   나는 한 편의 시를 위해
   등 굽도록 헌신한 적 없었으니
   어머니가 온 몸으로 쓰신 저 푸른 시 앞에서
   뜨거워진다, 사람의 시를 이제 사람은 읽지 않지만
   자연의 시는 자연의 친구들이 읽고 가느니
   새벽마다 여치가 달려와서 읽고
   사마귀도 뒤따라와서 읽는다
   그 소식 듣고 밤새 기어온 민달팽이도 읽는
   읽으면서 배부른 어머니의 시
   시집 속에서  납작해져 죽은 시가 아닌
   살아서 배추벌레와 함께 사는
   살아서 숨을 쉬는 저 시                    (정일근 시, ‘어머니의 배추’ 에서)
  


   아침상을 물리고 일회용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주전자를 가스렌지에 올려놓자마자 부시럭 부시럭 냉장고  냉동칸에서 뭔가를 찾으시는 눈치다.  살포시 은밀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머금고는 흰 봉투 하나를 내미신다. 이게 뭐꼬, 하며 열였더니 풀입힌 듯 손이 베일 듯 빳빳한  만원권 지폐 50장이다.  아빠는 모르신다면서 언제든 딸이 오면 어미가 주는 용돈 쓰는 거 보고 싶어서 시장 가실 적마다 조금씩 덜어서 모아둔 거란다. 돌이켜 보면, 늘 가게에 매달려 있어야 했던 엄마에게 여느 아이들처럼  입시생 대접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 도시락 내가 싸고 동생 단도리 하는 것은 할당된  몫이었다. 너무 멀리 외동딸을 보내 놓고 엄마 가슴에는 잔돌무더기 쌓였던 게지. 이제는 맘놓고 시시콜콜 참견하실 수가 있는데, 시장통에서 삼천원 짜리 칼국수를 후루룩 후루룩 사이좋게 먹는 호사도 종종 누릴 수가 있을 텐데.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구나.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 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중략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뜷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신달자 시‘사모곡’ 에서)



   그후로 가끔 그릇을 깨트려 먹어도 전처럼 나를 쥐어박지는 않는다. 괘안타, 괘안타 하는 봄볕 담긴 어머니의 그륵이 있으니까. 섧은 일 있어도 크게 설워하지 않는다. 엄마, 어무이 하고 부르면 오야, 와 그라노 내 새끼 후다닥 달려 나오는 목소리, 아직은 들을 수 있으니까.

  

          

   *정일근 시인의 시 제목 ‘어머니의 그륵’을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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