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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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2023.01.24 15:40

최영숙 조회 수:35

 

신학교를 다니며 개척 교회에서 중 고등부 학생을 지도할 때였다.
말이 중 고등부이지 사실 학생들은 몇 명 되지 않았는데, 그나마도 교회에 처음 나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말하자면 이민 온 부모들이 사업에 바쁜 나머지 밤늦도록 혼자 집에 있는 처지였던 아이들은
심심해서 교회에 나온 셈이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먼저 온 아이들이 믿음을 갖기도 전에 몰려온 친구들로 인해 학생회 분위기가 더욱 어수선해져 갔다.

성경공부가 시작되기 전에 몇 명의 아이들은 교회 창고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시간에 들어오면 서로 좋아하는 남녀 아이들끼리 앉았다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손가락을 끌어다 깨물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고,
그러면 상대방은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게다가 어떤 아이들은 아예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서 서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성경공부가 얼마큼 진행되면 아이들은 그 사이를 못 참고 속살거리며 싸우다가 훌쩍훌쩍 운다든지,
욕을 하고, 몸을 흔들고, 또 유행가를 흥얼거리면서 소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소수의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겠다고 찾아오는 일이 생겼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아이들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복음서를 공부하다가 시편 23편으로 보충설명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분위기가 어수선 하기는 여전했고,
아이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서 앉는 자리도 따로 나뉘어있는 형편이었다.
그 날도 늘 하던 대로 한 아이가 유행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랩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아이에게 시편 23편을 펴서 내밀었다.

“이걸 네가 지금 부르는 랩에 맞춰서 한 번 읽어 볼래?”

내가 하는 말에 아이는 멈칫 하더니, 씨익 웃고 나서 성경을 받아들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북치기! 박치기! 비트박스를 넣으면서 테이블을 두드려댔다.

“쭈쭈 쭈쭈리쭈리 쭈쭈~~ 허~ 예~”

박자에 맞춰 시편 랩이 끝나자 아이들은 다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날 이후로 아이들은 차츰 성경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나는 매주 새로운 이벤트를 준비하는 일에 신이 나고는 했다.
그룹 별로 그날 배워야 할 성경의 스토리를 즉흥 드라마로 만들어 발표하거나,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그 중에서 몇 가지를 택해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게 하거나,
교회 뒤뜰에서 미니 올림픽을 개최한다든지, 그런 일로 몸과 마음이 바빠졌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찬양발표회와 운동회를 하던 날,
수박씨 멀리 뱉기 대회를 하던 날,
수양회 준비를 아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맡기고 아이스크림 같이 사먹던 날.
그렇게 추억거리는 쌓여가고 학생회는 양적, 질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잠재력은 무서웠다.
크리스마스 연극의 주인공을 제비뽑기 했을 때,
뽑힌 아이를 보고 모두가 낙심을 했는데,
주인공으로 뽑힌 아이는 염려와는 달리 너무나 열심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베들레헴 여관 주인 역할을 해내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 앞에 서서 기도를 하거나 찬양 인도,
사회를 보는 기회를 갖게 되면 아이들은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했고 결과는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었다.

“잘 해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너희들이 경험을 해 보는 게 더 중요한 거야.”

못 하겠다는 아이들을 앞에 세우면서 늘 내가 하던 말이었다.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감사하고 기쁜 일이 계속되고 있는데 내 마음 속 어딘가에 무겁게 눌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가시처럼 속에 박혀서 별일 아닌 일에도 짜증을 내게 하고 걸핏하면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무엇일까..... 내가 교만했나....그런 것 같았다. 회개하고 겸손해 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더 뒤로 물러나고 아이들을 앞에 세워서 움직여갔다.
자랑하지 않고 매사에 신중하길 노력하면서 조심스럽지만 열심히 학생회 일을 해 나가고 있었다.

여름 수양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 온 다음이었다.
서로 친해진 덕분에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씩씩하게 교회에 나오고,
나는 머릿속에 때마다 떠오르는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어떻게 성경 안에서
적용할 것인가를 연구하느라고 분주할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예배를 마치고 교회 주차장에 들어선 나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페인트 통을 보았다.
궁금해서 페인트 통 가까이에 다가보니 이상하게도 속이 텅 비어있었다.
옆에 있는 것도 그랬고 그 다음 것도 그랬다.
그곳에 가득 차있는 통들은 모두 빈 깡통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곧 눈물범벅이 되었다.
무슨 뜻인지 즉각 깨달았던 것이다.
밤새도록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가슴에 하나 가득 통증이 밀려오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보고 드리고 뜻을 구하면서 말씀 안에서 분별해 갔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그동안의 내 수고는 모두 빈 깡통이었다.
내가 좋아서 한,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간, 그래서 학생들이 양적으로 성장은 했지만
영적으로는 아기 걸음마를 하게 만들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나는 내 인생길에서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내 스스로에게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 속에 숨어있는 진심은 스스로를 높이는 일이었다.
내 안에 있는 열심은 그것을 위한 간절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관한 어떤 일이든 정당성을 갖게 되고 내 열심은 더욱 힘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학생회를 인도해 줄 다른 분을 모셔온 다음에 사임을 했다.
그 후로 그 교회를 떠났고 다른 교회에 가서도 학생회를 맡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버릇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내가 하는 일은 합리화하고 남이 하는 일은 정확히 판단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시편에 등장하는 의인 편에 서게 된다.

가슴 속에 박힌 가시가 또 다시 따끔거리고 밤잠을 못 자게 되는 날이면
나는 교회 마당에 죽 늘어서 있던 꿈속의 빈 깡통을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나를 깨우치시던 하나님의 인격을 깨닫는 순간, 가슴 가득히 밀려오던 아픔을 잊지 못한다.
나의 선한 일로도 하나님이 아프실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미리 알려 주시던 그 분의 지혜가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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