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플루트 소리가 더 좋은데

2009.04.18 03:35

고대진 조회 수:39

오래 전 워싱턴주의 시애틀에서 학생 아파트에 살 때다.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던 나는 옆집의 세 살 짜리 현이와 자주 놀았다. 현이 엄마가 가야금을 전공한 음악가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현이를 대려다 줄 때 벽에 걸린 가야금을 보고 나서였다. 옛날부터 소리에 관심이 많던 내가 가야금을 배워달라고 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슨 비를 절데 못 받겠다고 해서 현이 아빠에게 테니스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때우기로 하고 가야금을 시작했다.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를 버지니아에 직장을 잡아 이사할 때까지 배웠는데 하다 보니 귀가 조금씩 틔게 되었다. 소리도 소리지만 모르던 우리 나라말을 배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야금의 음은 열두 줄의 길이를 안족(기러기 다리라는 뜻의 받침)을 움직여 조절하여 조율하는데 영랑의 시 “가야금”을 이해하게 된 것이 이 때다. 북으로/ 북으로/ 울고 간다 기러기/ 남방의/ 대숲 밑/ 뉘 휘여 날켰느뇨/ 앞서고 뒤섰다/ 어지럴 리 없으나/ 가냘픈 실오라기/ 네 목숨이 조매로아/ <가야금: 김 영랑> 가야금 시에 기러기는 왜 나오나 했었는데 안족과 열두 줄의 배열 상태를 노래한 걸 그때야 알게 되었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잦아지다 휘몰아 보아... 라는 영랑의 “북”이란 시도 산조 악보를 읽으면서 비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를 가진 마누라에게 가야금 선생님이 태교에 좋다면서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판을 선물했다. 그 뒤 마누라가 좋아하는 악기는 플루트가 되었다. 소리가 밝고 맑아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나? 뱃속에서 플루트 음악을 많이 듣다 나온 아이에게 마누라는 “엄마는 네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플루트협주곡을 듣고 싶어” 라고 최면을 걸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플루트를 시작하게 했다. 아이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레슨을 지켜보다 나도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부자가 하는 이중주를 들려준다고 마누라를 설득하고 말이다. 마누라를 위한 이중주 기쁨조가 되기도 전에 아이는 록 기타를 산다고 플루트를 팔아버려 이중주는 물 건너 가버리고 말았지만 기왕 시작한 것이니… 하면서 계속 레슨을 받다 보니 취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늘게 되었다. 사실 쓸모 있는 목공이나 자동차 수리 같은 것은 배우지 않고 필요도 없는 잡기만 배우고 싶어하는 나에게 돈주머니를 맡은 마누라의 불만은 위험한 풍선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선생 월급에 불필요한 서너 가지 레슨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적지는 않았으리라. 그 즈음 텔레비전에서 영국의 음악가인 에블린 글레니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귀도 전혀 안 들리면서 진동의 느낌으로 신들린 듯 드럼을 치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나도 갑자기 드럼을 꼭 배워야 할 것 같았다. 플루트와 섹소폰 그리고 피겨 드로잉 세가지 레슨을 받고 있을 때였다. 말하면 유지비가 많이 드는 남편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아 꾹 참고 있던 차에 타 주에 있는 큰 제약회사에서 가서 강연 초청이 왔다. 제약회사라 그런지 강연의 사례금이 두둑이 나왔다. 마누라에게는 사례금 이야기만 생략하고 근처에서 알려진 록 밴드 소속의 드러머에게 드럼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마누라 몰래. 아 그런데 나는 바보같이 반년 뒤에 세금보고를 할 때 이 사례금을 세금보고에 끼워야 하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거다. 우리 집 세금 보고는 회계 감사가 전공인 마누라 몫이라는 것도 말이다. 반년 뒤 남은 돈 몇 백 불을 봉투에 넣고 이거... 하며 주었더니 봉투 안을 보며 왠 돈이야 하며 표정이 밝아진다. 옷이나 한 벌 사 입으라고 하면서 지난 번 강연료 받은 일을 이실직고했지만 그날 누가 북이 되었는지는 말 못하겠다. 집에 있던 드럼이 곧 교회로 옮겨지고 그 뒤 난 자진해서 드럼을 건들지 안(못?)했다. 플루트가 마누라의 악기라면 나의 악기는 나의 음역과 같은 낮은 목소리의 악기들이다. 테너 색소폰이라든가 첼로 혹은 배이스 같이 낮은 음의 악기들 말이다. 드럼 사건 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쑥 색 어둠이 깔린 밤 새로 산 중고 테너 색소폰을 잡고 무드를 잡으며 <이 봉조>라도 된 듯이 <밤안개>를 멋있게(?) 불고 있는 방에 감동한 듯 마누라가 고개를 쑥 들이밀더니 “난 플루트 소리가 더 좋아” 하고 문을 닫는다. 난 색소폰 소리가 더 좋거든 특히 이런 밤이면 <밤하늘의 멜로디…>라는 옛날 라디오 프로그램도 생각나고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 한참 배우던 재즈곡들로 넘어가 폼을 잡고 부는데 마누라가 방문을 활짝 열더니 말한다. “어휴 말귀도 어두워라 . 색소폰 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잘 수 없다고요. 좀 조용히 하라고 그랬는데...” 갑자기 버린 북을 되찾아 둥둥 울리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자네가 소리하지 내가 북을 잡을 테니 하며 육자배기도 하고 좋은 고수를 만나 판소리도 시작하고 싶은데 어디 나랑 같이 북을 칠 사람은 없나? 부인에겐 비밀을 보장해 드릴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