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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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눈 먼 증오/ 수필

2024.05.03 14:57

yujaster 조회 수:125

증오/민유자

 

 

  지난 7 19 한국 산업사에 길이 남을 어마어마한 경사가 있었다. KF-21(별칭 보라매) 최초 시험 비행이 성공함으로 한국이 세계 8번째 초음속 전투 비행기 제조국에 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이는 2002 합동 참모회의에서 국산 전투기 개발을 확정한 20년만이고 2015 계약에 착수해 사업이 궤도에 오른 6 여만의 쾌거다.

 

  우리나라 항공사업의 태동은 일제시대인 1944년이 시작이다. 전쟁의 막바지에서 일본은 전투 비행기의 수요가 급증하자 제조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당시 화신 백화점의 주인이며 조선의 최고 부자였던 박흥식 회장은 일본으로부터 전투기 제조를 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압박을 받는다. 조선에 징병령이 실시되어 조선인들도 천황의 적자로서 황은을 입게 되었으니 기념사업으로 비행기 생산을 하라고 명령했다. 날벼락의 명령이지만 때가 어느때인가? 이에 박흥식 회장은 회사 설립 등기를 하기도 전에조선 비행기 공업명의로 사원 2800명을 기술직 근로자로 긴급 채용한다. 군수산업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 징병에 면제를 받을 있었다. 애국 선열의 후손, 독립 운동자의 가족, 유력자의 자제들을 채용함으로 당시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의 생명을 건졌다.

 

  아무 기반이 없는 완전 무에서 시작하는 비행기 사업은 준비만 해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 기술자 양성의 목적으로 300명을 선발하여 나고야와 만주 봉천의 비행기 제작사에서 연수를 받게 했다.

당시의 시가 6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서 비행기를 만들 있도록 1400대의 신예 정밀 가공 기계를 들여와서 안양에 비행기 제조 공장을 설비한다. 전쟁 말기여서 극심한 물자 부족에다 현해탄을 장악한 미군의 폭격으로 일본 본토와의 해상 교통은 마비 상황이어서 계획은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일본 군에서도 도움을 주어 상해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도움을 받는다. 결국 비행기를 만들 있는 인력과 설비, 자재를 이렇게 모두 준비했으나 실제로 비행기를 대도 만들지는 못한 상태로 종전이 되었다. 

 

  종전이 되자 박흥식 회장은 일본에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성난 시민들에 의해 악덕 친일 모리배로 몰렸다. 친일파 1호로 반민특위에 의해 검거된다. 박회장이 하고 싶어서 것도 아니다. 많은 인력을 구명하고, 그들에게 일류 기술 교육을 시키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맹목적 증오에 눈이 사람들에 의해 박회장은 시달리고 체포 구금되었다. 연일 사람들이 화신백화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안양 공장의 세계적인 초정밀 기계들마저 증오의 분풀이로 모두 때려부수었다. 감옥에서 소식을 들은 박회장은! 우매한 사람들아!” 절규하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중에 박회장은 대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실제로 비행기를 대도 납품하지 못했고 자의로 부역한 사실이 없으니 당연하다. 박회장은 전국에 사람을 풀어 고물상을 뒤져서 기계들을 건져보려 하였으나 이미 부서지고 훼손되어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는 일화가 그의 자서전에 있다. 

만일 설비가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소멸되지 않았다면 박회장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손실을 막을 있고 우리나라 항공사업은 훨씬 빠르게 발전할 있었을 터였다. 

 

  항공분야의 선각자 신용욱이란 사람이 있다.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고 돌아온 그는 1930 국내 최초로 비행사 양성을 위한 조선 비행학교를 설립한다.

1936 10 조선 항공사업사로 바꾸고 3인승 복엽기(가스덴KR2) 도입하여 조선 최초로 서울 광주간 정기 항공노선을 개설한다. 당시 항공산업을 육성하던 일본 정부는 신용욱에게 일본 해군 DC-3(29인승 쌍발기) 일본 육군 복엽기 10대를 불하하고 비행기로 국내 정기선은 물론 해외 항공 노선까지 개항하여 중국의 해남도까지 부정기적으로 취항한다. 1942년부터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항공 수송 임무를 조선 항공 사업사에 맡긴다.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항공기들은 모두 징발당하여 사업은 중단되었다.

당시에 성능이 좋기로 유명했던 제로센 전투기의 엔진을 만든 나까지마라는 사람이 있다. 일본 본토가 빈번히 폭격을 당하자 나까지마는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한반도로 나까지마 제작소의 항공기 제작시설을 이전시켰고 일본 안의 다른 부품 공장들도 소개하여 신용욱을 중심으로 비행기 제작소를 부산에 개설했다. 여기서 해군용 항공기 1, 2, 3호를 제작했고 종전이 되었다. 시설들은 미군 군정에 의해 압류 폐기처분 되었고 신용욱은 일제의 전쟁 수행을 도운 혐의로 반민특위에 체포된다. 

그는 복역의 임기를 마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미국 여객기 3대를 도입하여 지금 대한항공의 전신인 대한 국민 항공사(KNA) 설립하여 국제노선에도 취항한다. 그는 친일파의 허물을 벗지 못하고 계속 시달렸고 경영난에 허덕이다 결국 한강에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나라 항공산업은 지난한 가운데서도 어렵사리 여린 싹을 틔워 이렇게 기술과 자재와 인력이 형성되었으면서도 걸음마 단계에서 폭삭 주저앉았다. 아무도 감히 생각조차 없었던 항공 산업은 1952 국제적인 안목이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장족의 도약을 시작하게 된다. 1953 10월에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항공기(부활호) 시험비행을 성공리에 마치게 되며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러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보라매의 위용을 보는 기쁨을 우리가 누리게 되었다.

 

  ‘반민특위 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약칭이다.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청산을 위해서 제헌 국회에서 만든 단체다. 좌익 사상에 경도된 단체로 과격하고 성급한 행동대원들에 의해서 무분별한 검거와 체포, 시위, 폭력이 난무했다. 그들은 애국과 정의, 민족과 민중의 깃발을 앞세우고 뜨거운 열정으로 달려나갔지만 허상을 쫓는 우매함을 깨닫지 못했다. 

증오는 눈을 멀게 하는 탁월한 효험이 있다. 탱천하는 분노의 소용돌이로 속절없이 빠져들면 생각의 가시거리를 현실의 코앞으로 좁힌다. 멀리 보고 넓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분노를 품고 돌진하는  분별 없는 무리는 열병같이 전염성이 강하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우매한 민중을 자극하여 합류하게 만든다. 가히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폭력의 위력은 겉잡을 없이 커지게 된다.

 

  지금도 지구마을 곳곳에서 편견으로 비롯되는 민족적 증오, 인종적 증오, 종교적 증오, 이념적 증오는 끊이지 않고있다. 증오가 얼마나 부질없으며 나와 남을 함께 망가뜨리는 ,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행진을 방해하고 주저앉히는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확연히 알게 된다.

 

202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