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게
2005.01.30 11:24
세월의 무게
행촌수필문학회 회원, 수필가 이명화
10월 중순부터 나는 이미지변신의 여왕이 되었다. 퇴원 후에도 남편의 건강이 고르지 못해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며칠을 고민 끝에 호남 최대의 혼수백화점이라는 곳에서 침구용품을 판매하게 되었다. 판매경험이 없었던지라 어설픈 손님맞이 솜씨는 마치 모국어를 터득하지 못한 2세들처럼 손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말문이 막히기 일쑤였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다못해 빨간 사과가 되기도 했다. 말문이 열린다해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이방인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하루하루 매출을 신장시켜야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먼지와의 전쟁으로 오후만 되면 눈물이 나고, 피부 트러블이 확산되어 결국 피부과 신세를 지게 되었다.
출근 첫날 새로운 환경에서 맛보게 될 불안과 두려움에 밤잠도 설치고, 삼십 분 일찍 출근했다. 타고난 친절을 밑바닥이 드러나도록 베풀며,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나면 어김없이 나는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하루종일 칼칼한 목을 냉수로 달랬다. 창고를 오르내리며 혹사를 당한 두 다리는 연체동물처럼 후들거렸다. 정장차림에 세련되지 않는 손님맞이 탓이었을까? 가끔 사장님이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해주었지만, 가격을 흥정할 때면 막무가내로 나의 본성을 유혹하였다. 손님이 찾는 물건을 빨리 골라주지 못해 애석할 때도 많았고, 한 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동동걸음을 쳐야하는 안타까움을 맛보았다. 퇴근길이면 피곤을 이기지 못해 단꿈에 빠진 나에게 내릴 승강장을 놓치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준비한 동전이 모자라 머쓱해 하는 나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위기를 모면케 해주었던 대중교통 운전자의 친절과 고마움도 느꼈다.
이렇듯 나의 하루는 어느새 꽃피고 새 울던 4월은 가고, 바람불고 눈 내리는 사계의 속성을 맛보게 했다. 가끔은 안절부절 하는 나를 지켜보던 주인도 내심 걱정이 앞섰나보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발바닥에 불이 난 듯 화끈거렸고, 경미한 통증까지 수반되어 따뜻한 물로 발목을 풀어주는 세족의례 또한 빠지지 않았다. 다행히 피부트러블은 경미한 상태였기에 사흘 분의 약을 먹고 말끔히 나았으나, 아침이면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밤사이 주문한 이불이 도착하면 수량을 헤아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그 이불을 이층 창고로 옮기는 일이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웠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애 마냥 뒤뚱거리는 거울 저편의 나를 바라보면 그만 이불더미에 눌려 압사할 것만 같았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다녀간 손님은 어느새 단골이 되었고, 언니가 보고싶어 자주 온다며, 당장에 필요하지도 않는 소품까지 충동구매를 한다고 했다. 한동안 분에 넘치는 칭찬에 감사를 해야할지 사양을 해야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퇴근길에 들렀다며 결혼을 앞둔 젊은 커플이 침대세트 구입 차 매장을 찾았다. 나의 곱고 부드러운 첫 인상에 반하여 구입결단을 내렸다한다. 예쁘게 말하는 비결을 알려달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면 자신이 꼭 닮고싶은 모습이라며 껴안고 익살스런 애교로 비행기를 태우는 이들도 있었다. 가격을 조금만 깎아 달라는 주문에는 난감할 때도 많았지만, 난 역시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미지가 타인에게 그만한 믿음을 주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다면 그것은 무한대의 재산이다. 표정에는 그 사람의 인생여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거울에 내 삶의 무게가 달려있다고 생각해 보라! 재산관리에 그만한 관심과 신경을 쓴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이다. 근무하는 동안만큼은 이불 집 사장이라는 마음으로 정열을 아끼지 않았는데, 기온이 내려가면서, 늘 그림자처럼 나를 괴롭혔던 목 디스크와 좌측 골반에 미세한 통증이 시작되고 말았다. 한동안 꿈꾸었던 파초의 꿈은 사라지고,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신체의 분수령을 발견했다. 삼일천하보다야 생명은 길었지만, 내 아르바이트의 생명은 겨우 한 달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으로 막을 내렸다. 요통을 견디지 못해 급히 찾은 신경외과 의사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최대의 치료약이라 했다.
체중이 무려 5천 그램이나 축났지만, 병원에 누워서도 나와 만났던 젊은 연인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그 순간이 즐거웠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주어진 에너지를 태웠다. 그러나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중년의 신체는 빛나는 월계관 대신에 허리디스크라는 훈장을 안겨주었다. 무너진 허리를 복구하느라 신경외과에서 20일째 물리치료를 받고있지만, 이제라도 나의 몸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체득하였으니 감사할 뿐이다.
