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의 좋은 수필 쓰기
2008.11.05 06:04
<수필을 사랑하시는 회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김동찬의 좋은 수필 쓰기
박 영 보
내가 수필이라는 걸 써보겠다고 꽤나 많은 시간을 축내 온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학창시절 글쓰기에 보낸 시간을 빼고 미국생활을 하면서 글 쓰기에 보낸 시간만도 아마 짧아도 십 년은 넘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자신이 출판을 한 수필집이나 본국이나 미주지역에서 출판되고 있는 여러 문예지나 신문 또는 문인단체의 사이트에 올려진 글을 포함하여 내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편수만 해도 몇 백 편에 이른다. 그러나 스스로가 만족해 할만한 글을 꼽아 본다면 단 한편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이런 일에 쏟고 있는 시간이 아깝지도 않다. 사실 나에게는 업무 외에 남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일거리나 취미도 없다. 글쓰기가 나에게 남는 그 나마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심심풀이’라 해도 좋다. 아직까지도 육신과 정신이 멀쩡한 나이에 시간을 축내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않아 새벽 두 시도 좋고 세시가 되어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에게는 이것도 내가 하고 있는,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이런 일에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정년퇴직 같은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알량한 글이지만 전업작가의 흉내만이라도 낸다고 해서 누구 하나 탓할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심심해서~”. 언젠가 무슨 신문에서인가 잡지에서의 인터뷰에서 “왜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박완서 씨의 대답이었다. 딱, 나에게도 이런 질문이 온다면 이와 똑 같은 대답이 나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글을 내놓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분과 나의 ‘심심해서’를 비교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일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좋은 글(수필)을 쓰고 싶은 욕심은 그치지 않고 치솟고 있는데 따라 주지가 않는 게 사실이다. 이제는 글을 쓴다는 자체에 주눅이 들고 더구나 사람들 앞에 내놓는 일부터가 망설여지기도 한다. 좋은 수필을 쓰고 싶은 욕망에 미주 내에 초대되는 본국의 유명 수필가들의 세미나에는 만사를 제치고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수필도 아닐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곤 해 왔다. 열이면 열 거의가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아무런 새로울 것도 없이 교과서 적이다. 혹시 한국에 <수필 쓰는 법>에 대한 지침서 같은 것이 발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분들은 이를 텍스트북으로 삼아 이를 문학, 특히 수필에서의 <법전>이나 <성경말씀>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신봉하며 따르고 다른 지망생들에게까지 전하기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수필가들의 각각 다른 입으로 똑 같은 소리가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주지역에서도 <수필>이라면 한마디씩이라도 할 수 있는 분들도 수필에 대한 지식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국의 이런 수필 대가(?)들의 말과 그들의 이론을 반복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모임에 대한 관심과 흥미도 잃고 식상해 있어 내가 소속되어있는 단체에서의 정기 모임에 포함된 순서 외에는 이제 그런 류의 세미나만을 위한 모임에는 참석하지도 않게 된 것도 한참이 되었다.
2008년도 다 돼갈 무렵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까지 글 쓰기에 망설여지기만 했고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힘과 재 도전의 빌미를 제공해준 분이다. 소위 말하는 수필 대가들의 천편일률적인 수필 이론에 맞선 내용들이었다. 그분의 이론에 대한 한 대목 한 대목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라도 하고 싶었다. 재미수필문학가협회의 정기 월례모임에서 미주한국문인협회의 김동찬 회장의 특강이 두 달에 걸쳐 두 번의 강의가 있었다. 그분은 <강의>가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자세에서 나눔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강조를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강의 중에서도 강의였고 그것도 <명 강의>였다. 수필에 관한 한 붓을 꺾어버릴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던 나에게는 재 도전과 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는데 망설이거나 주눅이 들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 도전의 의욕까지도 생기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2008은 값진 수확의 해가 된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각각 다른 입에서 똑 같은 말로만 집약돼 <수필을 쓰는 원칙이나 공식>이기나 한 것 같던 수필 이론으로 인하여 주춤거려오던 나의 수필쓰기 방식이었다. 김회장은 나를 주춤거리게 했던 이런 문제점 하나하나를 맨투맨 식으로 지적이라도 해가며 부추기라도 하는 듯 했다. 내용들을 부분별로 되짚어 본다. 유명작가들의 원칙과 같던 수필이론으로 인한 나의 머뭇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던 대목들이다.
