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15:52
기억의 편린 1/ 민유자
까마득한 칠십여년 전.
희미한 기억 속의 한 별.
지금도 명징하게 밝고 빛나는 보석!.
전쟁의 막바지에서 폐허의 잔재로 사방은 참혹하고 혼미하고 어지러웠다. 살던 집은 불 타 없어지고 부서진 채 방치된 탱크가 놀이터였다. 폭격에 주저앉은 건물터에서 숨바꼭질 했고, 깨진 사금파리로 소꼽을 놀았다. 끼니도 이어가기 힘들었으니 달콤한 간식은 꿈도 못 꾸던 유년이다. 허나 그 와중에서도 부모를 잃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행운아임이 분명하다.
인왕산 자락 발치에 살던 나는 다섯살 위의 오빠를 따라 산에 올랐다. 어린 나를 데리고 그 높은 산엘 갔다는 사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지도 않았을 터이니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역시 행운아다!
산 정상에서, 불현듯 어린 내 시야에 무한정 넓은 세계가 영화의 장면처럼 들어찼다. 내 의식 속에서 이 세상 다른 모든 것은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놀라운 새 세상의 광경만이 온 마음을 가득 채웠다. 불타는 하늘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주홍빛으로 물들고 산야는 빠른 붓질로 색을 입는다. 서쪽 하늘에서 뿜어져나오는 미세한 밝고 따뜻한 빛살은 부드럽게 날아와 내 온 몸을 감싸 안는다. 나는 투명해지고 빛은 나를 통과한다. 내몸은 충만한 기쁨으로 깃털마냥 가벼워지고 해체된 연기가 되어 공중을 부유한다. 내눈은 마치 매직 거울 속을 드려다보는 것 같다. 마술의 세계에서 나는 황홀함으로 혼미하고 주체할 수 없이 벅찬 아름다움에 속수무책 제어할 수 없는 떨림에 사로잡힌다.
나는 홀로 인왕산 정상에 오뚝 서 있다. 오빠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산은 굉장히 높았다. 전에 집에서 늘 바라보던 서쪽 하늘의 시야를 반쯤 가리던 안산은 저만치 발 아래에 납작 엎드려 있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그 안산 너머로 끊일듯 이어지는 작은 산들과 하늘과 맞닿은 평야가 보인다. 탁 트인 시야엔 온통 불타는 노을로 뒤덮인 하늘의 찬란한 광경!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아진 안산과 그너머의 조밀한 논밭과 마을의 풍경은 거리감으로 아득한 느낌과 함께 잘 익은 홍시같은 정감으로 다가와 내마음은 따뜻해진다. 곧 뛰어내리면 한참 만에 포근히 안길 것 같다. 마을을 감싸고 굽돌아드는 개울이 지는 해의 반사로 금빛으로 빛난다. 전에는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황홀한 아름다움의 첫번째 기억이다.
석양을 만나고 와서 난 아무도 몰래 값진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양 기쁨이 차올랐다. 안산이 높아 보이나 그보다 더 높은 산이 있음을 보았고, 가로막힌 안산이 다인줄 생각했는데 그 너머로도 넓은 세상이 이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보이는 현상을 뛰어넘어 생각의 지평을 넓힐 줄 알게 되었고 사물에 색을 입히고 즐거워할 줄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움이 기쁘고 행복감을 안겨준다는 믿음과 그에 대한 열망이 어슴프레 생겼다.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했던 산정에서의 노을은 내 기억의 저편에서 멀고 흐려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늘 빛나고 있다. 이 별이 빛을 발하고 있기에 나는 살아오면서 고난과 역경에서 헤메다가도 견딜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며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자라는 아이들에게 일찍 아름다움을 깨우쳐주는 일에 주력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값진 투자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전에 또 다시 산 정상에서 감동의 일몰을 만나는 일이 있으려나? 그렇게 황홀하고 달콤한 별 하나 가슴에 넣는 일 한 번쯤 더 있어도 좋으련만!
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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