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문학
2007.12.25 09:31
<나의 삶, 나의 문학>
수필, 그 영원한 나의 동반자
* 三溪 김 학*
(crane43@hanmail.net)
1. 내 고향 삼계(三溪)는
여러 갈래의 예술 가운데서 내가 문학과 인연을 맺을 것이라고는 예전엔 미처 몰랐다. 또 내가 문학의 5대 장르 가운데서 유독 수필과 이렇게 깊은 인연을 맺으리라고는 아예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나와 아내의 만남 역시 그랬다. 총각시절 몇 번 연애를 하면서 나는 당연히 연애결혼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은 아내와 맞선 한 번 보고 결혼을 하였다. 그 역시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와 수필의 만남은 나와 아내의 만남과 너무도 유사하다.
나는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다. 인구 2천명도 되지 않은 조그만 시골 면인데 이곳에서 배출한 박사가 무려 160명이 넘는다. 박사의 숫자는 해마다 계속 불어난다. 내 고향 삼계는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박사고을이다. 내 고향 부모님들은 자신들은 못 입고 못 먹으며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자녀들을 가르쳐 박사로 키우는 데서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 그것은 연면히 이어져 온 내 고향의 오랜 전통이다. 마을끼리, 성씨끼리, 집안끼리 경쟁하다시피 자녀들을 박사로 키우려 노력한다.
나 역시 2남1녀 중 1남1녀가 지금 미국과 서울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그게 우리 집안과 내 고향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고, 고향에 대한 내 나름의 보답이라 여긴 까닭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도 자라서 박사가 되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타이르며 길렀다.
2. 척박한 나의 문학 환경
나는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문학을 하시는 선생님을 단 한 분도 만난 적이 없다. 옛날에는 문학하시는 선생님들이 그만큼 희소했었다. 그러니 국어교과서에 나온 문학작품들을 배우는 게 내 문학공부의 전부였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작품보다 더 자세한 문학이야기는 배울 기회도 없었다. 사실 1950년대는 너무 가난하여 육체적으로도 배가 고팠지만 읽을 책이 아주 귀해서 정신적으로도 배가 고팠던 시절이다. 가난한 시골이니 그 상황은 더 심했다. 나의 문학 환경은 너무 척박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주로 옮긴 나는 문학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시인인 고하 최승범 교수님 댁에 드나들면서부터 비롯된 일이다. 그때 고하 선생님 댁에는 고하 선생의 사촌동생이자 나의 내종사촌형인 ㅊ형이 하숙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자유롭게 그 집에 드나들 수 있었다. 셋방살이였지만 고하 선생님 댁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아주 많았다. 책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집이며 수필집, 소설집 등을 읽을 수 있었다. 고하 선생님 댁은 나를 위한 사립도서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처음 수필이랍시고 글을 써서 발표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인 1962년, 전북대학신문에 ‘아웃사이더의 사랑이야기’를 발표하였다. 그 신문에 내 수필이 게재되었던 그때의 그 기쁨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뒤 대학신문은 나에게 자주 작품발표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니 ‘전우신문’과 ‘월간 육군’이 또 나에게 작품발표무대가 되어 주었다. 제대한 뒤 방송국 프로듀서가 된 다음에는 전북일보가 나에게 자주 지면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글쓰기는 중단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3. 에세이 프로그램 ‘밤의 여로’와 전북수필문학회
서해방송 프로듀서였던 나는 1972년 10월부터 ‘밤의 여로’란 신설 프로그램을 맡았다. 매일 방송되는 15분짜리 에세이 프로그램이었다. 원고지 8매 정도의 짧은 수필에 감미로운 음악 3곡을 섞어서 방송하였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맡아서 2년 반 동안 수필가도 아닌 나는 매일 한 편의 수필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나에겐 수필창작의 지옥훈련 기간이었던 셈이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내일은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가에 관심을 쏟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술을 마시면서도 오로지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쓸까 하는 게 나의 관심사였다. 2년 반을 그렇게 보낸 뒤 나는 마침내 전북의 문인들 중에서 요일별로 필진을 정하여 원고를 청탁하였다. 드디어 나는 원고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다 필진을 전국으로 넓혀 나갔다. 대전의 김영배, 오승영, 청주의 이재인, 대구의 정재호 등이 필진으로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1978년 12월 전북에 사는 ‘밤의 여로’ 필진들이 모여 망년회를 가졌고, 그 자리에서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드디어 1979년 여름, 정덕룡, 김학, 정주환 세 사람이 주도하여 전영래, 김동필, 김희선, 송영상, 한대석을 발기인으로 선정하고 사리문다방에서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마침내 9월 8일 고려회관에서 전북수필문학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해 10월에 발간된 ‘전북수필 창간호’에는 25명의 회원들이 2편씩의 작품을 게재하였다. 그 전북수필이 어느새 2007년 말 현재 지령 65호까지 펴내게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전북의 수필가들이 마침내 마이홈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이나 컸겠는가.
