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다
2013.04.14 02:02
안부를 묻다
성영라
오전 10시, 내 집 마당은 빛으로 흥건하다. 어레미로 쓰윽, 훑으면 강으로 가던 은어 몇 마리쯤 짐짓 잡혀주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을 한다. 바람이 레몬 나무 잎들 속에서 선잠이라도 들었는지 간혹 도리질을 한다. 벤자민 나무는 허물을 벗고 완벽하게 연두로 거듭난 듯하다. 이파리가 신생아의 살갗처럼 연하다. 마당 안의 자잘한 소요에 장단 맞추며 어슬렁거리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겠다.
요사이 동트면 출근하고 달 보며 퇴근하느라 심신이 칙칙했다. 두 팔을 벌리고 햇살을 사발때기로 들이키고 나니 알겠다. 천지가 와락 안겨오는 듯한 느낌이랄까. 벅차오름과 야릇한 슬픔까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행복이다.
복숭아 나무와 감나무 가지에 순이 돋기 시작했다. 오호, 가지의 끄트머리와 나머지 부분의 색이 확연히 다르다. 새순이 돋힌 가지끝은 반지르르한 적갈색인데 반해 줄기로 갈수록 튀튀하고 윤기없는 갈색이다. 땅 속에서 가장 먼 곳부터 살리는 나무의 속내라니!
나무는 뿌리만큼 자란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무의 진정한 성숙은 뿌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 뿌리가 땅 속으로 깊숙이 뻗어나가 탄탄해질수록 줄기와 가지도 풍성해질 것이다. 몇 번 화분갈이를 하면서 뿌리의 밀도가 상당히 높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내면은 보여지는 것 보다 더 치열하고 복잡하고 신비롭다.
패티오 오른쪽 모서리에 닿아있는 대추나무에게로 간다. 이제보니 햇빛이 젤로 성글게 다녀가는 땅이다. 그래도 이 마당 안에 있는 나무들 중 가장 큰 키로 지붕을 웃돈다. 이전 살던 집에 갓 사다 심은 어린 묘목을 이사하면서 옮겨 심은 것이다. 혹, 뿌리를 다치지는 않았을까, 잘 살아줄까, 마음 졸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서너 해 지나고부터 가을이면 꼬박꼬박 수확의 기쁨을 선물한다. 지난 여름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더위였다. 그 폭염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까, 안쓰러울 만큼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진득하게 버텨주지 않았나. 오질게 받아먹기만 했구나. 그다지 맘씨 좋은 아줌마는 아니었네. 부엌으로 뛰어가 사과껍질과 꺼피 찌꺼기 등을 담아왔다.
뿌리 가까운 땅에 삽을 푸욱 꽂고 한 쪽 발까지 이용해 힘껏 퍼올렸다. 흙 위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제법 통통하고 길쭘한 선홍색 지렁이 두 마리. 긴장했는지 구부린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하, 저들이 대추나무의 풍요로움을 일구는 일등 공신이었구나. 나도 움찔했지만 예전처럼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느닷없이 빛 속에 드러나버린 지렁이의 등이 시려울 것 같아 제자리로 옮겨 주었다. 나의 행복이 너에겐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걸. 부디, 흙도 살리고 나무도 숨 쉬게 하면서 소임을 다 해주시게.
그 덮혀진 흙 위로 지난 주의 한 장면이 내려앉는다. 순식간에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고 쾅쾅거리던 낮. 롱비치 제트로(JETRO)* 매장 안으로 바람에 떠밀리듯 뛰어들었던 머리 희끗한 사내들 몇. 등어리와 어깨 위에 폭우와 우박이 크리스탈 파편처럼 얹혀져 있는 것도 괘념치 않고 카트를 밀면서 필요한 물건 찾기에만 골몰하였지. 왜 지금 그들이 짠하게 스쳐가는 걸까.
