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곡

2007.12.20 12:09

박은희 조회 수:729 추천:2

사모곡

                                                행촌수필문학회 박은희



어머니!
우리 집 화단에 국화꽃이 만발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어댔듯이, 선산머리 미루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들이 오늘따라 유난스레 울어대네요. 오늘이 아들 녀석 취업시험 합격자 발표하는 날인데…….

어머니, 12살에 외할머니를 여의고 세 자매가 외롭게 살아오신 탓인지 유달리 자식에 대한 정이 많으셨던 당신.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이면 천수경과 반야심경 염불소리에 하루를 열고 닫으시며, 자식을 위해 촛불을 밝히시던 불심이 강하셨던 어머니. 새벽 별을 보고 나가셨다 저녁달을 보며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셨던 사업가이자 여장부이셨던 어머니의 희생 덕으로 우리 6남매는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었지요.
겨울이면, 북풍 찬바람에 두 볼이 불그스레했고 항상 얼음이 박혀 있으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고, 어려운 친척들을 사랑과 도움으로 모두 감싸 안으시며. 어려운 사찰에 불사도 많이 하시어 불보살이라 불리셨던 어머니.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듯, 풍진의 세월 속에서 곡예를 하시며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

이 철부지 막내딸의 대책 없는 결혼으로 인해, 어머니 가슴을 많이 아프게 했지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던 딸이 아범의 제대로 인해, 13년 간 뚜렷한 직업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서 고초당초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를 하며 풀무질에 눈물콧물 짜내며 눈물을 훔쳐낼 때, 당신은 뒤돌아 서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곤 하셨지요.

토끼 같은 자식들을 위해 난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미용기술을 배워야 했고. 친정 부근에서 빈손 쥐고 사글세로 시작한 허름한 방 한 칸 딸린 미용실에서 비가 오는 날은 벽을 타고 흘러드는 빗물로 인해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었고, 잠을 자다가도 밤새워 수건으로 빗물을 닦아 짜내야 할 때는 나의 눈물도 함께 짜내야 했습니다. 방문도 없이 미용실과 커튼으로 막은 그 틈새로 연탄가스가 스며들어 가스 중독으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던 시절. 당신은 하루도 빠짐없이 못난 딸자식 걱정에 얼굴도장을 찍어야만 안심을 하셨지요.
늘 굶주리고 허덕이는 손자들과 딸자식을 위해 당신은 항상 먹을거리를 날라 주셨고, 허약한 딸의 보약을 해마다 지어주시며, 사골을 자주 사다 주셨지요. 퇴행성관절염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못난 딸자식을 위해 항상 김치도 담가주시고, 좋아하는 북어찜과 게장을 마련해주시던 솜씨 좋은 어머니의 그 손맛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남동생의 사업 부도로 인해, 친정의 살림이 명태 껍질 오그라들듯 오그라지고, 당신은 몇 년간, 그 빛 뒤처리를 하시다 결국엔 화병을 얻으셨지요. 곁에서 의지가 되었던 저마저도 남편의 교통사고로 뇌출혈 후유증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시골로 떠나야 했었고. 뒷전에서 고생할 저를 안타깝게 여겨 저 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는 어머니.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당신을 병원에서 뵈었을 때는, 저 역시 식중독으로 어머니와 한 병실에서 마지막 이별여행을 나누게 되었지요. 긴 병원 생활에 답답해하시는 당신을 휠체어에 태워 이쪽 병동과 저쪽 병동을 오가며 저와 마지막 이별 여행을 했던 일들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어머니, 화병으로 쓸개와 간장이 다 녹아내려 아무것도 못 드시던 당신이, 병실에서 부르시던 그 노래 소리가 아직도 제 귓전을 아프게 합니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이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펄펄 안나네……."
두 달간의 신고 끝에 마지막 혼불이 나갈 무렵, 이 막내딸의,
"엄마, 나 잘 사는 거 보고가!"
라며 울부짖던 나를 뿌리치고 당신은 홀연히 제 곁을 떠나고야 말았지요. 늘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왔던 이 철없는 자식의 기둥이 되고 늘 하늘처럼 의지가 되셨던 어머니. 당신이 가신 뒤에야 당신의 자리가 그렇게 큰 산인지를 알았고. 어미 잃은 아기 사슴처럼 당신을 마음에서 놓지 못해 여러 해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당신을 그리며 이렇게 눈물 젖은 한 맺힌 사모의 글을 올립니다.

어머니 가신 뒤에도 눈물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남편의 잘못된 빚 보증으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고, 이제는 창고로 쓰려던 선산머리 외딴 움막집에서 텃밭을 일구며 선산지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막내딸로 귀하게만 살았던 제가 이젠, 반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디스크협착증으로 가끔 병원신세를 지며 힘들지만 남편의 건강 때문에 텃밭에서 자라는 무공해 쌈 채소와 푸성귀, 고구마 농사도 지어서 가까운 인연들과도 나누어 먹는 작은 행복도 누린답니다. 얼마 전에도 병원에서 수술하자는 말을 무시하고, 두 달간 입원하여 물리치료로 조금 완화되었지만, 언제 또 통증이 올지…….

어머니가 먼길 여행 떠나신지 어느덧, 강산이 한 번 바뀌었습니다. 아버지는 큰오라버니와 함께 사시다 여든 일곱이란 나이 탓에 여기저기 삐그덕거리는 건강과 당뇨병. 그리고 약간의 치매 증상으로 인해 육남매 자손들의 정성으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에 있답니다. 며칠 전에도 아버지 이발을 해드리고 신선처럼 기르시던 긴 수염도 짧게 잘라드리고 면도도 해드리며 깨끗이 닦아 드리고 왔는데, 제가 아버지를 위해 뭔가 해드릴 수 있다는 게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어머니, 얼마 전에 남편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중풍으로 10년 동안 고생하시다 가신 시어머니와 비슷한 증상이고, 고혈압에 뇌경색이란 증상이 나타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하늘나라에서라도 도와주세요.

어느덧, 어머니가 젖먹이 우윳값을 대주시던 아들 녀석이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어려운 형편 탓에 아르바이트하며 3년 동안 취업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저 역시 어머니처럼 석탄 백탄 타들어 가듯 가슴 졸이며, 날마다 정한수를 떠올리고 자식을 위해 기도 드렸습니다. 이십 리 길 모악산 금산사까지 자전거로 달려가서 향을 사르고 촛불을 밝혔습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길도 매번 용기를 내어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저를 등에 업어 주셨기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머니, 기뻐하세요!"
당신이 거두어 주셨던 그 손자가. 요즈음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힘들다는 취업시험에 합격했답니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느니라!"
생전에 강조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기쁨을 당신에게 돌리며, 이젠 보약도 해드리고 사골도 고아드리고 싶은데…….
아, 어머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꿈에도 그리운 나의 어머니! 당신의 무덤 앞에 눈물 젖은 카네이션과 함께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