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산문/이재상
2008.11.04 11:11
사랑의 온기 / 이재상
벌써 가을이다. 샌프란시스코 배이(灣) 지역 날씨는 사계절이 미지근하다.
새벽 창 밖의 햇살은 엷다. 우리 집 뒤뜰은 화단인지 남새밭인지 구분이 안 된다. 깻잎과 고추들, 방울토마토 몇 포기가 코스모스 그리고 이름이 낯선 자잘한 서양 꽃들과 여름 내내 잘 어울렸다. 동양인 집에서 동서양 식물들이 오손도손 지낸 것이다.
땅이 척박하고 단단했다. 그러니 나무들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스프링클러 일부도 작동되지 않았으니 꽃들은 더욱 비루먹은 듯 했다. 올해는 거름을 사온다. 물을 뿌린다. 수선을 피웠더니 가냘프게나마 자라나고 꽃들을 피웠다. 자기 몸체보다 큰 송이를 견디지 못하는 모습도 있었다.
꽃이 지고 나니 고추가 열렸다. 꽃다지였다. 창문을 열면 깻잎들도 앙증스런 아기 손을 흔들었다. “이제 나를 가져가도 되요.” “정말 괜찮은 거니?” 여린 고추와 깻잎을 따다가 찬물에 씻는다. 쌈장을 찍어 따듯한 밥과 함께 입에 넣는다. 향내가 입안으로 번지면서 온몸이 짜릿하다. 평화(平和)란 쌀을(米) 입(口)들에게 평등(平) 분배 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별게 아닌 것처럼 보이던 그들은 내게 평화를 선사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말했다. “우리 집에는 살구나무가 있었어요. 부부가 일년 동안 냉전으로 지냈더니 그 해에는 열매가 하나도 안 열렸어요.” 집 주위로 흐르는 냉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고래등 같은 집도 흉가나 다름없다. 모든 생명체가 사랑을 빼고 나면 쭉정이가 아닌가.
요즈음 회자되는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다. 혁수정을 찬 사형수와 상류사회 여인의 사랑 이야기다. 어린이는 사랑이라는 영양분을 섭취해야 제대로 큰다. 그 영향은 성인이 된 다음으로도 이어진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애정결핍으로 상처만 안고 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범죄 심리학에서 사람을 괴물처럼 대하면 괴물이 된다고 했다. 역으로 말하면 괴물도 사랑 받으면 천사가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은 대부분 사랑이란 단어를 모르고 살아왔을 것이다. 외형으로는 부러울 것 없는 부호 집안에서 자랐으며 대학교수인 그녀는 정신적 고통으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었다.
사랑 부재가 그들의 공통 분모였다. 상처에 소금 뿌리 듯 따가운 치유를 주고받으며 사랑이 시작되었다.
“당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내 목숨 다하여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목숨밖에 없는 사형수가 여인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한다. 그러니 추락하는 나락의 깊이를 모르던 이들의 사랑은 더욱 절박하고 감동적이다. 계층적 조건이나 사회적 통념을 깨부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을 전해주는 소설이다.
이런 말도 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이며,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사랑은 두 가지에 대한 대답이다.”
나이 먹는다는 것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나이에 이르면 사랑 받기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필요하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만을 기억하고 그녀의 늙어 가는 것은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 여자는 남자의 용기를 오래 기억하고 실수는 잊어야 행복해진다. 자기 희생 없는 사랑은 참사랑일 수가 없다. 상처만 주면서도 염치없이 사랑을 받아내려고만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였다.
이맘때가 되면 늘 허전하고 목이 마르다. 처음에는 타국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다. 이제야 고국에 두고 온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갈망이 이유인 것을 알게 됐다. 그들에게 내 욕심만 부리고 지낸 시절이 부끄러워진다.
그리움은 나를 춥게 만든다. 그것이 올해 나의 가을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