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소작쟁의

2008.07.14 09:57

정원정 조회 수:761 추천:10

암태도 소작쟁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어느 땐 지난날  읽었던 책을 문득 다시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암태도 소작쟁의’란 책이 그랬다. 오랫동안 내 서가 한 구석에 끼워져 있던 볼품없는 책이었다. 색 바랜 종이는 시험용지 같아서 책장을 넘기기조차 조심스러웠다. 문고판이나 다름없는 엷은 책이지만 버리지 않고 간수한 것을 보면 내용이 푸대접 받을 책은 아니었나 보다. 구입한 연도를 보니  1981년이다. 내 나이 60대였으니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겠는데 속속들이 읽은 기억은 암암하다.

1969년 신동아 제5회 논픽션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글쓴이는 소설가 조정래의 외삼촌 되는 박순동이다. 그는 연속 3회 논픽션으로 수상한 분이다. 활자가 어찌나 작은지 읽기가 마치 가풀막을 걷는 듯 팍팍했다. 할 수 없이 재판이 있을 듯도 싶어 전주교보문고에 알아봤더니 마침 서울의 광화문교보문고에 딱 한 권 남아 있단다. 주문을 해서 샀다. 2003년 인쇄된 것이어서 읽기에 수월했다.

1923년부터 다음 해 24년까지 1년 동안 전남 무안군(지금은 신안군) 암태도라는 작은 섬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지주의 부당한 수탈에 맞서 소작인들이 항거해서 성공을 이끌어낸 극적인 내용이다. 일본의 세도가 서슬 퍼렇던 1920년대에 전라도의 조그만 섬에서 힘없는 소작인들이 강자를 상대로 목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사건이다. 애당초, 지주들은 일제식민조직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소작인들이 대들어 봐야 승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우리나라 8할 이상이 농민이었던 그 때, 또 그 중의 8할이 소작 농민이었다.  소작인들은 한 해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서 지주에게 7할을 바치고 나면 일 년 먹을 식량이 모자랐다.  소작인들은 보릿고개를 넘길 무렵이면 굶기를 밥 먹 듯하며 부황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 대표적인 지주가 문재철이었다. 그는 한 해 거둬드리는 곡식이 3만 석이었다. 섬사람이 다 먹고도 남을 식량이 그 섬에서 생산되는데도 소작인들은 7할을 지주에게 바치고 나면 굶기 마련이었다.  ’이 설움 저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이라는데 오죽하면 소작인들이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소작회를 만들었겠는가. 소작료를 내려줄 것을 문재철에게 요구도 해보고 집단농성도 하면서 끈질기게 다투었지만 문재철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세살 먹은 아이도 제 손엣 것을 안 내놓는다는 속담처럼 이미 받아오던 소작료를 어찌 순순히 내려 주겠는가. 그 과정에서 사람도 다치고 경찰에 붙잡혀 입건되는 일도 빈번했다. 구속되는 사례가 생기고 문재철 측으로부터 회유당해 중간에 소작회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작인들은 포기할 법도 한데 갖은 고생을  감수했다. 끈질기게 1년을 버티며 기어이 소작료를 4할까지 내리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간부가 붙잡혀 가면 소작인들은 남녀가 배를 타고 목포경찰서까지 갔다. 마당에 누워 농성하며 여러 날 밤샘을 했다. 경찰들이 치를 떨 정도로 귀찮게 했다. 지도자와 함께 고락을 나누며 때로는 재판소마당에 모여 농성을 했다. 지금처럼 대명천지에도 결기를 못내는 일을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이뤄냈던 것이다.
  
그 사건에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서태석이란 지도자와 박봉영이라는 청년이다.  이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서태석은 다른 지역의 소작쟁의에도 간여했고 그 일 때문에 3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박봉영도 소작쟁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1년간 옥살이를 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투쟁한 분들이다. 박봉영은 뒤에 독립투쟁을 하며 암태남녀학원을 설립하였다. 현재의 암태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그때가 3.1운동 3년 뒤였다.
언론도 한몫을 했다. 동아일보는 수십 차례나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창간된 지 얼마 아니 되었을 때다. 여론은 바람을 타듯 퍼졌다. 서울에서는 암태도 소작인들의 딱한 사정을 접하고 동정하는 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모금까지 했다, 김병로 변호사 외 여러 변호사들은 자청해서 무료변론을 하려고도 했다. 사람은 눌리고 생존권이 박탈당하면 항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목적을 성공시키기란 쉽지 않다. 일본의 세력을 업은 상대에게 감히 대들 수 없는 그 시절, 암태도소작인들은 통쾌하게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1981년 송기숙은 이 사건의 줄거리로 ‘암태도‘란 소설을 썼다. 송기숙소설가는 이 사건에 관심이 끌려 소설로 형상화 했다고 했다. 그만큼 ’암태도 사건‘은 매력이 있었다. 끝으로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있다. 이 사건에서 지주 문재철은 강팔지고 부덕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뒤에 목포의 문태고등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을 폈다. 또 박봉영과 함께 독립자금도 냈다. 안 좋은 일에서는 대립했지만 좋은 일에서는 서로가 함께 손을 잡았다. 늦게나마  민족적 각성을 한 사람이었다. 박봉영은 그를 자랑스럽게 칭찬했다고 한다. 뒤에 역사학자들은 ‘암태도 소작쟁의‘를 순수민중운동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일본의 학대를 받던 그 시절, 힘없는 소작인들이  밀도 있게 자기들의 권익을 찾게 된 것은 함께 뭉친 조직된 힘이 있기에 가능 했으리라. 또 세상을 향해 눈을 뜬 지도자가 있었기에 성공한 사례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다시 되새겨 볼 일이다.

                                                      (2008.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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