김동찬 회장의 말 중에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뜻의 내용도 있었다. 나에게는 수필이라는 데에 허구나 가식이 아닌 진솔함을 표현하자는 뜻일 것 같아 아무런 반론의 여지가 없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박수를 보내고 싶었던 다른 내용을 간추려보면;
길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말도 있어 나 같은 사람은 짧은 것은 고사하고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길이라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수필이 길면 독자들이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용이 있고 재미가 있으면 장편 열 권 이상으로 된 소설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날 때가지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느냐에 있을 것으로 본다.
대사 체:
내가 자주 쓰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용의 흐름상 꼭 들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사 체 몇 가닥만 들어가도 이것이 수필인지 소설인지를 놓고 트집을 잡기도 하는 경우를 보게 될 때가 있다. 금년 초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울지 않는 바이올린>이라는 수필집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35편의 수필 모두가 이런 대사 체의 수필이었다. 이런 투의 수필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감동과 흥미진진한 내용들의 글에 읽기 시작한 다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 한번도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왜 대사 체의 수필을 배제하려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
수필은 ‘내 이야기’에 관하여만 써야 한다는 말, 내 이야기의 한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회의를 가지고 왔었다. 내가 아닌 사물이나 어떤 상황 또는 추상적인 내용도 글의 주제/소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제 이의, 제 삼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글의 주제/소재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 글이고 수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신변잡기:
수필의 주제/소재가 내 주변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 들인 경우가 많다. 베스트 셀러 수필집의 작가들이 쓴 수필도 보면 모두가 작가의 생활 주변에서 보고 느낀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데 유명작가의 그런 수필은 베스트 셀러 수필이 되고 나 같은 사람의 수필은 신변잡기, 신변잡사에 불과한 것인가. 내용은 그저 그런 상업성 영화에 불과한데 유명 작가나 출연배우가 인기 배우이면 작품성에서는 별것도 아닌 영화라도 흥행에 성공하는 예와 비교를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도덕교과서:
나 자신도 이런 류의 글을 쓸 생각이나 자격도 없지만 많은 글들을 통해 읽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와 닿는 지적이었다. 그런 수필의 작가 자신이 마치 자기 혼자서 경지에 도달해 있고 세상을 일깨우기라도 하려는 듯한~. 글을 쓰고 있는 마음자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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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 (새로운 실험):
Creative non-fiction이라는 설명에 공감이 가고 새로운 시도, 새로운 실험에 대한 도전을 받는 부분이었다.
수필을 쓸 수 있는 사람:
수필은 꼭 수필가만 써야 하나에 대한 지적도 무언가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수필가라도 소설이나 시도 쓸 수 있는 것처럼 수필가가 아닌 시인이나 소설가,, 아니면 어느 누구라도 수필을 쓸 수 있다. 수필가라는 타이틀만으로 수필쓰기의 전매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이고 문학이라는 한 울타리에 공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시도, 시조도 쓰고 있으며 소설이나 아동문학에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도전도 해보고 싶은 것처럼~.
하여튼 이번 김동찬 회장의 수필특강은 나에게 큰 용기와 도전의 싹을 움트게 해 준 값진 내용들이었다. 차제에 김 회장이 본국의 문단에도 이러한 내용의 수필 이론을 발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긴다. 도전이나 반론제기의 차원에서라기 보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그런 틀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원칙이나 공식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은 본국의 일부 기성 수필 이론가(?)들에게 이런 측면에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라도.
