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고 넘어 가자

2008.12.22 01:16

정찬열 조회 수:820 추천:115

  “부부싸움을 할 때 여러분은 내 탓이라고 하십니까, 너 때문이라고 우기십니까.” 강론을 시작하면서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여러분께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고백성사를 보러 온 사람 가운데 부인 때문에 못살겠다고 얘기 한 남편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남편 때문에 불평하던 부인의 얘기는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신부님의 고백을 듣고 나서 제각기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신부님 말씀을 들으며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가 심각한 부부싸움 중인 줄 어찌 알고 저런 말을 하시나 싶었다. 따지고 보면 그 이유도 ‘너 때문에’ 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싸움의 원인은 대체로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이다. 별거 아닌 시작이 큰 것으로 번진다. 그러기 전에 풀어야 한다. 그런데 알면서도 못하고, 안한다. 자존심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결국 파국을 가져오기도 한다.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뒤 울타리 넘어 산타아나 강이 흐른다. 강둑을 물 따라 걷는다. 물 흐르는 소리 들린다. 강물이 저희끼리 속살거리는 소리다. 산꼭대기 바위에 떨어져 골짜기 따라 내려온 놈, 지붕위에 뛰어 내려 처마를 타고 흘러온 놈, 토란잎에 뒹굴다 또르르 굴러온 놈, 제각기 물길 따라 흘러오며 오만가지 풍경을 보고 듣고 내려왔으니 하고 싶은 말이 좀 많겠는가. 촐랑거리는 소리 강변에 가득하다.  
  강가에 청둥오리 몇 마리 놀고 있다. 그 중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날아오며 반갑다고 날개짓을 한다. 가만히 보니 눈에 익다. 그 녀석이다.
  몇 개월 전,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는데 거실에서 무엇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아, 글쎄 청둥오리 한 마리가 벽난로 안에서 퍼덕이고 있지 않겠는가. 이따끔 뒤뜰에 날아와 놀다가곤 하더니, 이 날은 굴뚝에 잘못 들어 왔다가 빠져나가지 못해 푸득 거리다 결국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떨어지게 된 모양이다.
  손을 넣어 잡으려 하니 요리조리 달아난다. 잡고 보니 묵직한 씨암탉만 했다. 그런데 성질 급한 이 녀석이 퍼드득 내 손을 빠져 나가버렸다. 이리저리 거실을 날다가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쳐 제풀에 주저앉았다.
   다시 잡아서 날려주려고 뒤뜰에 나와 보니 청둥오리 한 마리가 꽥꽥거리며 지붕 위를 날고 있었다. 굴뚝에 빠진 놈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혼이 빠진 오리를 녀석이 부축하여 날아갔다. 나란히 날아가며 끼룩거리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둘은 부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미물이 부부가 어떤 사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내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사과해야겠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어야 겠다.  
  한 장 남은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이유를 되짚어보면서, 올 해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은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도 모르게 말이나 행동으로 마음을 상하게 했던,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용서를 구해야겠다.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람이 먼저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해라는 매듭이 있는 것은 얽힌 것들을 풀어 매듭짓고 새 해를 맞이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올 해 풀지 못하면 명년으로 넘어가게 된다. 앙금이 쌓이면 딱딱하게 굳어질 것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모두 풀고 넘어 가야겠다.
                      
                                   (08년 12월 20일 미주한국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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