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막둥이

2008.11.28 10:16

정찬열 조회 수:858 추천:114

  


  “ ‘ OOOO년 O월 O일 / 우리 엄마 서울 가분 날 ’ // 일곱 남매 막둥이 / 국민학교 3학년 진국이가 / 엄마 서울 간 날짜를 / 마루 끝 벼람박에 / 까망색 크레용으로 비뚤비뚤 써 놓았다 // 세 밤만 자면 / 돈 많이 벌어 돌아오마던 / 소식 없는 엄마를 / 손꼽아 기다리던 / 우리 집 막둥이 // 녀석은 날마다 학교가 파하면 / 방죽에 나가 낚시를 하다가 / 어둔 무렵에야 돌아왔다 // -그만 놀고 밥 묵어라 아 - / 해질녘, 아이를 불러들이는 엄마들의 / 목소리를 들었던 때문일까 / 아홉 살짜리 강태공 / 말이 없던 녀석의 그렁그렁한 눈동자엔 / 먼 산만 가득했다 // 내 유년의 뒤안길 / 아스라한 세월 저편 이야기지만 / 생각나기만 하면 / 지금도 가슴이 아려오는 / 내 동생 진국이가 써 놓았던 / 그 때 그 담벼락 글씨 ”

  이 시는 ‘우리 엄마 서울 가분 날’이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쓴 글이다. 이 시를 써놓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혼자서 울었다. 이 글을 보면 막둥이가 생각나고, 시와 관련된 가슴 저린 얘기가 떠오른다.
  철없이 뛰놀 나이에 혼자 낚시대를 담그고 있던 녀석을 멀리서 바라보며 장남인 나는 가슴이 아팠다. 해가 설핏하여 밥 짓는 연기가 고삿길로 번져갈 즈음이면 동네 엄마들은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들였고, 풀죽어 사립을 들어오던 녀석을 쳐다보며 내 가슴도 아려왔다. 저녁노을로 물드는 들 샘을 보며 막둥이 눈에 고인 눈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 밤이 아닌 3개월이 지나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올 수가 없었다. 병석에 계신 아버님과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며 돈 벌이를 위해 집을 떠난 어머니. 힘들겠지만 길을 만들어 가야한다고 어머니는 판단했고 나는 그 결정을 따랐다. 중학을 졸업한 후 진학을 포기하고 졸지에 가장이 되었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메꾸며 동생을 보살피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안쓰럽고 미안한 막둥이. 녀석은 밥을 주어도 먹지 않고 그냥 자 버리는 날이 많았다. 웅크리고 잠든 녀석에게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는 일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날마다 지게를 지고 산이나 들로 나갔다. 낫을 갈아 풀을 뜯었고 나뭇짐을 지고 어둑 무렵에 돌아왔다. 짐은 무겁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막막한 세월이 계속되더니 봄이 찾아왔다.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일어나고, 어머니는 돌아오셨다. 우리 집에도 햇볕이 들었다. 나도 내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힘들게 고개 하나를 넘고, 몇 번의 겨울을 지나 땀 흘리며 산 하나를 넘었다. 산등성이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가 꽃 이파리를 흔들며 나를 반겨주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슴 아픈 일들이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런데 막둥이에게 미안한 일이 또 하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녹음기 한대를 샀다. 공부하는데 필요할 성싶어 큰맘 먹고 월급의 반을 뚝 떼어 장만했다. 출퇴근 때 이어폰을 꼽고 영어공부도 하고, 손때가 반질반질 할 만큼 녹음기를 끼고 살았다.
  몇 년 뒤,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어 짐을 싸는데 막둥이가 나에게 물었다. “형, 그 녹음기 나 주고가면 안돼요?” 나는 못 들은 척 짐을 꾸렸다.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내 생애 첫 월급으로 산 물건을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었고, 미국에 가서도 필요할 것 같아 가져가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 보니 녹음기가 쓸모가 없었다. 주고 올 걸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어렵게 얘기를 꺼냈을 막둥이에게 미안했다. 몇 년이나 써서 고물이 다된 그까짓 녹음기 한 대를 보물단지 모시듯 미국까지 가지고 왔다니. 참 알량하고 짜잔한 형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길에서 헤드폰을 끼고 걸어가는 청년을 보면 막둥이가 생각나고 녹음기가 떠오른다. 이제는 어엿한 40대 가장이 된 우리 집 막둥이. 녀석을 생각하
면 늘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 이 수필은 필자의 저서 "쌍코뺑이를 아시나요"에 실린 글인데, '에세이플러스' 2008년 11월 호에 -이 달의 명수필-로 선정되었기에 다시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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