상념을 떨쳐버리라는 듯 옴마야, 반대편 구석에 동백 한 무더기 붉은 확성기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있지 않은가. 화통하게 써내려간 그들의 봄편지를 읽으며 나도 화답한다. 그래, 피어나자, 함께. 모든 生은 이유가 있어. 거미는 허공에다 집을 짓고 지렁이는 훍 속에 길을 만든다. 폭포같은 햇살이 필요한 삶이 있고 은둔과 고독을 치열하게 사랑하며 사는 생명도 있어. 적어도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틈은 갖자고. 길을 내자고. 이 마당의 주인이란 명찰은 내려 놓을 거야. 상생하는 모든 그대들과 안부나 살갑게 나누며 그냥 살아내는 거야.
후두둑, 빗방울 떨어진다.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지붕에 장작 타는 소리 난다. 이런, 지렁이에게 안부부터 물어야겠군. 땅속 굴이 침수 될라. 바쁘다, 바빠.
*롱비치(Long Beach):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페드로만(灣)에 면한 항구도시
*제트로(JETRO): 미 전역에 형성된 현금으로만 거래하는 식품,식자재 도매 체인점
성영라
오전 10시, 내 집 마당은 빛으로 흥건하다. 어레미로 쓰윽, 훑으면 강으로 가던 은어 몇 마리쯤 짐짓 잡혀주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을 한다. 바람이 레몬 나무 잎들 속에서 선잠이라도 들었는지 간혹 도리질을 한다. 벤자민 나무는 허물을 벗고 완벽하게 연두로 거듭난 듯하다. 이파리가 신생아의 살갗처럼 연하다. 마당 안의 자잘한 소요에 장단 맞추며 어슬렁거리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겠다.
요사이 동트면 출근하고 달 보며 퇴근하느라 심신이 칙칙했다. 두 팔을 벌리고 햇살을 사발때기로 들이키고 나니 알겠다. 천지가 와락 안겨오는 듯한 느낌이랄까. 벅차오름과 야릇한 슬픔까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행복이다.
복숭아 나무와 감나무 가지에 순이 돋기 시작했다. 오호, 가지의 끄트머리와 나머지 부분의 색이 확연히 다르다. 새순이 돋힌 가지끝은 반지르르한 적갈색인데 반해 줄기로 갈수록 튀튀하고 윤기없는 갈색이다. 땅 속에서 가장 먼 곳부터 살리는 나무의 속내라니!
나무는 뿌리만큼 자란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무의 진정한 성숙은 뿌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 뿌리가 땅 속으로 깊숙이 뻗어나가 탄탄해질수록 줄기와 가지도 풍성해질 것이다. 몇 번 화분갈이를 하면서 뿌리의 밀도가 상당히 높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내면은 보여지는 것 보다 더 치열하고 복잡하고 신비롭다.
패티오 오른쪽 모서리에 닿아있는 대추나무에게로 간다. 이제보니 햇빛이 젤로 성글게 다녀가는 땅이다. 그래도 이 마당 안에 있는 나무들 중 가장 큰 키로 지붕을 웃돈다. 이전 살던 집에 갓 사다 심은 어린 묘목을 이사하면서 옮겨 심은 것이다. 혹, 뿌리를 다치지는 않았을까, 잘 살아줄까, 마음 졸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서너 해 지나고부터 가을이면 꼬박꼬박 수확의 기쁨을 선물한다. 지난 여름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더위였다. 그 폭염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까, 안쓰러울 만큼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진득하게 버텨주지 않았나. 오질게 받아먹기만 했구나. 그다지 맘씨 좋은 아줌마는 아니었네. 부엌으로 뛰어가 사과껍질과 꺼피 찌꺼기 등을 담아왔다.
