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농사꾼 정경식 씨/이의
2009.02.11 07:23
웰빙 농사꾼, 정경식 씨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이의
농촌젊은이들이 너나없이 도시로 몰려가고 남은 노인들이 뼈 빠지게 농사를 짓는다. 그래도 가끔은 농촌에 뜻을 둔 사람이 있기에 농촌을 지키고 있다.
웰빙 농사꾼 정경식 씨를 운동센터에서 처음 봤을 때 어떤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다. 보통 키에 다부진 몸매, 깊게 파인 주름, 검게 그을린 피부, 눈빛이 살아 있는 그 남자는 별로 말이 없고 언제나 개량한복차림이었다. 그냥 평범한 농사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50대 중반쯤 되지 않았을까 싶더니 10년은 더 늙게 봤으니 미안할 뿐이었다.
어느 날에는 큰 백에 양복을 넣고 친척 결혼식장에 간다고 했다. 개량한복을 입고 오지 말라는 당부가 있어서 양복을 갖고 간다고 했다. 이렇게 편한 한복을 왜 기피하는지 알 수 없다는 개량한복 애호가이다.
농촌에서 자라는 학생들 백이면 백 모두가 도시로 나갈 생각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러나 정경식 씨는 달랐다. 농고에 다니며 장차 농사꾼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농고를 졸업하자 다른 집 아들들은 대학이나 직장을 찾아 도시로 가는데 아버지와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부모님들은 노발대발하셨다고 한다.
농사를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부모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논밭을 팔아서라도 자식 뒷바라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아들이 농부가 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시는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우며 농사꾼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농사꾼의 한과 무시하는 주위의 환경은 그를 두 번이나 가출하게 했다.
농고에 다닐 때부터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재배해 소득을 올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졸업하자 시시때때로 구박을 하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극도로 흥분해 낫을 들고 애써 가꾼 야채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더는 버틸 수 없어 고향을 떠나 공장에서 일하며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절단하는 사고를 당했고, 두 번째는 이웃의 오해로 누명을 써 아버지의 구박을 피해 노숙자로 살기도 했었다.
노숙자로 떠돌던 어느 날, 잡지에서 본 ‘풀무원 공동체’의 기사를 보고 답답한 가슴이 트이고,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건강한 자나 건강하지 못한 자나 누구든지 평등하게 함께 살자’는 내용의 글이 웰빙 농사꾼을 키웠다.
경기도 양주 풀무원 공동체에는 남녀 약 30여명의 식구들이 즐겁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기 농사를 배웠고, 농약과 비료에 의존한 관행농법이 도시의 공업화를 위한 저곡가 정책의 일환이라는 것과, 그리하면 결과적으로 농촌은 피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1983년 전북 부안에서 농장을 임대해 풀무원 공동체에서 만난 부인과 무 농약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 땅은 풀무원 공동체의 땅과는 달리 농약과 비료로 다 죽어가고 있었다. 땅을 살리는 일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분뇨와 잡초를 섞어 퇴비를 만들어 땅을 개량해 나갔지만 박토에서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이는 잡초와의 전쟁은 무한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형제들이 무공해채소를 먹자고 주말농장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남에게 빌려줬던 밭을 찾아 씨앗을 뿌렸다. 일요일 새벽에 달려가 보면 주종은 어디가고 잡초만이 밭을 뒤덮어 풀을 뽑느라 허리가 휘던 생각이 난다. 농사에 뜻이 없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농사이다.
그러나 정경식 씨는 농사꾼이라면 원수처럼 생각하는 벌레, 잡초와 함께 공생농법, 순환농법으로 작물을 재배하며 먹을 것을 빼고는 모두 땅으로 돌려준다. 농장 대부분의 땅이 볏짚과 잡풀로 덮여있다. 짚더미 밑에 우글거리는 지렁이는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자동으로 땅을 갈아준다. 지렁이가 만든 퇴비는 가축들의 분뇨퇴비보다 훨씬 좋다. 또 다른 벌레인 거미와 무당벌레는 진딧물이나 그 밖의 해충을 잡아먹는 도사들이다. 밭 어디를 봐도 거미줄이 처져있고 화려한 칠성 무당벌레가 지천이다.
자연은 균형을 이룰 때 공생이 가능하다. 그래서 정경식 씨는 밭 곳곳에 진딧물이 좋아하는 양배추나 케일 같은 작물을 심는다. 특히 배추밭이나 토마토 밭에 심으면 진딧물의 미끼로 훌륭하다. 또한 옥수수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하고 콩은 오히려 땅을 비옥하게 함으로 함께 심으면 거름을 따로 줄 필요도 없고 지력도 보호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고추밭에는 사이사이에 들깨를 심으면 들깨 특유의 향이 담배나방 벌레를 막아준다고 한다. 20년 넘게 농부로 살아온 그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재미있고 신기하다.