시와 수필을 사랑했던 나는 ‘밤의 여로’를 맡게 되면서부터 시보다는 수필에 더 끌렸다.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여기저기서 수필을 공부할 수도 없었다.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 글쓰기 요령을 터득해야 했다. 1978년에 이미 방송수필집 ‘밤의 여로’를 출간했던 나는 1980년 월간문학 8월호에서 ‘전화번호’란 작품으로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조경희, 원형갑 선생이 심사를 맡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전북 최초로 중앙문단에 등단한 수필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뒤 전북의 수필가들은 우후죽순 격으로 중앙문단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나는 수필가이면서 문학행정가라고 자부한다. 전북수필문학회, 임실문인협회, 대표에세이문학회, 전북문인협회, 전북펜클럽 등 크고 작은 문학단체의 회장을 맡아 운영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맡았던 그 문학단체들을 활성화시키고자 내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 기억이 새롭다.
4. 수필과 나의 인연
내가 수필과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랜 세월 수필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이미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9권의 수필집과 <수필의 맛 수필의 멋>이란 수필평론집도 출간한 바 있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수필을 써온 셈이다. 내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한 것이다.
내가 수필과 더 가깝게 된 것은 2001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과정을 신설하여 강의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7년이 지난 지금은 4개 반에 80여 명의 수강생이 강의를 듣고 있으며 이미 3백여 명이 수료하였다. 그 중에서 80여 명이 등단하여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고, 13명이 수필집을 상재했으며, 3명이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하였고, 40여 명이 외부 현상공모에서 각종 상을 받았다. 지금 그 수강생들이 행촌수필문학회(杏邨隋筆文學會)란 동인회를 만들어 동인지 ‘행촌수필’을 12호까지 발간하였다. 1년에 두 권씩 어김없이 동인지를 펴내고 있다. 나는 그 수강생들에게 시범을 보여 주어야 하기에 더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5. 수필과 ‘나를 따르라 정신’
내가 ROTC장교로 임관하여 광주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 내 왼쪽 어깨에는 ‘나를 따르라’란 구호가 나붙어 있었다. 장교는 모름지기 사병들이 본받도록 매사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제대를 한 뒤에도 그 ‘나를 따르라 정신’을 버리지 않고 산다. 수필창작과정 문하생들에게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또 앞으로도 나는 그 정신을 꾸준히 이어갈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필의 소재들이 널려 있다.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모두 수필의 소재라니 오죽하겠는가? 어찌 소 오줌이나 말똥만 수필의 소재가 될 것인가?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참새 한 마리, 피라미 한 마리, 빗방울 하나까지도 좋은 수필의 소재가 될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나는 사람의 시‧청‧취‧미‧촉(視‧聽‧臭‧味‧觸)이란 오감(五感)이야말로 수필의 소재를 찾아내어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존재라고 여긴다. 조금만 애정을 갖고 관심을 기울이면 글감은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아무리 수필의 소재가 널려 있어도 그 소재를 끌어다 수필로 빚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6. 멀리 내다보는 수필의 앞날
수필은 아내보다 더 가까운 나의 평생동지요, 영원한 내 삶의 반려자라고 생각한다. 수필이 내 곁에 있는 한 나의 행복과 기쁨은 보장된다. 수필이 나와 함께 있는 한 나는 결코 외로울 수가 없다. 내가 많은 예술장르 가운데서 문학을 선택하고 그 문학 중에서도 수필을 치켜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축하의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나는 후배들에게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교훈을 전해주려고 노력한다. 미치지 않으면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가르침이 곧 불광불급이다. 미친 듯이 수필에 푹 빠져보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본심이다.