김동찬의 좋은 수필 쓰기
박 영 보
내가 수필이라는 걸 써보겠다고 꽤나 많은 시간을 축내 온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학창시절 글쓰기에 보낸 시간을 빼고 미국생활을 하면서 글 쓰기에 보낸 시간만도 아마 짧아도 십 년은 넘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자신이 출판을 한 수필집이나 본국이나 미주지역에서 출판되고 있는 여러 문예지나 신문 또는 문인단체의 사이트에 올려진 글을 포함하여 내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편수만 해도 몇 백 편에 이른다. 그러나 스스로가 만족해 할만한 글을 꼽아 본다면 단 한편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이런 일에 쏟고 있는 시간이 아깝지도 않다. 사실 나에게는 업무 외에 남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일거리나 취미도 없다. 글쓰기가 나에게 남는 그 나마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심심풀이’라 해도 좋다. 아직까지도 육신과 정신이 멀쩡한 나이에 시간을 축내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않아 새벽 두 시도 좋고 세시가 되어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에게는 이것도 내가 하고 있는,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이런 일에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정년퇴직 같은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알량한 글이지만 전업작가의 흉내만이라도 낸다고 해서 누구 하나 탓할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심심해서~”. 언젠가 무슨 신문에서인가 잡지에서의 인터뷰에서 “왜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박완서 씨의 대답이었다. 딱, 나에게도 이런 질문이 온다면 이와 똑 같은 대답이 나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글을 내놓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분과 나의 ‘심심해서’를 비교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일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좋은 글(수필)을 쓰고 싶은 욕심은 그치지 않고 치솟고 있는데 따라 주지가 않는 게 사실이다. 이제는 글을 쓴다는 자체에 주눅이 들고 더구나 사람들 앞에 내놓는 일부터가 망설여지기도 한다. 좋은 수필을 쓰고 싶은 욕망에 미주 내에 초대되는 본국의 유명 수필가들의 세미나에는 만사를 제치고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수필도 아닐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곤 해 왔다. 열이면 열 거의가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아무런 새로울 것도 없이 교과서 적이다. 혹시 한국에 <수필 쓰는 법>에 대한 지침서 같은 것이 발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분들은 이를 텍스트북으로 삼아 이를 문학, 특히 수필에서의 <법전>이나 <성경말씀>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신봉하며 따르고 다른 지망생들에게까지 전하기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수필가들의 각각 다른 입으로 똑 같은 소리가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주지역에서도 <수필>이라면 한마디씩이라도 할 수 있는 분들도 수필에 대한 지식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국의 이런 수필 대가(?)들의 말과 그들의 이론을 반복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모임에 대한 관심과 흥미도 잃고 식상해 있어 내가 소속되어있는 단체에서의 정기 모임에 포함된 순서 외에는 이제 그런 류의 세미나만을 위한 모임에는 참석하지도 않게 된 것도 한참이 되었다.
2008년도 다 돼갈 무렵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까지 글 쓰기에 망설여지기만 했고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힘과 재 도전의 빌미를 제공해준 분이다. 소위 말하는 수필 대가들의 천편일률적인 수필 이론에 맞선 내용들이었다. 그분의 이론에 대한 한 대목 한 대목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라도 하고 싶었다. 재미수필문학가협회의 정기 월례모임에서 미주한국문인협회의 김동찬 회장의 특강이 두 달에 걸쳐 두 번의 강의가 있었다. 그분은 <강의>가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자세에서 나눔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강조를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강의 중에서도 강의였고 그것도 <명 강의>였다. 수필에 관한 한 붓을 꺾어버릴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던 나에게는 재 도전과 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는데 망설이거나 주눅이 들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 도전의 의욕까지도 생기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2008은 값진 수확의 해가 된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각각 다른 입에서 똑 같은 말로만 집약돼 <수필을 쓰는 원칙이나 공식>이기나 한 것 같던 수필 이론으로 인하여 주춤거려오던 나의 수필쓰기 방식이었다. 김회장은 나를 주춤거리게 했던 이런 문제점 하나하나를 맨투맨 식으로 지적이라도 해가며 부추기라도 하는 듯 했다. 내용들을 부분별로 되짚어 본다. 유명작가들의 원칙과 같던 수필이론으로 인한 나의 머뭇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던 대목들이다.