젊은 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노년의 건강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관리와 예방을 철저히 해야한다는 사실과,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호신뢰가 바탕에 깔려야하듯이, 하나의 가치를 얻으려면 신중한 판단과 선택 그리고 절제의 미학도 필요하다. 어떠한 일을 계획하고 출발할 때에는 반드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몸을 통해 배웠다. 그러나 나에게 어제 같은 내일이 다시 온다해도 내일은 분명 신의 놀라운 은총이고 은밀한 선물이 될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만이 삭막한 대지에 기름진 언어를 심으리라. 현실의 무게에 눌려 지치고 힘들 때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라는 표현에 귀 기울이며, 각박해져 가는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언어와 아름다운 이미지 연출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2004년 12월4일)
행촌수필문학회 회원, 수필가 이명화
10월 중순부터 나는 이미지변신의 여왕이 되었다. 퇴원 후에도 남편의 건강이 고르지 못해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며칠을 고민 끝에 호남 최대의 혼수백화점이라는 곳에서 침구용품을 판매하게 되었다. 판매경험이 없었던지라 어설픈 손님맞이 솜씨는 마치 모국어를 터득하지 못한 2세들처럼 손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말문이 막히기 일쑤였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다못해 빨간 사과가 되기도 했다. 말문이 열린다해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이방인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하루하루 매출을 신장시켜야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먼지와의 전쟁으로 오후만 되면 눈물이 나고, 피부 트러블이 확산되어 결국 피부과 신세를 지게 되었다.
출근 첫날 새로운 환경에서 맛보게 될 불안과 두려움에 밤잠도 설치고, 삼십 분 일찍 출근했다. 타고난 친절을 밑바닥이 드러나도록 베풀며,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나면 어김없이 나는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하루종일 칼칼한 목을 냉수로 달랬다. 창고를 오르내리며 혹사를 당한 두 다리는 연체동물처럼 후들거렸다. 정장차림에 세련되지 않는 손님맞이 탓이었을까? 가끔 사장님이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해주었지만, 가격을 흥정할 때면 막무가내로 나의 본성을 유혹하였다. 손님이 찾는 물건을 빨리 골라주지 못해 애석할 때도 많았고, 한 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동동걸음을 쳐야하는 안타까움을 맛보았다. 퇴근길이면 피곤을 이기지 못해 단꿈에 빠진 나에게 내릴 승강장을 놓치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준비한 동전이 모자라 머쓱해 하는 나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위기를 모면케 해주었던 대중교통 운전자의 친절과 고마움도 느꼈다.
이렇듯 나의 하루는 어느새 꽃피고 새 울던 4월은 가고, 바람불고 눈 내리는 사계의 속성을 맛보게 했다. 가끔은 안절부절 하는 나를 지켜보던 주인도 내심 걱정이 앞섰나보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발바닥에 불이 난 듯 화끈거렸고, 경미한 통증까지 수반되어 따뜻한 물로 발목을 풀어주는 세족의례 또한 빠지지 않았다. 다행히 피부트러블은 경미한 상태였기에 사흘 분의 약을 먹고 말끔히 나았으나, 아침이면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밤사이 주문한 이불이 도착하면 수량을 헤아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그 이불을 이층 창고로 옮기는 일이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웠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애 마냥 뒤뚱거리는 거울 저편의 나를 바라보면 그만 이불더미에 눌려 압사할 것만 같았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다녀간 손님은 어느새 단골이 되었고, 언니가 보고싶어 자주 온다며, 당장에 필요하지도 않는 소품까지 충동구매를 한다고 했다. 한동안 분에 넘치는 칭찬에 감사를 해야할지 사양을 해야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퇴근길에 들렀다며 결혼을 앞둔 젊은 커플이 침대세트 구입 차 매장을 찾았다. 나의 곱고 부드러운 첫 인상에 반하여 구입결단을 내렸다한다. 예쁘게 말하는 비결을 알려달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면 자신이 꼭 닮고싶은 모습이라며 껴안고 익살스런 애교로 비행기를 태우는 이들도 있었다. 가격을 조금만 깎아 달라는 주문에는 난감할 때도 많았지만, 난 역시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미지가 타인에게 그만한 믿음을 주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다면 그것은 무한대의 재산이다. 표정에는 그 사람의 인생여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거울에 내 삶의 무게가 달려있다고 생각해 보라! 재산관리에 그만한 관심과 신경을 쓴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이다. 근무하는 동안만큼은 이불 집 사장이라는 마음으로 정열을 아끼지 않았는데, 기온이 내려가면서, 늘 그림자처럼 나를 괴롭혔던 목 디스크와 좌측 골반에 미세한 통증이 시작되고 말았다. 한동안 꿈꾸었던 파초의 꿈은 사라지고,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신체의 분수령을 발견했다. 삼일천하보다야 생명은 길었지만, 내 아르바이트의 생명은 겨우 한 달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으로 막을 내렸다. 요통을 견디지 못해 급히 찾은 신경외과 의사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최대의 치료약이라 했다.
체중이 무려 5천 그램이나 축났지만, 병원에 누워서도 나와 만났던 젊은 연인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그 순간이 즐거웠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주어진 에너지를 태웠다. 그러나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중년의 신체는 빛나는 월계관 대신에 허리디스크라는 훈장을 안겨주었다. 무너진 허리를 복구하느라 신경외과에서 20일째 물리치료를 받고있지만, 이제라도 나의 몸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체득하였으니 감사할 뿐이다.
젊은 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노년의 건강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관리와 예방을 철저히 해야한다는 사실과,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호신뢰가 바탕에 깔려야하듯이, 하나의 가치를 얻으려면 신중한 판단과 선택 그리고 절제의 미학도 필요하다. 어떠한 일을 계획하고 출발할 때에는 반드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몸을 통해 배웠다. 그러나 나에게 어제 같은 내일이 다시 온다해도 내일은 분명 신의 놀라운 은총이고 은밀한 선물이 될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만이 삭막한 대지에 기름진 언어를 심으리라. 현실의 무게에 눌려 지치고 힘들 때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라는 표현에 귀 기울이며, 각박해져 가는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언어와 아름다운 이미지 연출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2004년 12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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