수필이 21세기에 모든 문학 장르를 아우를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수필인구가 급격히 불어난다고 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수필이 어느 날엔가는 온 문예를 흡수해버릴 것이라고 한 아나톨 프랑스의 부추김 때문만도 아니다. 수필이야말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아름답고 진솔하게 수놓을 수 있는 문학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수필을 사랑한 것이다. 수필이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 수필은 영원한 나의 동반자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우리 문단에서 수필이 제 자리를 확실히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머지않아 수필이 다른 문학 장르보다 더 우뚝 설 날이 반드시 오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드라마는 방송의 꽃이다. KBS가 1TV로 인기리에 방송했던 ‘겨울연가’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방송되며 한류열풍(韓流熱風)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대장금 등 많은 다른 드라마들 역시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드라마의 원고는 한글로 씌어진 글이지만 문학의 장르로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드라마원고는 문학의 6대 장르에도 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드라마작가들은 기가 죽기는커녕 대단한 사회적 파워를 갖고 있다. 드라마의 시장인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방송사들이 인기 드라마작가의 원고를 받으려고 눈치를 보면서 웃돈까지 얹어 주는 데 인색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그런 탓에 그 드라마작가들은 한국문인협회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한국방송작가협회를 만들어 그들끼리 똘똘 뭉쳐 활동을 한다. 인기 대하드라마 역시 상황은 똑 같다.
순수문학 쪽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들은 그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들 나름의 독자노선을 걷는다. 원고료 수입도 순수문학보다 훨씬 더 높다. 한마디로 그 드라마작가들은 잘 먹고 잘 산다.
그런데 드라마에 비하면 수필은 그래도 5대 문학 장르로서 인정을 받고 있지 않던가? 그러니 조금 더 느긋하게 참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수필의 시대가 활짝 열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말이다.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울 일이다. 머지않아 수필은 우리 문학의 동산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울 것이니 말이다.
*김 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수필집 9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펜문학상, 한국수필상, 동포문학상 본상, 신곡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예술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역임/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561-778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1가 한신휴플러스@102/102
(063)242-3388 HP:011-9641-3388
수필, 그 영원한 나의 동반자
* 三溪 김 학*
(crane43@hanmail.net)
1. 내 고향 삼계(三溪)는
여러 갈래의 예술 가운데서 내가 문학과 인연을 맺을 것이라고는 예전엔 미처 몰랐다. 또 내가 문학의 5대 장르 가운데서 유독 수필과 이렇게 깊은 인연을 맺으리라고는 아예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나와 아내의 만남 역시 그랬다. 총각시절 몇 번 연애를 하면서 나는 당연히 연애결혼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은 아내와 맞선 한 번 보고 결혼을 하였다. 그 역시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와 수필의 만남은 나와 아내의 만남과 너무도 유사하다.
나는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다. 인구 2천명도 되지 않은 조그만 시골 면인데 이곳에서 배출한 박사가 무려 160명이 넘는다. 박사의 숫자는 해마다 계속 불어난다. 내 고향 삼계는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박사고을이다. 내 고향 부모님들은 자신들은 못 입고 못 먹으며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자녀들을 가르쳐 박사로 키우는 데서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 그것은 연면히 이어져 온 내 고향의 오랜 전통이다. 마을끼리, 성씨끼리, 집안끼리 경쟁하다시피 자녀들을 박사로 키우려 노력한다.
나 역시 2남1녀 중 1남1녀가 지금 미국과 서울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그게 우리 집안과 내 고향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고, 고향에 대한 내 나름의 보답이라 여긴 까닭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도 자라서 박사가 되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타이르며 길렀다.
