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로 만든 텐트, 혹은 맥주 한 잔/이승훈

2004.12.11 18:46

김정숙 조회 수:652 추천:26















 

시는 언어로 만든 텐트, 혹은 맥주 한 잔

― 이승훈(시인·한양대 교수)과의 만남 ―
 

대담 / 이홍섭
(시인·본지 편집위원)
 

시인 이승훈은 얼마 전 독특한 불교적 사유가 담긴 시집 《인생》을 펴냈고, 시선집 《아름다운 A》를 출간했다. 시와 이론을 통해 늘 시단의 전위에 서온 그의 최근 시적 모색과 사유가 궁금해 초대석으로 모셨다. - 편집자 주


- 최근에 나온 시선집 《아름다운 A》의 서문에서 시를 ‘언어로 만든 텐트’라고 표현하셨고, 자신의 글쓰기를 ‘결여적 글쓰기’라고 하셨는데요.


텐트는 정착할 곳이 없는 유목민의 삶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시쓰기라는 것도 목적이 없고, 그날의 삶을 적고 나면 그 다음날 떠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무주(無住)사상과 같은 것이지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삶 말입니다. 삶 자체도 사실은 허망한 것이지요. 무엇을 남긴다는 것도 집착일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빌딩을 짓는 것도 허망한 일입니다. 불교의 무주사상은 뭐라 할까, 허무와 쾌락을 넘어서는 더 큰 허무를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결여적 글쓰기는 결국 욕망의 문제이겠지요. 사실 태어남 자체가 결핍이자, 결여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것 자체가 결여니까요. 결과적으로 시쓰기는 끝이 없는 것이지요.


- 《인생》에는 앞서 말씀하신 불교적 사유가 곳곳에 배어 있는데요. 의외라고 여기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불교와 만나게 된 것은 6, 7년 전 독실한 불자였던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49재 때 절에서 나눠준 노란표지의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3장에 나오는 “보살은 아상(我相)을 버리고, 인상(人相)을 버리고, 중생상(衆生相)을 버리고, 수자상(壽者相)을 버려라.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다.”라는 구절에서 ‘아, 이거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을 쓸 때에도 이 《금강경》이 제일 좋았습니다.


- 그 동안 서구의 문학이론을 받아들이고, 체계화하는 데 앞장서오셨는데 이러한 불교적 사유와 충돌은 없으셨는지요.


그 동안 제 시는 물론이고, 서구의 이론 역시 자아탐구에서 시작되어 주체는 소멸했다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이 주체를 문제 삼고 있지요. 《금강경》은 ‘나라는 것은 상이 아닌가, 나라는 생각 자체를 버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해체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불교의 ‘무아사상’과 후기 구조주의에서의 ‘주체’의 문제를 다룬 책이 나올 것입니다. 원고를 넘겼어요.


- 제 개인적으로는 《인생》에 실린 작품들이 이전 작품들보다 쉽고 편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교를 너무 늦게 만났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삼십 년 전에 만났으면 사유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의 시는 상처투성이고, 피 흘리는 작업이었습니다. 이제는 진창에서 연꽃 피는 것과 같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요즘은 시가 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결국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천상병 시에 관심 없었는데, 요즘에는 눈에 띄는 작품들이 생겨났습니다. 〈나무〉라는 시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했는데 자신은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았고, 나는 또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단순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작품이지요.


- 리듬에 대한 배려도 훨씬 많아진 것 같습니다.


시에서 리듬은 참 중요합니다. 요즘 시들은 메시지, 의미가 승합니다. 그러나 시에서 리듬은 ‘삶의 숨결’과 같은 것입니다. 리듬이 주는 울림이 많은 의미를 거느립니다. 저는 리듬이 오지 않으면 시를 쓰지 못합니다. 스승이었던 박목월 선생도 그랬지요.


- 외람되지만, 《인생》에 실려 있는 작품들이 권투에서의 잽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불교적 잽이라고나 할까요.


파편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엄적으로 얘기하면 다즉일(多卽一)의 세계이겠지요. 파편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고나 할까요. 이는 저의 시 쓰는 체질과 가깝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각종 심사에서 늘 실험시를 옹호해 오셨습니다. 최근 한 월간지에 발표한 글에서도 이를 강조하셨는데요.


저는 젊은 시인의 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실험의식이 있어야 자신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최근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은 천편일률적입니다. 자연도 좋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문제입니다. 문화는 다양해야 하는데, 우리 문화는 좀 단순한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것은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입니다. 제가 실험시를 쓰는 시인들을 적극 옹호하는 것은 이들의 외로운 싸움을 격려해 주는 시인이나 비평가가 너무 적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문학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고 문학사라는 게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시사(詩史)에 좋은 의미의 계보가 형성되고, 이 계보 속에서 선배를 죽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문학사 위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 시와 이론을 함께 해오셨는데요. 갈등은 없으셨는지요.


이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저의 체질이기도 합니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시를 쓰는 과정에서는 영향을 안줍니다. 무의식의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술은 이론이 없어야 됩니다. 이론은 해석일 뿐입니다. 시는 늘 새로워야 합니다. 시는 이론보다 직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시인은 이론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부처님도 내 말, 내 설법에 개의치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부하는 것도 재미는 있습니다. 새로운 사유가 주는 즐거움이 있죠. 새롭게 볼 수 있는 창조적 사유가 필요합니다.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이 그렇죠. 선적인 상상력은 전위예술가들의 그것과 닿아 있습니다. 김수영에게도 그런 것이 있어요. 〈등나무〉란 작품을 보면 도대체 이게 뭔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 선적인 감각으로 풀면 해석이 됩니다. 제가 글로도 썼습니다.


- 독특하고 새로운 해석이라 생각됩니다.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는 시인을 들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김춘수 선생은 젊은 시인들보다 더 젊지요. 자주는 뵙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상을 만나고, 김춘수를 읽었다는 게 고맙게 여겨집니다. 박목월 선생을 뵌 것도 저에게는 큰 복입니다. 김수영도 읽을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대담한 전위의식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카프카에게서 영향 받았고, 다자이 오사무의 몇 작품에도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춘천 시절에는 베케트를 읽었죠. 최근에는 말씀드린 대로 《금강경》을 읽고 청담 스님의 강설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이상과 김춘수 사이 어디쯤에 제가 있다는 생각을 혼자 해보곤 합니다.


- 시는 주로 언제 쓰시는지요. 취미도 궁금합니다.


저는 해질 무렵에 분위기가 옵니다. 이때 시를 많이 씁니다. 오후 체질이지요. 삼십대에는 자정에도 썼는데 이제는 체력이 달려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해질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시를 씁니다.
특별한 취미는 없습니다. 여행도 싫어합니다. 어릴 때 집이 하도 많이 옮겨 다녀 여행 다니는 것을 불안해 하는 탓도 있고, 장이 약해 물을 바꾸면 배탈이 나는 탓도 있습니다. 들뢰즈, 카프카, 칸트 등도 여행을 안했다고 합니다. 생활이 단조롭습니다. 먹는 것도 단조로워 반찬을 바꾸지 않고, 외식도 잘 못하는 편입니다. 취미가 있다면 해질녘에 혼자 맥주 마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통과 불면증 때문에 두 병이나 두 병 반 정도 마십니다. 비 오면 조금 더 마시죠. ■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25
어제:
52
전체:
671,8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