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 다리
2009.02.04 07:34
섶 다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기춘
나는 요즘 산책코스를 정할 때마다 여러 번 망설인다. 평소 산책코스는 진북교 주변 하천에서 출발하여 주로 화산공원 아니면 매곡교 부근 아침시장을 둘러보았는데, 서신동 e편한 세상 아파트와 하가택지개발지구 사이 하천 둔치에 섶다리가 놓인 뒤부터는 어느 쪽으로 갈까 한참 망설일 때가 많다.
매곡교 주변 아침시장에 가면 우리 고향 농촌의 옛날 60~70년대 시골장터마냥 정겹고 볼거리도 많을 뿐더러 농민들의 애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또 농촌에서 재배하여 직접 가지고 나온 싱싱한 찬거리들을 싼값에 살 수도 있어 좋지만 섶 다리에 가면 섶 다리 또한 어린 시절 섶 다리를 건너 학교에 다니던 추억들이 되살아나 고향하천을 거니는 느낌이다.
전주천 섶 다리는 전주섶다리추진위원회와 e편한 세상 아파트 주민들이 힘을 모아 놓았다. 어디에서 다리발을 베어왔는지 여울목 섶 다리라는 현판이 걸린 다리발은 항상 봐도 구부정하게 버티고 선 모양새는 마음씨 좋은 농촌의 영감님처럼 순박하게 생겨서 퍽 친근하게 느껴진다.
내 고향 임실군 운암은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줄기가 관촌면과 신평면을 거쳐 광석, 학암, 선거, 월면, 지천, 입석리에 이르고 신덕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쌍암, 기암, 사양리를 거쳐 흐르다가 운암면 소재지인 입석리에서 합수되어 큰 강을 이루니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민물고기들도 많다. 물 반, 고기 반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다. 섬진댐 축조로 수몰되기 전에는 기름진 옥토가 많아 인심도 넉넉하고 인재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큰 강줄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다 보니 마을마다 섶 다리나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섶 다리는 규모가 커서 대부분 마을 공동으로 놓았지만 징검다리는 큰비에 떠내려간 뒤나 추석 또는 정월 대보름 등 명절을 앞두고 남몰래 밤에 고치거나 놓았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염재마을 정자나무거리에 놓인 징검다리는 규모가 크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곳의 징검다리는 비가 내려 떠내려가면 고치는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다리를 도맡아 놓거나 고치는 어른은 아들딸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는 집에는 삼신할머니가 아들 하나 점지해주었으면 하고 염원해도 아기가 생기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선행 중에서도 다리를 놓거나 고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지라 큰 공덕이 된다. 죽어서 삼도천을 건널 때 도움이 된다고도 하는데, 아마 그 어른은 돌아가신 뒤 천당이나 극락에 가셨을 것이다.
초등학교로 가려면 사양리 앞의 큰 냇물을 건너야 했는데 이곳의 섶 다리는 규모가 커서 섶 다리를 놓는데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요즘은 장비가 좋아 섶 다리를 놓는데 별로 힘이 들지 않지만 장비가 없던 옛날에는 주민들이 며칠씩 참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놓은 다리인지라 넓고 튼튼하게 놓았다. 그러나 섶 다리는 아무리 규모가 크고 튼튼하게 놓아도 여름철 큰 홍수가 지나가면 떠내려가 버린다. 그래서 여름에 비가 내리면 우리들은 섶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었다. 그러나 섶 다리는 어느 해나 여름을 견딘 적이 없었다. 섶 다리가 떠내려간 뒤부터는 여름 내내 아침저녁 학교를 오갈 때면 물을 건너서 다녔다. 물을 건너다 고무신을 떠내려 보내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있었고, 발에 무좀이 번져 고생을 많이 했었다.
섶 다리를 사진이나 영화에서만 본 요즘사람들은 옛날의 풍경정도로 생각하지만 옛날 강이나 하천에 교량이 없어 섶 다리로 건너던 시절에는 섶 다리의 역할이 막중했었다. 섶 다리가 없으면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강물을 건너던 정경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그래서 추석이 가까워지면 어른들이 합심하여 또 다리를 놓았다. 그 시절에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모르게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협동심도 높았었다. 이러한 미풍양속은 두고두고 우리 후손들이 계승해야할 미덕임에도 개인적으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지만 협동심이 실종된 것 같아 아쉽다.