2. 척박한 나의 문학 환경
나는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문학을 하시는 선생님을 단 한 분도 만난 적이 없다. 옛날에는 문학하시는 선생님들이 그만큼 희소했었다. 그러니 국어교과서에 나온 문학작품들을 배우는 게 내 문학공부의 전부였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작품보다 더 자세한 문학이야기는 배울 기회도 없었다. 사실 1950년대는 너무 가난하여 육체적으로도 배가 고팠지만 읽을 책이 아주 귀해서 정신적으로도 배가 고팠던 시절이다. 가난한 시골이니 그 상황은 더 심했다. 나의 문학 환경은 너무 척박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주로 옮긴 나는 문학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시인인 고하 최승범 교수님 댁에 드나들면서부터 비롯된 일이다. 그때 고하 선생님 댁에는 고하 선생의 사촌동생이자 나의 내종사촌형인 ㅊ형이 하숙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자유롭게 그 집에 드나들 수 있었다. 셋방살이였지만 고하 선생님 댁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아주 많았다. 책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집이며 수필집, 소설집 등을 읽을 수 있었다. 고하 선생님 댁은 나를 위한 사립도서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처음 수필이랍시고 글을 써서 발표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인 1962년, 전북대학신문에 ‘아웃사이더의 사랑이야기’를 발표하였다. 그 신문에 내 수필이 게재되었던 그때의 그 기쁨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뒤 대학신문은 나에게 자주 작품발표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니 ‘전우신문’과 ‘월간 육군’이 또 나에게 작품발표무대가 되어 주었다. 제대한 뒤 방송국 프로듀서가 된 다음에는 전북일보가 나에게 자주 지면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글쓰기는 중단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3. 에세이 프로그램 ‘밤의 여로’와 전북수필문학회
서해방송 프로듀서였던 나는 1972년 10월부터 ‘밤의 여로’란 신설 프로그램을 맡았다. 매일 방송되는 15분짜리 에세이 프로그램이었다. 원고지 8매 정도의 짧은 수필에 감미로운 음악 3곡을 섞어서 방송하였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맡아서 2년 반 동안 수필가도 아닌 나는 매일 한 편의 수필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나에겐 수필창작의 지옥훈련 기간이었던 셈이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내일은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가에 관심을 쏟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술을 마시면서도 오로지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쓸까 하는 게 나의 관심사였다. 2년 반을 그렇게 보낸 뒤 나는 마침내 전북의 문인들 중에서 요일별로 필진을 정하여 원고를 청탁하였다. 드디어 나는 원고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다 필진을 전국으로 넓혀 나갔다. 대전의 김영배, 오승영, 청주의 이재인, 대구의 정재호 등이 필진으로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1978년 12월 전북에 사는 ‘밤의 여로’ 필진들이 모여 망년회를 가졌고, 그 자리에서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드디어 1979년 여름, 정덕룡, 김학, 정주환 세 사람이 주도하여 전영래, 김동필, 김희선, 송영상, 한대석을 발기인으로 선정하고 사리문다방에서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마침내 9월 8일 고려회관에서 전북수필문학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해 10월에 발간된 ‘전북수필 창간호’에는 25명의 회원들이 2편씩의 작품을 게재하였다. 그 전북수필이 어느새 2007년 말 현재 지령 65호까지 펴내게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전북의 수필가들이 마침내 마이홈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이나 컸겠는가.
시와 수필을 사랑했던 나는 ‘밤의 여로’를 맡게 되면서부터 시보다는 수필에 더 끌렸다.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여기저기서 수필을 공부할 수도 없었다.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 글쓰기 요령을 터득해야 했다. 1978년에 이미 방송수필집 ‘밤의 여로’를 출간했던 나는 1980년 월간문학 8월호에서 ‘전화번호’란 작품으로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조경희, 원형갑 선생이 심사를 맡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전북 최초로 중앙문단에 등단한 수필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뒤 전북의 수필가들은 우후죽순 격으로 중앙문단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나는 수필가이면서 문학행정가라고 자부한다. 전북수필문학회, 임실문인협회, 대표에세이문학회, 전북문인협회, 전북펜클럽 등 크고 작은 문학단체의 회장을 맡아 운영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맡았던 그 문학단체들을 활성화시키고자 내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 기억이 새롭다.
4. 수필과 나의 인연
내가 수필과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랜 세월 수필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이미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9권의 수필집과 <수필의 맛 수필의 멋>이란 수필평론집도 출간한 바 있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수필을 써온 셈이다. 내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한 것이다.
