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2019.03.30 06:46

정남숙 조회 수:8

도토리묵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예전에는 집으로 손님을 초대하거나 명절, 생일을 맞아 상을 차릴 때면 육,,공 등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식재료가 공급되었다. 큰 교자상에 한 가득 채워야 예의가 갖춰지고 성의가 돋보였다. 그렇게 정성들여 차려놓고도, “아무것도 차린 게 없고, 솜씨가 부족하여 맛이 없네요.” 하며 미안해하는 것이 그 집 안주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명절 외에 손님맞이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으레 음식점이나 뷔페 신세를 진다. 나는 이런 외식을 할 때면 아무리 많은 음식이 있어도 먼저 접시에 담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맛있는 것도 보기 좋은 것도 아니며, 오랜만에 처음으로 먹어 보는 것도 먹고 싶어 기다렸던 것도 아니다. 심지어 젊었을 때는 좋아하지도 않았고 어쩌다 무심코 한두 번 집어먹는 것이 고작이었던 음식이다. 언젠가 우리 딸들이 친정엄마 생신상을 차려드렸다. 올케는 우리가 차려놓은 생신상을 한 번 휙 들러보더니 나에게 조그만 소리로 귀띔을 해주었다. 엄마는 고기반찬보다 ‘도토리묵’을 더 좋아하신다고. 처음 듣는 소리였다. 25년 동안 같이 살았던 나보다, 시집와서 10여 년 살고 있는 며느리가 엄마의 식성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 상에는 당연히 ‘도토리묵’이 빠졌었다.

 

 나는 친정엄마 식성이 남다르다고 여겼다. 왜 하필 도토리묵일까?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옆집 권사님 손까지 빌려 음식 아닌 요리로 엄마를 위해 딸들이 정성들여 차려놓은 생신 상이었다. 값 비싼 소고기산적과 돼지갈비찜을 비롯 육,,공을 총망라해 이름도 모를 요리들이 한 상 가득 도열하고 있는데,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렁물렁하고 맛도 떨떠름하며, 젓가락으로 집으면 곧장 끊어져 낭패를 당하게 하는 도토리묵이 우리 엄마의 기호식품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요리 축에도 못 끼고 존재감 없이 잔치상을 채우기 위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 도토리묵을 고기보다 더 좋아한다니, 괜히 기가 막혔다. 내가 엄마의 식성을 몰랐다는 미안함과 죄송함을 덮어씌우려고 도토리묵에게 푸념만 하고 있었다.

 

  이후 나도 모르게 나는 도토리묵을 먹고 있었다. 친정에 갈 때마다 엄마의 좋아하시는 모습을 그려보며, 빠뜨리지 않고 도토리묵을 사가지고 갔다. 요즘 우리가 자주 가는 식당이 있다. 우리식탁에 6~7가지 반찬이 나란히 줄지어 놓여있다. 내 눈이 머무는 곳은 작은 접시에 3~4쪽 담겨있는 도토리묵 접시다. 나도 모르게 남들보다 먼저 젓가락을 들고 도토리묵 한쪽을 낼름 집어먹는다. 밥을 다 먹은 뒤에도 일행 중 자기 몫을 그대로 남겨놓으면, 나는 그것까지도 먹어치운다. 옆 식탁에 남아있는 도토리묵이 짠밥에 아무렇게나 섞여 나가는 것을 보면, 내 눈길은 안타까워 쓰레기통까지 따라간다. 내가 먹는 도토리묵은 그냥 도토리묵이 아니다. 친정엄마가 그립고 생각날 때마다 도토리묵을 먹으며 안위를 받는다. 내가 맛있게 먹고 있으면 엄마도 좋아 할 것만 같다. 엄마 몫을 내가 대신 먹고 있는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이다.

 

  도토리는 사람과 관계가 깊다. 옛 어른들은 산에 올라가 도토리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풍년이 든다고 했다. 반면 흉년이 들 것을 예비하여 흉년을 모면하라고 열매를 가득 달고 있다고 한다. 열려있는 도토리열매를 따다가 먹을 것을 만들라는 것이라 했다. 가뭄이나 흉작에 의해 먹을 것이 귀해졌을 때 쌀과 보리 등의 주식을 대체하거나, 보조할 구황(救荒)을 위한 대표적인 양식으로 도토리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 때 이렇게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건강식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저칼로리 다이어트 음식으로 알려져 있어 주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이용한다.《동의보감》에 도토리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쓰고 떫으며 독이 없다고 했다. 설사와 이질 등을 낫게 하고 장과 위를 든든하게 하여 몸에 살을 오르게 하기도 한다. 도토리로 만든 음식은 소화가 잘 되며, 설사를 그치게 하고, 뼈를 튼튼하게 하며, 지혈 작용이 있고, 몸 안에 쌓이는 중금속을 제거한다고 알려졌다.