그러나 서로 돕고 협동하는 정신은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온 뿌리가 있어 위정자들이 잘하면 크게 발휘되어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새마을사업과 금모으기운동, 월드컵 때의 응원은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협동심의 발로였다. 위정자들은 국민들의 저변에 서려있는 서로 도와가며 섶 다리를 놓던 우리의 협동정신을 이끌어내어 나라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기춘
나는 요즘 산책코스를 정할 때마다 여러 번 망설인다. 평소 산책코스는 진북교 주변 하천에서 출발하여 주로 화산공원 아니면 매곡교 부근 아침시장을 둘러보았는데, 서신동 e편한 세상 아파트와 하가택지개발지구 사이 하천 둔치에 섶다리가 놓인 뒤부터는 어느 쪽으로 갈까 한참 망설일 때가 많다.
매곡교 주변 아침시장에 가면 우리 고향 농촌의 옛날 60~70년대 시골장터마냥 정겹고 볼거리도 많을 뿐더러 농민들의 애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또 농촌에서 재배하여 직접 가지고 나온 싱싱한 찬거리들을 싼값에 살 수도 있어 좋지만 섶 다리에 가면 섶 다리 또한 어린 시절 섶 다리를 건너 학교에 다니던 추억들이 되살아나 고향하천을 거니는 느낌이다.
전주천 섶 다리는 전주섶다리추진위원회와 e편한 세상 아파트 주민들이 힘을 모아 놓았다. 어디에서 다리발을 베어왔는지 여울목 섶 다리라는 현판이 걸린 다리발은 항상 봐도 구부정하게 버티고 선 모양새는 마음씨 좋은 농촌의 영감님처럼 순박하게 생겨서 퍽 친근하게 느껴진다.
내 고향 임실군 운암은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줄기가 관촌면과 신평면을 거쳐 광석, 학암, 선거, 월면, 지천, 입석리에 이르고 신덕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쌍암, 기암, 사양리를 거쳐 흐르다가 운암면 소재지인 입석리에서 합수되어 큰 강을 이루니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민물고기들도 많다. 물 반, 고기 반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다. 섬진댐 축조로 수몰되기 전에는 기름진 옥토가 많아 인심도 넉넉하고 인재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큰 강줄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다 보니 마을마다 섶 다리나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섶 다리는 규모가 커서 대부분 마을 공동으로 놓았지만 징검다리는 큰비에 떠내려간 뒤나 추석 또는 정월 대보름 등 명절을 앞두고 남몰래 밤에 고치거나 놓았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염재마을 정자나무거리에 놓인 징검다리는 규모가 크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곳의 징검다리는 비가 내려 떠내려가면 고치는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다리를 도맡아 놓거나 고치는 어른은 아들딸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는 집에는 삼신할머니가 아들 하나 점지해주었으면 하고 염원해도 아기가 생기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선행 중에서도 다리를 놓거나 고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지라 큰 공덕이 된다. 죽어서 삼도천을 건널 때 도움이 된다고도 하는데, 아마 그 어른은 돌아가신 뒤 천당이나 극락에 가셨을 것이다.
초등학교로 가려면 사양리 앞의 큰 냇물을 건너야 했는데 이곳의 섶 다리는 규모가 커서 섶 다리를 놓는데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요즘은 장비가 좋아 섶 다리를 놓는데 별로 힘이 들지 않지만 장비가 없던 옛날에는 주민들이 며칠씩 참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놓은 다리인지라 넓고 튼튼하게 놓았다. 그러나 섶 다리는 아무리 규모가 크고 튼튼하게 놓아도 여름철 큰 홍수가 지나가면 떠내려가 버린다. 그래서 여름에 비가 내리면 우리들은 섶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었다. 그러나 섶 다리는 어느 해나 여름을 견딘 적이 없었다. 섶 다리가 떠내려간 뒤부터는 여름 내내 아침저녁 학교를 오갈 때면 물을 건너서 다녔다. 물을 건너다 고무신을 떠내려 보내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있었고, 발에 무좀이 번져 고생을 많이 했었다.
섶 다리를 사진이나 영화에서만 본 요즘사람들은 옛날의 풍경정도로 생각하지만 옛날 강이나 하천에 교량이 없어 섶 다리로 건너던 시절에는 섶 다리의 역할이 막중했었다. 섶 다리가 없으면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강물을 건너던 정경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그래서 추석이 가까워지면 어른들이 합심하여 또 다리를 놓았다. 그 시절에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모르게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협동심도 높았었다. 이러한 미풍양속은 두고두고 우리 후손들이 계승해야할 미덕임에도 개인적으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지만 협동심이 실종된 것 같아 아쉽다.
그러나 서로 돕고 협동하는 정신은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온 뿌리가 있어 위정자들이 잘하면 크게 발휘되어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새마을사업과 금모으기운동, 월드컵 때의 응원은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협동심의 발로였다. 위정자들은 국민들의 저변에 서려있는 서로 도와가며 섶 다리를 놓던 우리의 협동정신을 이끌어내어 나라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