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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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분노

2014.03.11 04:36

최영숙 조회 수:367 추천:93

                                                                                
                   분노


“저쪽 거는 1불 49전인데 왜 이걸 사? 봐봐! 이건 1불 79전이잖아?”
눈이 옴팡 들어가고 어깨가 처진 칠십 대 남자가 가격표를 두드리며 보란 듯이 소리를 지른다.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남자를 흘깃 쳐다보고 말한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남? 고구마 색이 다르잖아!”
빨간 패딩 재킷을 입은 땅딸막한 여자가 만만치 않게 대든다.  
“아, 고구마가 그 맛이 그 맛이지, 뭐가 다르다고 그래?”
여자와 키가 비슷한 남자가 언성을 높인다.
“달라! 이건 한국 고구마라구!”

여자는 비싼 고구마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두툼한 아랫입술을 불쑥 내밀고 서서 고구마를 봉지에 담는다.
남자는 카트 손잡이를 잡고 여자를 노려본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팽팽하다.

여자는 남자를 짯짯한 눈길로 쏘아보다가 안 되겠는지, 에이, 더러워, 하면서 이미 카트에 집어넣은 고구마 봉지를 확 집어 올려 진열대 위에 던진다. 죄 없는 고구마가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진다.

“이제 됐어? ...아이구 잘났어...남자가 쪼잔 해가지고... 그래, 아주 평생을 그렇게 몇 전에 벌벌 떨고 살아! 으이그, 그러고 살고 싶어, 인생?”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 부부를 쳐다본다. 남자는 입을 앙다물고 서있고, 여자는 입술을 비죽이며 서둘러 마켓 안 쪽으로 걸어간다. 남자는 잠시 후, 빈 카트를 밀며 천천히 뒤따라간다.

계산대 앞에서 나는 그 부부를 다시 만났다. 남자가 밀던 카트는 어디로 가고, 여자는 어묵 봉지와 두부 한 개를 달랑 손에 들고 옆의 계산대 줄에 서있었다.
여자는 눈물이라도 흘렸는지 눈언저리가 거무스름해 져 있었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세상에 혼자 남아있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 때, 여자의 뒤에 말없이 서있던 남자가 슬며시 여자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저 쪽 줄에 사람 없어. 저기로 가지....”
여자가 남자의 손을 뿌리칠 거라는 내 상상과는 달리 여자는 남자를 따라 순순히 그곳으로 옮겨갔다. 계산대를 빠져 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니 어묵과 두부가 담긴 비닐봉지는 남자가 들고, 여자는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남자를 놓칠세라 종종 뒤쫓아 가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가 남긴 씁쓸한 얼굴을 생각했다. 그 때, 여자는 후회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일로 씁쓸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왜 그 고구마를 사려고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을까, 여자도 남자에게 왜 좀 더 비싼 보라색 고구마를 사려고 하는 지, 설명하지 않았을까.... 왜 고구마 사는 일로 남자는 결국 돈 몇 센트에 벌벌 떠는 쪼잔한 남편이 되고, 그것이 결국 여자가 고구마를 내던지는 분노로 이어졌을까.

파운드에 삼십 센트 더 비싼 고구마를 사지 못하고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은 분노에 차있었다. 당장이라도 남편과 갈라설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자는 남자가 소매를 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고, 또 군말 없이 남자 뒤를 쫓아 마켓을 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잘 아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허위허위 살아온 삶이 남자의 어깨에 실려 있었고, 여자가 견디고 살아 온 시간도 만만치 않게 눈가에 서려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고구마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쌓인 감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생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어린 시절에, 아니면 성장하면서, 아니면 인생 전반에 걸쳐 쌓인 분노가 엉뚱한 일을 매개로 터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분노는 내 안에도 있다. 그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 앞에서 변명할 여지도 없이 폭발될 때가 있다. 유사한 상황이 되거나 그와 같은 느낌으로 흘러갈 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게 터져 버린다. 마치 누군가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느낌이다.

만국기가 걸려 있는 주유소를 지나면서 훌쩍이는 버릇이 그 중의 하나이다. 왜 하늘이 저렇게 파란 거야...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냥 파란 하늘이 아니고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하늘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눈물이 핑 돈다. 난처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나는 이 무의식 속에서 가끔 굼실대며 올라오는 눈물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파란 하늘을 머릿속에 떠 올리고 그 아래에서 펄럭이는 만국기를 생각했다. 잠시 후에 나는 그것이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운동회 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추운 날 아침, 검은 반바지와 반 팔 흰색 셔츠에 청색 머리띠를 하고, 운동장 한편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일학년, 이학년 순서가 끝나고, 삼학년 우리 반이 달리기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일찍 와서 자리 잡고 있던 친구 부모들은 너도나도 몰려와 각기 자기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잘 뛰라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도록 울 엄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이 먼 곳에 있는데다가 음식 준비하고 어린 동생들 까지 데려 오려면 점심시간에나 간신히 대 올 수 있는 형편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온 운동장을 훑어보았다.

출발점에 서서도 두리번거리던 나는 총소리에 놀라서 제대로 달려 나가지를 못했고, 그나마 달리다가 도중에 그냥 서버리고 말았다. 달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 운동장에서 내가 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 때,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선 자리에서 하늘이 보였다. 파란 하늘... 그 하늘 아래에 내 마음 따위는 아랑곳없이 만국기가 신나게 펄럭이고 있었다. 이래저래 기운이 빠져버린 나는 즐겁게 웃고 있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엄마가 들어 올 후문 쪽 하늘을 바라보며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 상황은 마지막 운동회 날까지 이어졌다.

거기에서 생각이 멈추자, 지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엄마를 기다리던 장면은 하얗게 지워지고, 하늘과 만국기만 내 의식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어린 날의 기억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엄마의 형편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당신의 형편에서 나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애를 썼는지 잘 알고 있다. 엄마가 수고하고 애쓴 그 최선을 나는 흉내도 못 낸다는 사실을 이제야 절감한다.

엄마는 어린 내게 말하곤 했다.
“넌 왜 맨날 나만 보면 짜증이냐?”
어린 시절, 아버지 직장 때문에 나를 잠시 할머니 집에 맡겼던 엄마를 그리워하다가도 막상 엄마가 오면 뒤란의 굴뚝 뒤로 숨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찾아오면 모른 척 나서려고 했는데 엄마는 끝내 날 부르러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서 나가보면 엄마 손길이 닿은 집안은 어느 새 반질하게 닦여있고, 따스한 김이 서린 부엌에서는 새로 짓는 밥 냄새가 폴폴 퍼져 나오는 것이었다.

폭설이 한바탕 지나간 차가운 아침 날에 파란 하늘을 보며, 미국 대륙을 건너, 태평양을 건너, 내 나라 땅 허리 한 쪽에 하루 종일 누워서 미국에 와있는 자식들 그리워하는 울 엄마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엄마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드리고 나면 나는 다시 눈물짓겠지만, 이제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다. 내게 있어 파란 하늘에 대한 분노는 처음부터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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