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에게 말걸기

2009.11.03 05:32

성영라 조회 수:1320 추천:174

                                           대추에게 말걸기
  
                                                                                                                          성영라


   주말도 없이 일하는 남편이 오랜만에 늦잠 자는 월요일 아침이다. 더워서 간밤에 열어 둔 프렌치 도어 틈 사이로 초가을 햇살이 탱탱하다. 극세사 이불의 포근한 살갗이 좋아서 맘껏 게으르고 싶어진다. 이불깃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감는데 탁, 탁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시할까 하다가 그래도 뭔 일인가 하여, 발코니로 나가 본다. 어머님이 막대기로 살오른 가을대추 갉아먹는 다람쥐들 내쫒는 중이시다.

   어느 틈에 대추나무는 이토록이나 허리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맺었는가. 일명, 약대추로 불리는 왕구슬보다 작은 대추알이 탱글탱글 실하게도 보인다. 지난 해에는 올해 절반도 안 열렸는데 그마저도 새와 다람쥐의 공양미가 되었기에  푹 집어서 생강차나 삼계탕 끓이는데 넣곤 하던 넉넉함을 누릴 수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왔던 터였다. 자연의 변화나 결실을 알아채는 것은 역시나 같은 자연이 먼저인가.  

   생선 지꺼기, 과일 껍질 같은 것들을 흙속에 묻어주고, 물 주는 것 잊지 않았더니 –그것도 어머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한 적은 별로 없다- 성의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나무는 제 몸 속의 힘이란 힘을 다 흔들어 끌어올렸나 보다. 열매의 때깔이 곱고 탐스럽다. 신통방통 귀하기가 말할 수 없다. 여느 해 같았으면 다람쥐도 먹고 살아야지, 새들과 좀 나눠 먹지,  했을 것이다. 수확이 풍성한 올해에는 거꾸로 가는 마음이다. 대추 한 알이라도 지켜야 겠다는, 희한한 결의가 솟아나는 것이다. 힘들여 열매 맺은 대추나무가 측은하기까지 한 심사라니.

   이층에서 가지를 두드려 땅에 떨어트리면 밑에서 어머님은 주워 담으시고 박자를 맞추자니, 결혼식날 폐백드리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의 결실 많이 맺어라, 치마폭에 던져 주시던 대추. 올가을에 결혼으로 결실을 맺은 커플 생각이 난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사랑을 굳건히 지켜낸 그들이 저 대추나무처럼 사랑을 완성시켜 나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뭉클뭉클 솟구치는 것이다. 대추알을 쓰다듬는 손길이 살가워 진다.

   결혼식에서 40대 후반의 목사님은 결혼의 과정을 세 가지 링( ring)으로 비유했다. 첫째가 engagrment ring이요, 둘째가 wedding ring이며, suffering 이 그 세 번째다. 하객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세 번째 링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이 관건이다. 인터넷 검색창의 영어사전에는 suffering 이라는 단어를 고통, 괴로움, 고난, 고생 등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재미난 것이  맨 앞에 괄호를 만들어서 ‘불가산’ 이라고 덧붙인 것이다.

   세상만사 호락호락 만만한 것이 있나. 논리적인 계산법이 다 적용되는 것만도 아니다. 나에게도 아직 분명한 결실없이 마음 쏟아붓고 있는 일이 있다. 언제쯤 끝이 보일런지, 감사의 열매를 맺을 수는  있을런지, 끝없는 진행형이 될른지… 대추알 만지는 손에 힘이 간다.

  
                                                   2009.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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