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바다'의 아껴쓰기

2007.05.17 17:40

고현혜(타냐) 조회 수:50 추천:3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여니 옆집 줄리가 예쁜 연두색 종이를 들고 서 있다. 마침 시간이 한가해 차라도 한 잔 할까 물어보니 지금은 거라지에서 물건들을 꺼내 닦고 손질해야 해서 바쁘다며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네 주었다.
아이들의 모든 용품을 위탁판매 해준다는 안내지였다. 5일 동안 세일을 하는데 안 팔린 물건은 도로 찾아 올 수도 있고 아니면 마지막 날 남은 물건을 트럭이 와서 도네이션 센터로 실어 간다고 했다.

그리고 보니 작년에도 줄리는 내게 이 안내문을 전해 주면서 아이들이 입던 옷들이나 용품을 팔수도 있고 아주 싸게 살 수있다고 귀뜸해준 기억이 났다.
작년에 아이들 책, 옷, 장난감등을 팔아 100 달러짜리 체크를 받았다며 이번 기회에 거라지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아마, 아무도 안 사겠지만 언니가 물려 주어서 아이 셋을 낳을 동안 입은, 14년된 임산복까지 가져갈 것이라고 해서 우리는 웃었다.
나는 줄리의 검소하면서도 물건을 아끼는 점이 참 좋다. 그리고 보니 내 주의에는 검소하게 사는 미국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얼마전 방문한 내 친구 루스의 집에선 나는 신선한 충격까지 받았다. 늦게 결혼해서 늦게 아이를 낳은 친구인데 어쩜 아기의 용품 하나 새 것이 없었다. 무남독녀인 루스는 모두 친구가 물려 준 것들이나 재활옹품에서 사서 사용하고 있었다. 6개월이 된 아기가 앉아 이유식을 하기 시작해서 하이체워를 하나 사 줄까 했더니 그것도 거라지에 있다며 씨익 웃었다.

신학교수인 루스는 남편과 교대로 아기를 보기위해 시간표를 짜서 생활한다. 바쁜 와중에도 마켓에서 파는 시리얼은 설탕이 너무 많이 들었다며 레시피를 보면서 오븐에서 직접 시리얼을 만든다.
어디 그뿐인가. 아기밥이 너무 비싸고 버려야 할 병들도 많이 나온다며 배, 사과, 바나나 등을 숟갈로 긁여 먹였다. 또 냉장고 문엔 샌드위치나 간식등을 쌌던 비닐봉지를 닦아 자석으로 붙여 말려서 다시 쓰고 있었다. 아끼고 재활용하는 친구 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진지해 보였다.

마침 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아이의 숙제에서뿐 아니라 라디오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3R (Recycle, Reduce & Reuse)'이 생각났다.
어떻게 이 '3R'을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이는 병과 캔을 리사이클 해서 학교에 가져가고 이를 닦을 때 수도물을 잠그고 형의 옷을 물려 입겠다고 했다.

언젠가 알루미늄 캔 하나를 만들기 위해 TV를 3시간 동안 볼 수있는 연료가 사용되며 그 캔이 분해되는 시간은 무려 500년 이상이 걸리는데 매주 마켓을 가야 하는 우리가 장바구니를 들고 간다면 최소한 플라스틱 백이나 마켓 봉지를 절약할 수 있지 않으냐고 호소하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를 실천에 옮겼다가 또 다시 흐지부지된 생각이 나서 가방을 찾고 있는데 "엄마, 다했어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라지 정리에 바쁜 줄리를 대신해 내가 돌보고 있던 그 집 막내였다.
나를 엄마라 부르는 매티우의 엉덩이를 닦아 주려고 하는데 이제 다섯살이 된 아이가 갑자기 토끼눈을 했다. "아니 엄마, 무슨 휴지를 그렇게 많이 써요?"

미안 하다며 휴지를 반으로 자르면서 이제 나부터 좀 더 한국에서도 전개되고 있는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기)운동을 철저히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07년 5월 7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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