내가 수필과 더 가깝게 된 것은 2001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과정을 신설하여 강의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7년이 지난 지금은 4개 반에 80여 명의 수강생이 강의를 듣고 있으며 이미 3백여 명이 수료하였다. 그 중에서 80여 명이 등단하여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고, 13명이 수필집을 상재했으며, 3명이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하였고, 40여 명이 외부 현상공모에서 각종 상을 받았다. 지금 그 수강생들이 행촌수필문학회(杏邨隋筆文學會)란 동인회를 만들어 동인지 ‘행촌수필’을 12호까지 발간하였다. 1년에 두 권씩 어김없이 동인지를 펴내고 있다. 나는 그 수강생들에게 시범을 보여 주어야 하기에 더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5. 수필과 ‘나를 따르라 정신’
내가 ROTC장교로 임관하여 광주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 내 왼쪽 어깨에는 ‘나를 따르라’란 구호가 나붙어 있었다. 장교는 모름지기 사병들이 본받도록 매사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제대를 한 뒤에도 그 ‘나를 따르라 정신’을 버리지 않고 산다. 수필창작과정 문하생들에게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또 앞으로도 나는 그 정신을 꾸준히 이어갈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필의 소재들이 널려 있다.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모두 수필의 소재라니 오죽하겠는가? 어찌 소 오줌이나 말똥만 수필의 소재가 될 것인가?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참새 한 마리, 피라미 한 마리, 빗방울 하나까지도 좋은 수필의 소재가 될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나는 사람의 시‧청‧취‧미‧촉(視‧聽‧臭‧味‧觸)이란 오감(五感)이야말로 수필의 소재를 찾아내어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존재라고 여긴다. 조금만 애정을 갖고 관심을 기울이면 글감은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아무리 수필의 소재가 널려 있어도 그 소재를 끌어다 수필로 빚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6. 멀리 내다보는 수필의 앞날
수필은 아내보다 더 가까운 나의 평생동지요, 영원한 내 삶의 반려자라고 생각한다. 수필이 내 곁에 있는 한 나의 행복과 기쁨은 보장된다. 수필이 나와 함께 있는 한 나는 결코 외로울 수가 없다. 내가 많은 예술장르 가운데서 문학을 선택하고 그 문학 중에서도 수필을 치켜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축하의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나는 후배들에게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교훈을 전해주려고 노력한다. 미치지 않으면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가르침이 곧 불광불급이다. 미친 듯이 수필에 푹 빠져보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본심이다.
수필이 21세기에 모든 문학 장르를 아우를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수필인구가 급격히 불어난다고 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수필이 어느 날엔가는 온 문예를 흡수해버릴 것이라고 한 아나톨 프랑스의 부추김 때문만도 아니다. 수필이야말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아름답고 진솔하게 수놓을 수 있는 문학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수필을 사랑한 것이다. 수필이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 수필은 영원한 나의 동반자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우리 문단에서 수필이 제 자리를 확실히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머지않아 수필이 다른 문학 장르보다 더 우뚝 설 날이 반드시 오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드라마는 방송의 꽃이다. KBS가 1TV로 인기리에 방송했던 ‘겨울연가’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방송되며 한류열풍(韓流熱風)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대장금 등 많은 다른 드라마들 역시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드라마의 원고는 한글로 씌어진 글이지만 문학의 장르로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드라마원고는 문학의 6대 장르에도 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드라마작가들은 기가 죽기는커녕 대단한 사회적 파워를 갖고 있다. 드라마의 시장인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방송사들이 인기 드라마작가의 원고를 받으려고 눈치를 보면서 웃돈까지 얹어 주는 데 인색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그런 탓에 그 드라마작가들은 한국문인협회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한국방송작가협회를 만들어 그들끼리 똘똘 뭉쳐 활동을 한다. 인기 대하드라마 역시 상황은 똑 같다.
순수문학 쪽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들은 그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들 나름의 독자노선을 걷는다. 원고료 수입도 순수문학보다 훨씬 더 높다. 한마디로 그 드라마작가들은 잘 먹고 잘 산다.
그런데 드라마에 비하면 수필은 그래도 5대 문학 장르로서 인정을 받고 있지 않던가? 그러니 조금 더 느긋하게 참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수필의 시대가 활짝 열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말이다.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울 일이다. 머지않아 수필은 우리 문학의 동산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울 것이니 말이다.
*김 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수필집 9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펜문학상, 한국수필상, 동포문학상 본상, 신곡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예술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역임/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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