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연기라는 이름으로

2005.01.12 01:56

김재희 조회 수:85 추천:21

저녁연기라는 이름으로
김재희

  친구 집에 가면 욕심나는 그림이 있었다. 과수원 한편에 초가집 한 채가 있고 토방에 앉은뱅이 굴뚝이 있었다. 뽀얀 연기가 토방에 깔리며 마당으로 내려앉는 그림이었는데 그 그림이 욕심이 나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녀 집은 부자이니 어디서 더 좋은 그림이 생기면 그것은 나한테 주면 좋겠다고. 물론 그런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어느 땐가 그림은 벽에서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여운은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마을 어귀 공터에는 항상 동네 꼬마들이 모여 있었다. 고무줄 놀이, 패치기, 공기놀이 등 몇 명씩 조를 이루어 내기를 하곤 했다. 꼭 정해진 시간은 아니었지만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면 해가 설핏하도록 놀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때가 제일 재미가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순간이 늘 아쉬웠다. 그래도 치맛자락 질끈 동여맨 어머니가 저녁연기 자욱한 집을 배경으로 서서 나를 부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정겨웠다. 허겁지겁 뛰어와 마당에 들어서면 콧속을 자극하는 매캐한 연기 냄새와 구수한 밥 냄새가 좋아서 일부러 킁킁거리기도 했다.
  점점 자라면서는 놀기 좋은 저녁나절이건만 어머니를 도와 식사 준비하는 때가 많아졌다. 주로 불을 때는 일이었다. 놀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아궁이 앞에 앉아 타는 불을 바라보는 재미도 좋았다. 내 나이가 그때 어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불 때는 일을 즐겨했다. 나무에 따라 타는 모양과 불의 세기가 달랐고 그에 따라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의 모양과 냄새도 달랐다.
  콩대로 불을 땔 때는 고소한 냄새가 좋았다. 더러 덜 빠진 콩깍지 속에서 구워져 톡 튀어나오는 콩을 주워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검은 가마솥에 하얀 밥물이 넘치면 불때기를 멈추고 벌건 잉걸불을 바라보느라 그냥 아궁이 앞에 앉아 있곤 했다. 따로 뜸들일 불을 때지 않아도 그 은근한 불에 가마솥 밥이 자작자작 누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마당을 내다보면 마당에 깔리는 연기도 누룽지 누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솔가리가 타는 불줄기는 참으로 가지런하다. 긴 머리를 참빗으로 빚어 놓은 듯 아궁이 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휩쓸려 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언가에 빠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때는 사춘기였던가. 그렇듯 머뭇거림도 없이 죽죽 뻗어나갈 수 있는 젊음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나 했는지. 솔가리로 불을 때는 날의 연기는 곧고 곱게 올라갔다.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나 물을 데우기 위한 군불에는 주로 청솔 가지를 땠다. 타닥타닥 생가지가 타는 소리는 성깔이 있었다. 어떤 일에 맹렬히 거부하거나 거칠게 툭 튀어나오는 감정 같은 불꽃이었다. 마치지 못한 생을 원망이라도 하듯 굴뚝에서도 간간이 검은 연기를 울컥울컥 뱉어냈다.  
  풍로를 돌려가며 왕겨로 때는 불은 화산이 상상됐다.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어느 허점을 통해 불끈 솟아오를 것 같다고나 할까. 벌건 용암이 넘쳐 나와 모든 걸 다 덮쳐 버릴 것 같은 저력이 있었다. 그럴 땐 아마도 용암이 흘러내리듯이 뭉클뭉클한 연기가 굴뚝 아래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가랑잎만을 태우면 그 재는 잎 비슷하게 남으면서 사그라진다. 그 모양은 뜨거운 불 속인데도 이상하게 질펀한 뻘 밭이 연상된다. 밥 뜸들기를 기다리며 부지깽이로 그 재를 쑤석거려보면 뻘 속을 더듬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뻘 밭에서 발바닥으로 조개를 찾고 있는 느낌이다. 그 연기는 뻘 밭을 가만히 쓸어보는 조용한 파도 같았을까.

   저녁연기라는 아이디로 통신 세상에 입문하고부터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대신 저녁연기로 불러 주었다. 저녁연기 이름으로 내 글이 선보이게 되면 글과 아이디를 연결시켜 생각해 주었고 저녁연기 같은 사람으로 이미지를 연상했다. 정말로 저녁연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처럼 고즈넉한 글을 쓰고 싶었다. 늦게나마 글공부를 시작해서 등단을 했고 한국문인협회에 저녁연기라는 이름으로 등록도 되었다. 메일 아이디도 역시 저녁연기를 상징하는 evsmoke이다.  
  내 글이 시골집 굴뚝에서 피어나는 저녁연기 같은 글이기를 소망한다. 어머니 치맛자락 뒤에 엉켜 붙은 포근한 맛과 누룽지 누는 냄새가 섞인 고소한 연기 같은 글이면 좋겠다. 때론 가슴 깊이 잠재해 있던 울분을 토해 내기고 하겠고 누구를 의식하거나 머뭇거리지 않는 당당한 글이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저녁연기의 분위기를 품고 있었음 좋겠다. 혹은 용암 흐르듯 터져 나오는 감정 표현으로 다른 사람들이 대리 만족할 수 있는 후련한 글이거나 뻘 밭처럼 일상이 흐느적거리는 것만큼 처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엔 잔잔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가 담겨 있는 글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글이 저녁연기라는 이름으로 거듭나서 누군가의 마음에 긴 여운으로 남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