농사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벼가 건강하게 자라 나락이 익어가기 시작할 때였다. 어느 날 벌레가 나타나더니 잎을 갈아먹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잎은 하얗게 말라갔다. 동네사람들은 농약을 서둘러 쳤다. 벌레 먹기 전까지는 ’농약을 안 쳐도 농사가 잘 되는구먼‘ 하며 신기해하던 사람들이 ’역시 농약을 안 치면 안 된다니까, 저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기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꾼 중의 꾼이다.‘
농약이 아닌 벌레퇴치법은 통하지 않고, 농약은 절대 치지 않겠다는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웠다. 허지만 아내의 한 번만 농약을 치자는 눈물어린 애원과 처자식과 먹고 살 각박한 문제는 결국 농약을 치는 쪽으로 기울었다. 분무기에 농약을 지고 논둑으로 올라섰을 때 저녁노을에 붉게 빛나는 그 나락을 보고는 농약을 뿌릴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병이 들었지만 이 나락들이 바로 살아있는 생명인데 어찌 독을 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라고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길로 농약을 산기슭에 파묻고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번지지 않는 걸 보며 자연 순환의 법칙은 스스로 치유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요즘 정경식 씨는 너무 바쁘다. 지역과 전국을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와 각 지역의 귀농학교에서 강의하느라 바쁘다. 그런 와중에도 변산에 지역학교를 설립할 일 때문에 분주하다.
부모가 하는 일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기에 자연스럽게 농부의 꿈을 갖게 됐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제도는 농부가 희망인 아이들에게 농부가 되는 것을 말린다. 농부가 되려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작은 나라 덴마크의 선진농업은 농업교육에 30%를 투자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이다. 그 나라는 30ha 이상의 농장경영을 위해서는 4년 6개월의 학교와 현장실습교육을 거쳐 농부자격증을 따야 한다. 주먹구구식의 농사는 힘만 들고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농촌을 살리려면 교육을 통해 농촌의 활기를 되찾도록 노력하고 많은 도시인들이 농촌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역학교 세우기에 골몰하고 있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는 마을에 8가구의 유기농가구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단합이 돈독하여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있어 믿음직하다.
(2009. 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이의
농촌젊은이들이 너나없이 도시로 몰려가고 남은 노인들이 뼈 빠지게 농사를 짓는다. 그래도 가끔은 농촌에 뜻을 둔 사람이 있기에 농촌을 지키고 있다.
웰빙 농사꾼 정경식 씨를 운동센터에서 처음 봤을 때 어떤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다. 보통 키에 다부진 몸매, 깊게 파인 주름, 검게 그을린 피부, 눈빛이 살아 있는 그 남자는 별로 말이 없고 언제나 개량한복차림이었다. 그냥 평범한 농사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50대 중반쯤 되지 않았을까 싶더니 10년은 더 늙게 봤으니 미안할 뿐이었다.
어느 날에는 큰 백에 양복을 넣고 친척 결혼식장에 간다고 했다. 개량한복을 입고 오지 말라는 당부가 있어서 양복을 갖고 간다고 했다. 이렇게 편한 한복을 왜 기피하는지 알 수 없다는 개량한복 애호가이다.
농촌에서 자라는 학생들 백이면 백 모두가 도시로 나갈 생각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러나 정경식 씨는 달랐다. 농고에 다니며 장차 농사꾼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농고를 졸업하자 다른 집 아들들은 대학이나 직장을 찾아 도시로 가는데 아버지와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부모님들은 노발대발하셨다고 한다.
농사를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부모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논밭을 팔아서라도 자식 뒷바라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아들이 농부가 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시는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우며 농사꾼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농사꾼의 한과 무시하는 주위의 환경은 그를 두 번이나 가출하게 했다.
농고에 다닐 때부터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재배해 소득을 올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졸업하자 시시때때로 구박을 하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극도로 흥분해 낫을 들고 애써 가꾼 야채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더는 버틸 수 없어 고향을 떠나 공장에서 일하며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절단하는 사고를 당했고, 두 번째는 이웃의 오해로 누명을 써 아버지의 구박을 피해 노숙자로 살기도 했었다.
노숙자로 떠돌던 어느 날, 잡지에서 본 ‘풀무원 공동체’의 기사를 보고 답답한 가슴이 트이고,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건강한 자나 건강하지 못한 자나 누구든지 평등하게 함께 살자’는 내용의 글이 웰빙 농사꾼을 키웠다.
