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오늘:
3
어제:
0
전체:
8,326

이달의 작가

서리꽃 / 수필

2021.07.10 09:49

민유자 조회 수:8

서리꽃

 

 난 머리를 염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머리칼은 내 나이에 걸맞게 희다. 내 머리를 두고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얘기한다. 머리를 염색하면 10년은 젊게 보일 거라며 물들일 것을 적극 권한다. 나를 위해서 해주는 조언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좀 더 단정할 수 있는데 게으르다거나 너무 무심하다는 약간의 비난조가 깔려 있는 말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애초에 염색을 시작하지 않기 너무 잘했다고 한다. 자기는 중도에 그만둘 수 없어 계속하지만 너무나 귀찮고 돈도 많이 들어가니 절대로 시작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하기도 한다. 머리를 염색한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뿌리에서부터 하얗게 자라 올라오는 것이 얄밉기까지 하다고 진저리를 친다.

 

 때로는, 내 머리 정도면 자기는 절대로 염색하지 않을 거라며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는 일찍 머리가 희어져 흰머리가 너무 많아 염색을 안 할 수 없다고 한다. 하기사 요즘은 얼굴이 팽하고 자세가 꼿꼿한 노인 같지 않은 노인이 많다 보니 오히려 흰머리가 더 어색한 사람도 많다.

 

 그런가 하면 주름진 얼굴이나 구부정한 자세로 봐서 나보다 한 참 연배일 것 같은 파파노인이 머리를 새까맣게 혹은 빨갛게 염색해서 보글보글하면 희끗한 머리를 하고 그 앞에 서기가 오히려 좀 면구스럽기도 하다.

 

 어떤 자리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나같이 서리를 이고 있는 사람을 보고 어르신이라 칭할 때가 있다. 내게 어르신이란 칭호는 들을 때마다 생소하고 참 설다. 그럴 때, 과연 내가 어르신스러운 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만 결론은 언제나 정말로 자신이 없다.

 

 어르신스러우려면 우선 품도 넓고, 지혜도 많고, 인생을 어느 정도 달관한 경지에 도달하여 좀처럼 희비를 드러내지 않는 원숙함과 초연함이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난 아직도 치기 어린 호기심이 있어 때늦은 후회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철딱서니 없는 허영심도 있어 스스로 주책없다고 자책하고 자제하는 때도 많다. 감추고 싶은 연약한 점도 많고, 여태 놓지 못하는 허망한 꿈도 있다. 작은 일을 붙들고 걱정도 많이 하고, 하면 삐치고 성내며 눈물까지 끔 짜는 수다. 어르신이란 칭호보다 어리신이라 불려야 마땅할 정도다.

 

 그럼에도 세월은 철딱서니 없는 나에게 서리꽃을 달아주었다. 어르신스러워서 서리꽃을 달아준 것이 아니고 서리꽃을 달았으니 이제는 좀 어르신스러워 보라고.

 

 세월이 야멸차다고 입이 삐뚤어지게 원망하다가도 미안해서 돌이켜 그만둔다. 세월에게 진 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나이 살아 있도록 시간도 기회도 충분히 주었건만 다 놓치고 허비했으니 할 말이 없고 염치가 없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내 머리에 얹힌 서리꽃은 자랑할 것도 없지만 수치도 아니니 다정한 선물로 알리라. 아무나 다 받는 선물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 뒤돌아보면, 못내 안타깝게도 먼저 저세상으로 간 그리운 사람이 꽤 많다. 그들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다. 이 달콤한 복숭아를 맛보지 못한다.

 

 난 그저 세월에 감사하고 앞으로 내게 주어지는 나머지 날들을 더욱 소중히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