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체
2008.10.28 14:50
피사체
이월란
기억의 수레가 덜컹 나를 떠밀어, 짚어 본
창백한 과거 속에서 날뛰는 슬픈 짐승들의 크로키
하얀 도화지 위로 I-80번 도로를 타고 해뜨는 동쪽으로
어이딸 국경을 넘어간 아이
편도로 이어진 질긴 탯줄을 목에 감고도 넌 행복하니
히든카드는 늘 형편없는 패였음에도
삶의 데생은 흉상 가득 맹목의 전이가 시도되고 있지
팜므파탈의 잔상으로 서로를 찍어대며
흐릿한 화상도에 늘 미간을 찌푸렸어도
운명의 학정 앞에 우리, 이제 풀잎같은 민중으로 눕자
나란히 가엾게 눕자
두 살 먹은 너의 뺨을 때린 후, 내내
그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세탁기 위에 앉아 웃고 있는
너의 사진을 볼 때마다 너의 뺨을 때렸지
붉은 원피스보다 더 붉어지던 너와 나의 두 뺨
집착의 해부도에 코를 박고도
우리, 이별의 원근법을 해독해 낼 수 있을까
목발 짚은 영혼을 부축하며
서로의 눈동자에 새긴 영원한 잔영 속에
당의정같은 시간의 껍질을 벗기면
입에 쓴 환약같은 기억 한 알
나의 치부가 생경히 피어난 설익은 열매였어, 넌
열 아홉 해의 신음이 빚어낸, 지금도 이가 시린 과육
에미 몰래 너만의 강을 건너온, 넌
내가 써 놓은 가장 난해한 시
통역되지 못하는 언어의 강변을 돌고 돌아
무통분만의 시대에 나는, 입양된 너의 생모야
물엽맥처럼 뻗친 하늘빛 정분으로
진잎들이 골목마다 붉은 눈을 뿌려대는 이 가을에도
가슴 속, 영원히 닫히지 않는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2008-10-28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6159 | 기차 출근 | 지희선 | 2008.10.30 | 63 |
| 6158 | 부화(孵化) | 이월란 | 2008.10.29 | 63 |
| » | 피사체 | 이월란 | 2008.10.28 | 25 |
| 6156 | 영어와 컴퓨터 그 미궁 속에서 | 오연희 | 2008.10.28 | 68 |
| 6155 | 겨울비 | 고현혜(타냐) | 2008.11.27 | 40 |
| 6154 | 부산가는날 | 문만규 | 2008.10.28 | 75 |
| 6153 | 여기는 한국의 외진 읍내 | 문만규 | 2008.10.28 | 63 |
| 6152 | 건망증 | 장정자 | 2008.10.28 | 65 |
| 6151 | 그로브 몰 안의 벤치 | 장정자 | 2008.10.28 | 64 |
| 6150 | 이 가을날 | 강성재 | 2008.10.27 | 49 |
| 6149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이월란 | 2008.10.25 | 46 |
| 6148 | 카페에서 | 정국희 | 2008.10.25 | 36 |
| 6147 | 유기농상표 | 정용진 | 2008.10.25 | 58 |
| 6146 | 관계 | 이월란 | 2011.01.30 | 103 |
| 6145 | 시월의 하늘 | 박정순 | 2008.10.25 | 41 |
| 6144 | 말(견공시리즈 110) | 이월란 | 2011.09.09 | 50 |
| 6143 | 욕(견공시리즈 109) | 이월란 | 2011.09.09 | 58 |
| 6142 | 새 | 이월란 | 2008.10.24 | 65 |
| 6141 | 흐림의 실체 | 이월란 | 2008.10.24 | 68 |
| 6140 | 휴강을 핑계로 | 박정순 | 2009.07.18 | 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