경기도 양주 풀무원 공동체에는 남녀 약 30여명의 식구들이 즐겁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기 농사를 배웠고, 농약과 비료에 의존한 관행농법이 도시의 공업화를 위한 저곡가 정책의 일환이라는 것과, 그리하면 결과적으로 농촌은 피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1983년 전북 부안에서 농장을 임대해 풀무원 공동체에서 만난 부인과 무 농약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 땅은 풀무원 공동체의 땅과는 달리 농약과 비료로 다 죽어가고 있었다. 땅을 살리는 일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분뇨와 잡초를 섞어 퇴비를 만들어 땅을 개량해 나갔지만 박토에서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이는 잡초와의 전쟁은 무한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형제들이 무공해채소를 먹자고 주말농장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남에게 빌려줬던 밭을 찾아 씨앗을 뿌렸다. 일요일 새벽에 달려가 보면 주종은 어디가고 잡초만이 밭을 뒤덮어 풀을 뽑느라 허리가 휘던 생각이 난다. 농사에 뜻이 없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농사이다.
그러나 정경식 씨는 농사꾼이라면 원수처럼 생각하는 벌레, 잡초와 함께 공생농법, 순환농법으로 작물을 재배하며 먹을 것을 빼고는 모두 땅으로 돌려준다. 농장 대부분의 땅이 볏짚과 잡풀로 덮여있다. 짚더미 밑에 우글거리는 지렁이는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자동으로 땅을 갈아준다. 지렁이가 만든 퇴비는 가축들의 분뇨퇴비보다 훨씬 좋다. 또 다른 벌레인 거미와 무당벌레는 진딧물이나 그 밖의 해충을 잡아먹는 도사들이다. 밭 어디를 봐도 거미줄이 처져있고 화려한 칠성 무당벌레가 지천이다.
자연은 균형을 이룰 때 공생이 가능하다. 그래서 정경식 씨는 밭 곳곳에 진딧물이 좋아하는 양배추나 케일 같은 작물을 심는다. 특히 배추밭이나 토마토 밭에 심으면 진딧물의 미끼로 훌륭하다. 또한 옥수수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하고 콩은 오히려 땅을 비옥하게 함으로 함께 심으면 거름을 따로 줄 필요도 없고 지력도 보호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고추밭에는 사이사이에 들깨를 심으면 들깨 특유의 향이 담배나방 벌레를 막아준다고 한다. 20년 넘게 농부로 살아온 그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재미있고 신기하다.
농사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벼가 건강하게 자라 나락이 익어가기 시작할 때였다. 어느 날 벌레가 나타나더니 잎을 갈아먹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잎은 하얗게 말라갔다. 동네사람들은 농약을 서둘러 쳤다. 벌레 먹기 전까지는 ’농약을 안 쳐도 농사가 잘 되는구먼‘ 하며 신기해하던 사람들이 ’역시 농약을 안 치면 안 된다니까, 저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기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꾼 중의 꾼이다.‘
농약이 아닌 벌레퇴치법은 통하지 않고, 농약은 절대 치지 않겠다는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웠다. 허지만 아내의 한 번만 농약을 치자는 눈물어린 애원과 처자식과 먹고 살 각박한 문제는 결국 농약을 치는 쪽으로 기울었다. 분무기에 농약을 지고 논둑으로 올라섰을 때 저녁노을에 붉게 빛나는 그 나락을 보고는 농약을 뿌릴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병이 들었지만 이 나락들이 바로 살아있는 생명인데 어찌 독을 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라고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길로 농약을 산기슭에 파묻고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번지지 않는 걸 보며 자연 순환의 법칙은 스스로 치유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요즘 정경식 씨는 너무 바쁘다. 지역과 전국을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와 각 지역의 귀농학교에서 강의하느라 바쁘다. 그런 와중에도 변산에 지역학교를 설립할 일 때문에 분주하다.
부모가 하는 일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기에 자연스럽게 농부의 꿈을 갖게 됐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제도는 농부가 희망인 아이들에게 농부가 되는 것을 말린다. 농부가 되려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작은 나라 덴마크의 선진농업은 농업교육에 30%를 투자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이다. 그 나라는 30ha 이상의 농장경영을 위해서는 4년 6개월의 학교와 현장실습교육을 거쳐 농부자격증을 따야 한다. 주먹구구식의 농사는 힘만 들고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농촌을 살리려면 교육을 통해 농촌의 활기를 되찾도록 노력하고 많은 도시인들이 농촌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역학교 세우기에 골몰하고 있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는 마을에 8가구의 유기농가구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단합이 돈독하여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있어 믿음직하다.
(200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