 

  오래 전, 포천 산정호수 근처에 있는 친구의 펜션에 들렀다. 떡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와 같은 참나무 종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이런 나무들의 열매를 통털어 도토리라고 한다. 펜션 주위의 커다란 참나무가 상수리 열매를 가득 달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이 상수리 열매를 가공한 도토리묵가루를 팔고 있었다. 남들이 사는 것을 보고 나도 엄마 생각이 났다. 친정엄마가 좋아하는 도토리묵을 쑤어드리기 위해, 도토리묵가루를 사오며 묵 끓이는 법을 배웠지만 자신은 없었다난생 처음으로 도토리묵을 쑤어 봤다. 신토불이다. 가루를 아껴뒀다가 친정엄마에게 솜씨를 내봤다. 음식을 할 줄 모르면서도 잘 하려고 노력도하지 않는 나를, 동생들은 요리선생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내 음식솜씨가 영 아닌 것은 나도 알고 엄마도 알고 계신다. 할 줄 모르는 솜씨로 만들어드린 도토리묵을 “잘됐다. 내 딸이 직접 쑤어주니 지금까지 먹어본 것보다 최고다.” 엄지척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한 때 서울에서는 관광버스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도토리를 따러 다녔다. 보다 못한 시골 사람들은 통행금지를 시켰고, 주운 것을 빼앗기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었다. 밤이나 도토리의 원래 주인은 다람쥐와 같은 산짐승일 것이다. 상생의 차원에서 적당한 소유를 인정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도토리가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먹이조차 남기지 않고 싹쓸이하는 인간의 과욕은 금물이다. 충청도에서는 밤으로도 묵을 만들어 먹는다. 그러나 도토리묵 맛보다 낫지는 않았다. 도토리는 묵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튀김,만두,,국수, 아이스크림까지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요즘 황사, 미세먼지, 초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려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도토리의 콘산 성분이 체내 중금속배출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답답한 마스크 벗어버리고 도토리묵 한 사발씩 먹어봄이 어떨까 싶다.  

 

 친정엄마 10주기가 다가온다. 친정올케는 엄마기일에 어김없이 엄마가 좋아하는 도토리묵은 빼놓지 않는다. 내 며느리들은 내 식성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음식을 가리는 것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는 잡식성이다. 이 것 저 것 이름을 불러가며 고르는 것도 내 소심한 성격에 맞지 않다. 그래도 뭐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면, 나는 식단에도 없다는 ‘아무거나’ 먹자하고 있으니 며느리들이 내 식성을 알 턱이 없다. 며느리들이 명절 음식을 차리고부터, 명절음식도 실속 있게 가지 수도 줄이고 가족들이 즐겨먹는 음식위주로 만든다. 간편해서 좋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고 허전함은 어쩔 수 없는 내 몫일 뿐이다. 여러 가지 많은 반찬 중 내가 찾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도토리묵’을 맛있게 먹는다. 나도 엄마식성을 닮아가는 것 같다.

                                                         (2019. 3. 30.)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67 나이 들어 대접받는 7가지 비결 두루미 2019.04.01 10
566 우상 그리고 신격화 한성덕 2019.04.01 4
565 의성 허준 두루미 2019.03.31 5
564 그 나이면 다들 그래 박용덕 2019.03.31 4
563 청바지 김재원 2019.03.31 4
562 들깨 타작 신효선 2019.03.30 36
561 추억 하나 최정순 2019.03.30 3
560 일곱 번째 손주 소식 정석곤 2019.03.30 3
» 도토리묵 정남숙 2019.03.30 8
558 인연 최상섭 2019.03.29 4
557 이런 버스 기사님만 있다면 변명옥 2019.03.29 3
556 온고을 전주에서 사는 행복 김학 2019.03.29 3
555 제주도에서 한 달 살아보기(2) 최은우 2019.03.28 9
554 진달래꽃 김세명 2019.03.28 5
553 남편이 '충성!' 하면 김창임 2019.03.28 23
552 나무고아원과 식목일 구연식 2019.03.28 3
551 조춘 김효순 2019.03.27 6
550 수필의 맛 김수봉 2019.03.26 5
549 이 책을 좀더 일찍 읽었더라면 임두환 2019.03.26 6
548 살아있음은 곧 은총 김창임 2019.03.2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