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로 만든 텐트, 혹은 맥주 한 잔/이승훈
2004.12.11 18:46
시는 언어로 만든 텐트, 혹은 맥주 한 잔 |
― 이승훈(시인·한양대 교수)과의 만남 ― |
| |
대담 / 이홍섭 (시인·본지 편집위원) |
- 최근에 나온 시선집 《아름다운 A》의 서문에서 시를 ‘언어로 만든 텐트’라고 표현하셨고, 자신의 글쓰기를 ‘결여적 글쓰기’라고 하셨는데요. 텐트는 정착할 곳이 없는 유목민의 삶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시쓰기라는 것도 목적이 없고, 그날의 삶을 적고 나면 그 다음날 떠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 《인생》에는 앞서 말씀하신 불교적 사유가 곳곳에 배어 있는데요. 의외라고 여기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불교와 만나게 된 것은 6, 7년 전 독실한 불자였던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49재 때 절에서 나눠준 노란표지의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3장에 나오는 “보살은 아상(我相)을 버리고, 인상(人相)을 버리고, 중생상(衆生相)을 버리고, 수자상(壽者相)을 버려라.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다.”라는 구절에서 ‘아, 이거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을 쓸 때에도 이 《금강경》이 제일 좋았습니다. - 그 동안 서구의 문학이론을 받아들이고, 체계화하는 데 앞장서오셨는데 이러한 불교적 사유와 충돌은 없으셨는지요. 그 동안 제 시는 물론이고, 서구의 이론 역시 자아탐구에서 시작되어 주체는 소멸했다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이 주체를 문제 삼고 있지요. 《금강경》은 ‘나라는 것은 상이 아닌가, 나라는 생각 자체를 버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해체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불교의 ‘무아사상’과 후기 구조주의에서의 ‘주체’의 문제를 다룬 책이 나올 것입니다. 원고를 넘겼어요. - 제 개인적으로는 《인생》에 실린 작품들이 이전 작품들보다 쉽고 편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리듬에 대한 배려도 훨씬 많아진 것 같습니다. 시에서 리듬은 참 중요합니다. 요즘 시들은 메시지, 의미가 승합니다. 그러나 시에서 리듬은 ‘삶의 숨결’과 같은 것입니다. 리듬이 주는 울림이 많은 의미를 거느립니다. 저는 리듬이 오지 않으면 시를 쓰지 못합니다. 스승이었던 박목월 선생도 그랬지요. - 외람되지만, 《인생》에 실려 있는 작품들이 권투에서의 잽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불교적 잽이라고나 할까요. 파편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엄적으로 얘기하면 다즉일(多卽一)의 세계이겠지요. 파편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고나 할까요. 이는 저의 시 쓰는 체질과 가깝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각종 심사에서 늘 실험시를 옹호해 오셨습니다. 최근 한 월간지에 발표한 글에서도 이를 강조하셨는데요.
- 시와 이론을 함께 해오셨는데요. 갈등은 없으셨는지요. 이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저의 체질이기도 합니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시를 쓰는 과정에서는 영향을 안줍니다. 무의식의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입니다. - 독특하고 새로운 해석이라 생각됩니다.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는 시인을 들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김춘수 선생은 젊은 시인들보다 더 젊지요. 자주는 뵙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상을 만나고, 김춘수를 읽었다는 게 고맙게 여겨집니다. 박목월 선생을 뵌 것도 저에게는 큰 복입니다. 김수영도 읽을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대담한 전위의식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 시는 주로 언제 쓰시는지요. 취미도 궁금합니다. 저는 해질 무렵에 분위기가 옵니다. 이때 시를 많이 씁니다. 오후 체질이지요. 삼십대에는 자정에도 썼는데 이제는 체력이 달려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해질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시를 씁니다. |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80 | 첫눈 外 / 송수권 | 강학희 | 2008.12.13 | 1133 |
| 79 | 저 많은 별들은 누구의 힘겨움일까 外 / 장석남 | 강학희 | 2008.12.13 | 1109 |
| 78 | 겨울 사랑 外 / 문정희 | 강학희 | 2008.12.13 | 899 |
| 77 | 落花 - 에즈라 파운드에게 / 오세영 | 강학희 | 2008.12.13 | 874 |
| 76 | 시조 평논 . 시인논 / 홍용희 | 유봉희 | 2008.12.08 | 639 |
| 75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 강학희 | 2006.08.31 | 516 |
| 74 | 한국현역 100인 대표시선- 사실과 현장의 시 | 강학희 | 2010.07.06 | 628 |
| 73 | [등(燈)에 부침 / 장석주] | 강학희 | 2010.06.15 | 245 |
| 72 | 종이배 사랑 / 도종환 | 강학희 | 2010.06.13 | 271 |
| 71 | 안도현시인의 행복이 가득한 집 | 강학희 | 2010.10.09 | 628 |
| 70 | 시인의 짧은 산책 / 디노 캄파나 | 강학희 | 2006.08.22 | 397 |
| 69 | '잃어 버린 나를 찾을 때다 / 이인석 | 강학희 | 2006.08.21 | 382 |
| 68 | 2005 신춘문예 당선 작품(시) | 강학희 | 2005.02.24 | 1082 |
| 67 | [신춘문예] 인터넷식 글쓰기...말재주 치우쳐 | 김정숙 | 2004.12.27 | 629 |
| » | 시는 언어로 만든 텐트, 혹은 맥주 한 잔/이승훈 | 김정숙 | 2004.12.11 | 652 |
| 65 |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강학희 | 2004.12.07 | 391 |
| 64 | 음악 / 복효근 | 강학희 | 2004.11.29 | 437 |
| 63 | 바람 부는 날의 시 / 김기택 | 강학희 | 2004.11.29 | 408 |
| 62 | 2006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 강학희 | 2006.02.17 | 240 |
| 61 | 당신을 위해 / 노 천 명 | 강학희 | 2004.11.29 | 334 |
시인 이승훈은 얼마 전 독특한 불교적 사유가 담긴 시집 《인생》을 펴냈고, 시선집 《아름다운 A》를 출간했다. 시와 이론을 통해 늘 시단의 전위에 서온 그의 최근 시적 모색과 사유가 궁금해 초대석으로 모셨다. - 편집자 주
불교를 너무 늦게 만났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삼십 년 전에 만났으면 사유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의 시는 상처투성이고, 피 흘리는 작업이었습니다. 이제는 진창에서 연꽃 피는 것과 같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저는 젊은 시인의 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실험의식이 있어야 자신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최근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은 천편일률적입니다. 자연도 좋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문제입니다. 문화는 다양해야 하는데, 우리 문화는 좀 단순한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것은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입니다. 제가 실험시를 쓰는 시인들을 적극 옹호하는 것은 이들의 외로운 싸움을 격려해 주는 시인이나 비평가가 너무 적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문학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고 문학사라는 게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시사(詩史)에 좋은 의미의 계보가 형성되고, 이 계보 속에서 선배를 죽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문학사 위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