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목욕탕과 싸우나

2007.04.28 11:27

배희경 조회 수:46

                                          
        섣달 그믐날 목욕탕과 싸우나         문학세계 게재 1999년

   오래 전 일이다. 나는 한 사돈헌데서 어떤 감사의 표시라며 싸우나 선물 권을 받았다. 이런 인사는 처음이어서 어리둥절했으며 또 나는 그 때 까지 싸우나에 가 본 일도 없는 촌뜨기였다. 내가 말로만 들은 싸우나라는 데는 몸이 욱신거리는 사람들만 가는 데로 알고 있었고, 별로 몸이 결리는 데가 없는 나는 집의 목욕탕이면 족했다. 또 돈을 쓰고 그런 데에 갈 마음은 더욱 없었다.

   선물 권을 가방에 넣어 둔 채 몇 달이 지났다. 가끔 가방을 뒤적이다가 그 표가 눈에 띄면 부담감이 생겼다. 표가 한 장이니 동무 할 사람도 없고, 필경 혼자 가야 하는 불안이다.

   그렇든 어느 하루, 나는 그 일을 단행 해 볼 결심을 했다. 달갑지 않는 설레임으로 한국타운에 새로 생긴 으리으리한 건물 안에 들어섰다. 물론 옛날 삼십 년 전에 다니던 공중목욕탕과는 다르리라 짐작은 했지만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 곳은 고대 로마의 실내 대리석 목욕탕과 질 배 없는 호화로움이어서 나를 위축 시켰다. 다원 형 욕조에는 유리로 된 벽을 통해 햇살이 화사하게 비쳤고, 높은 천장과 구분된 여러 개의 샤워 실이며, 또 멋쟁이면 미용 삼아 실컷 뛰어도 될 넓은 공간도 있었다. 갑자기 팔자에 없는 부자 집 마나님이 된 것 같아서 송구스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과거 속에서 헤매는 방랑자였다. 김 속에서 묻어나오는 싫지 않는 소독 약내를 맡으며 어릴 적 일이 짜릿한 아픔으로 번져 왔다. 우리고장에는 “섣달 그믐날 목욕탕” 이라는 말이 있었지 하며 생각한다. 새해를 존중히 맞기 위해 거지도 목욕한다는 날이다. 내 어머니는 가능하면 이날의 목욕을 피하려고 하셨지만 설빔으로 바빠서 때를 놓칠 때가 있었다.
   그런 이날은 목욕탕의 안 밖이 사람의 시루다. 발을 드려놓을 틈도 없다.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 물을 뜨려고 보면 목욕탕 물은 무릎 밑에 있어서 욕조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에 곁 드려서 아이들 울음소리와, 어른들이 물을 더 대라는 고함 소리는 차라리 산지옥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속에서도 흥얼거리며 묵은 때를 다 베끼고, 머리도 깨끗이 감고 백옥 같이 되어 나온다. 개천에서 옥을 캔 식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캐고 돌아가야 할까. 물이 욕조를 철 철 넘치고, 물을 끼얹는 소리가 한두 군데서 조용히 날 뿐 독탕과 같다. 섣달그믐의 목욕탕이 이렇게도 머리  속에 선한 내게 이곳은 넘치는 사치며 누군가에 내 자신을 용서받고 싶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살게 된 것에 감사의 말을 잃는다

   목욕이 끝나자 나는 아직도 맛사지 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접수대에 있는 중년 부인에게 다가가서 맛사지 표가 있다고 말을 건넸다. 그 여자는 남자 맛사지 사가 지금 막 일이 끝났으니 그리로 가자고 한다. 나는 당황하여 여자 분은 없는 가고 물었다. 여자는 나를 힐긋 처다 보드니 이렇게 말했다.  “그 나이에 무슨 남자 여자를 가리세요?” 나는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것을 느끼면서 아! 나이는 나 자신이 먹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먼저 먹게 해 주는구나. 서글펐다. 다음순간 그 여자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나 같은 쑥맥이가 어디 또 있을까 탄식하며, 한참 만에 그럽시다 하고 그 여자의 뒤를 따랐다.

   의사같이 가운을 입은 맛사지 사가 나를 맞았다. 좁은 방에 침대 하나가 놓여있다. 머리 쪽에 큰 구멍이 나 있는 것이 참 이상하다. 저 구멍은 무엇일까. 얼마 후 근엄하게 생긴 맛사지 사는 나를 조심스레 주무르기 시작했고, 나는 차차 긴장이 풀려가고 있었다. 한참 만에 그는 나를 엎드리라고 했고, 그가 하라는 대로 엎드리니 내 얼굴이 바로 그 구멍에 가 닿았다. 그는 내 어깨를 주리를 틀 듯 누르기 시작했으며, 내 코와 입에서는 저절로 가쁜 숨이 푸우 푸우  구멍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서야 구멍이 뚫린 이유를 알았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한국 사람이 길에서 경찰에게 포승을 당하다가 죽은 이유도 알았다. 아스팔트길에는 이런 구멍이 없었으니 그가 죽을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나는 차차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의 팔 힘은 더 세어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만 됐노라고 사양하고, 내 일생의 도원경 같은 경험을 뒤에 하고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나의 한 올케는 내 이 글을 보면 매우 웃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올케는 사분의 일 년을 싸우나 에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그녀가 차 사고로 다친 후부터 그곳이 그녀의 치료원이 되고 있다. 그런 올케를 지척에 두고 나는 사우나를 도원경 같은 곳으로 알고 있으니 확실히 사람은 천층만층으로 산다.
   섣달 그믐날에 어머니와 갔던 목욕탕의 추억은 내게 아릿한 아픔을 남겼고, 또 로마의 왕비가 되어 즐긴 싸우나는 내게 과분한 기쁨을 남겼다. 어느 쪽 하나 무게가 덜 하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또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