뿌리 가까운 땅에 삽을 푸욱 꽂고 한 쪽 발까지 이용해 힘껏 퍼올렸다. 흙 위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제법 통통하고 길쭘한 선홍색 지렁이 두 마리. 긴장했는지 구부린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하, 저들이 대추나무의 풍요로움을 일구는 일등 공신이었구나. 나도 움찔했지만 예전처럼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느닷없이 빛 속에 드러나버린 지렁이의 등이 시려울 것 같아 제자리로 옮겨 주었다. 나의 행복이 너에겐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걸. 부디, 흙도 살리고 나무도 숨 쉬게 하면서 소임을 다 해주시게.
그 덮혀진 흙 위로 지난 주의 한 장면이 내려앉는다. 순식간에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고 쾅쾅거리던 낮. 롱비치 제트로(JETRO)* 매장 안으로 바람에 떠밀리듯 뛰어들었던 머리 희끗한 사내들 몇. 등어리와 어깨 위에 폭우와 우박이 크리스탈 파편처럼 얹혀져 있는 것도 괘념치 않고 카트를 밀면서 필요한 물건 찾기에만 골몰하였지. 왜 지금 그들이 짠하게 스쳐가는 걸까.
상념을 떨쳐버리라는 듯 옴마야, 반대편 구석에 동백 한 무더기 붉은 확성기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있지 않은가. 화통하게 써내려간 그들의 봄편지를 읽으며 나도 화답한다. 그래, 피어나자, 함께. 모든 生은 이유가 있어. 거미는 허공에다 집을 짓고 지렁이는 훍 속에 길을 만든다. 폭포같은 햇살이 필요한 삶이 있고 은둔과 고독을 치열하게 사랑하며 사는 생명도 있어. 적어도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틈은 갖자고. 길을 내자고. 이 마당의 주인이란 명찰은 내려 놓을 거야. 상생하는 모든 그대들과 안부나 살갑게 나누며 그냥 살아내는 거야.
후두둑, 빗방울 떨어진다.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지붕에 장작 타는 소리 난다. 이런, 지렁이에게 안부부터 물어야겠군. 땅속 굴이 침수 될라. 바쁘다, 바빠.
*롱비치(Long Beach):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페드로만(灣)에 면한 항구도시
*제트로(JETRO): 미 전역에 형성된 현금으로만 거래하는 식품,식자재 도매 체인점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6 | 꽃보다 언니 | 성영라 | 2024.09.13 | 63 |
25 | 뒷마당이 수상하다 | 성영라 | 2014.04.29 | 440 |
24 | 불치병 | 성영라 | 2013.10.30 | 378 |
23 | 팔월의 어느 날 | 성영라 | 2013.08.23 | 456 |
» | 안부를 묻다 | 성영라 | 2013.04.14 | 643 |
21 | 초승달 | 성영라 | 2011.12.01 | 671 |
20 | 대추에게 말걸기 | 성영라 | 2009.11.03 | 1320 |
19 | 어머니의 그륵*/시가 있는 수필 | 성영라 | 2009.10.05 | 2036 |
18 | 호박넝쿨 흐르다 | 성영라 | 2011.10.01 | 1058 |
17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성영라 | 2011.10.01 | 907 |
16 | 카이로의 밤 | 성영라 | 2008.03.13 | 1288 |
15 | 차마 못한 말 | 성영라 | 2008.01.21 | 1335 |
14 | 은행을 줍다 | 성영라 | 2008.01.21 | 1177 |
13 | 참외는 뜨고 싶다 | 성영라 | 2007.11.29 | 1337 |
12 | 따뜻한 한 끼의 밥상 | 성영라 | 2007.11.06 | 1369 |
11 | 세월- 비파주를 마시며 | 성영라 | 2007.08.21 | 1651 |
10 | 그늘 한 칸 | 성영라 | 2007.08.07 | 1089 |
9 | 사랑하려면 그들처럼 | 성영라 | 2007.05.11 | 866 |
8 | 여름밤의 단상 | 성영라 | 2007.06.12 | 1125 |
7 | 아버지의 편지 | 성영라 | 2007.06.05 | 9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