김동찬 회장의 말 중에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뜻의 내용도 있었다. 나에게는 수필이라는 데에 허구나 가식이 아닌 진솔함을 표현하자는 뜻일 것 같아 아무런 반론의 여지가 없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박수를 보내고 싶었던 다른 내용을 간추려보면;
길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말도 있어 나 같은 사람은 짧은 것은 고사하고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길이라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수필이 길면 독자들이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용이 있고 재미가 있으면 장편 열 권 이상으로 된 소설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날 때가지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느냐에 있을 것으로 본다.
대사 체:
내가 자주 쓰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용의 흐름상 꼭 들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사 체 몇 가닥만 들어가도 이것이 수필인지 소설인지를 놓고 트집을 잡기도 하는 경우를 보게 될 때가 있다. 금년 초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울지 않는 바이올린>이라는 수필집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35편의 수필 모두가 이런 대사 체의 수필이었다. 이런 투의 수필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감동과 흥미진진한 내용들의 글에 읽기 시작한 다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 한번도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왜 대사 체의 수필을 배제하려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
수필은 ‘내 이야기’에 관하여만 써야 한다는 말, 내 이야기의 한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회의를 가지고 왔었다. 내가 아닌 사물이나 어떤 상황 또는 추상적인 내용도 글의 주제/소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제 이의, 제 삼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글의 주제/소재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 글이고 수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신변잡기:
수필의 주제/소재가 내 주변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 들인 경우가 많다. 베스트 셀러 수필집의 작가들이 쓴 수필도 보면 모두가 작가의 생활 주변에서 보고 느낀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데 유명작가의 그런 수필은 베스트 셀러 수필이 되고 나 같은 사람의 수필은 신변잡기, 신변잡사에 불과한 것인가. 내용은 그저 그런 상업성 영화에 불과한데 유명 작가나 출연배우가 인기 배우이면 작품성에서는 별것도 아닌 영화라도 흥행에 성공하는 예와 비교를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도덕교과서:
나 자신도 이런 류의 글을 쓸 생각이나 자격도 없지만 많은 글들을 통해 읽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와 닿는 지적이었다. 그런 수필의 작가 자신이 마치 자기 혼자서 경지에 도달해 있고 세상을 일깨우기라도 하려는 듯한~. 글을 쓰고 있는 마음자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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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 (새로운 실험):
Creative non-fiction이라는 설명에 공감이 가고 새로운 시도, 새로운 실험에 대한 도전을 받는 부분이었다.
수필을 쓸 수 있는 사람:
수필은 꼭 수필가만 써야 하나에 대한 지적도 무언가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수필가라도 소설이나 시도 쓸 수 있는 것처럼 수필가가 아닌 시인이나 소설가,, 아니면 어느 누구라도 수필을 쓸 수 있다. 수필가라는 타이틀만으로 수필쓰기의 전매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이고 문학이라는 한 울타리에 공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시도, 시조도 쓰고 있으며 소설이나 아동문학에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도전도 해보고 싶은 것처럼~.
하여튼 이번 김동찬 회장의 수필특강은 나에게 큰 용기와 도전의 싹을 움트게 해 준 값진 내용들이었다. 차제에 김 회장이 본국의 문단에도 이러한 내용의 수필 이론을 발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생긴다. 도전이나 반론제기의 차원에서라기 보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그런 틀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원칙이나 공식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은 본국의 일부 기성 수필 이론가(?)들에게 이런 측면에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