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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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아끼니까요

2007.05.24 15:08

최향미 조회 수:638 추천:67

  
        출근길에 차안에서 한국 뉴스를 듣다가 중간 중간 튀어 나오는 광고는 정말 사람을 짜증 나게도 만든다. 들었던 뉴스 분량보다 훨씬 긴 광고를 듣다가 아예 CD 음악으로 바꿔 버리기도 한다. 오늘도 한국 정치인들의 치고 받고 싸우는 뉴스같지 않은 뉴스가 나오더니 이내 광고가 시작된다. '에이...'하며 라디오를 꺼 버리려는데 처음 듣는 광고 멘트가 내 귀를 쫑끗 세운다.

        '나는 늘 이것을 마십니다. 왜냐하면 제 여자 친구를 아끼니까요.' 건성으로 들어 앞부분을 놓쳤다. 무슨 술 선전인지 아니면 건강 음료수 광고 인 것 같다. 처음 듣는 광고였기 때문일까? 앞 뒤 잘리고 가운데 토막만 인 데도 귓전에서 맴돌만큼 신선하다. '그것을 마시는게 왜 여자 친구를 아끼는 걸까'하며 잠시 궁금해 졌지만 이내 내 머리속 생각은 -아끼니까-에 딱 붙어버렸다.
'광고 속의 그것을 고집할 만큼 애인이 아껴주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생각이 들다가 은근히 부러움이 스멀 스멀 올라오는걸 느끼며 피식 웃어 버린다. 늘 구박하던 라디오 광고가 이 아침에 웬 느낌! 하는 생각이다. '광고 한번 거시기하네..'하다가 이번엔 소리까지 내며 웃음이 나온다. 문득 아주 오래전의 우리엄마 생각이 나서다.

        당시에 외국사람을 상대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챨리'라는 사람좋은 미국인을 친구로 두셨다. 여행도 함께 떠날 만큼 가까웠던 챨리 아저씨 내외가 아버지를 추수감사절 파티에 초대하셨다. 파티가 끝나고 집에 오신 아버지 손에는 아저씨가 우리를 위해 싸보내신 칠면조 고기가 넉넉히 들려 있었다. 중학교 삼학년이던 나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시험공부를 하다가 문득 아까 엄마가 냉장고에 넣어두시던 칠면조 고기가 떠올랐다. 밤 열 두시가 넘어 출출한 뱃속은 '일단 먹고 보자'로 유혹 받고 있었다.

        한 조각만...하던 애초의 각오는 이미 두입째에 달아나 버렸다. 얼만큼 먹었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오밤중에 잠 안자고 뭐해' 하며 엄마에게 야단 맞을까봐 두 볼이 터져라 쑤셔 넣듯이 먹은 기억은 생생하다. 차가운 고기가 이렇게 맛있을수가... 하며  감탄까지 했던 것 같다. 더 먹기를 포기하고 내방으로 돌아 올 때까지 다행히 식구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배는 부르고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폈다. 하지만 이미 공부를 계속할 상태는 아니었다.

        잠결에 속이 거북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불쾌감은 급기야 수돗가로 달려가서 구토를 하게 만들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얼만큼 수돗 꼭지를 붙잡고 진저리를 쳐가며 구토를 했는지 기억이 없다. 구름 한 점 없이 검푸른 하늘에 걸린 달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시리게도 밝은지 토하면서 흘린 눈가의 눈물을 훔치면서도 속으로 '달 한번 되게 밝네'라며 중얼거린 기억이 날 뿐이다. 네 번, 다섯 번...결국에는 기어서 수돗가로 나오다가 식구중 누군가에게 발견이 된 것 같다. 엄마가 나오고 아버지가 뛰어 나오시고, 묻는 말에 얼추 얼추 대답한 기억이 나더니 장면이 바뀌어 내가 아버지 등에 엎여 있었다. 아마 아버지가 기절한 나를 엎고 동네 병원으로 뛰고 계시는 중인 것 같다. 그런데 옆에서 같이 뛰던 엄마가 나에게 말을 거신다. "향미야 정신나니? 너 걸을 수 있지? 응? 걸어볼래?"  이러는 엄마에게 아버지께서 역정내는 소리가 등으로 전해온다. 그런데 엄마는 더 걱정스런 목소리로 한마디 더 보태시는 것이다. "여보... 애 내려놔요. 네! 당신 허리 다쳐요...."

        그날 밤 나는 아버지 등에 엎힌채 병원에 들어 와서 링겔을 꽂고 하루를 꼬박 누워 있어야했다. 기운이 하나도 없이 눈을 감고 병원 침대에 누워서 '엄마가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 다칠까봐 아픈 딸더러 걸어 보라니... 어쩌면 얼굴 닮은 계모 일지도 몰라...' 하면서 슬퍼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도 그 맛있던 칠면조 고기를 한동안 먹지를 못했다. 차가운 것은 더더욱 보기조차 싫어했다.

        결혼해서 아기를 낳고 나이가 들어 주변 사람들이 남자의 허리에 대해 농이라도 할라치면 문득 문득 그때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 남살스럽게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이제 흰머리 뽑기도 포기한 늙그수레한 남편이 집수리 한다며 사닥다리위로 올라가면 "자기 조심해요. 떨어져 허리 다치면 큰일나..." 이렇게 꼭 한번씩 잔소리를 한다. 그러다가 문득 그때의 엄마 목소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엄마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이제 그때 엄마의 나이에 내가 섰다. 나보다 키가 더 큰 딸아이를 만약에 남편이 엎고 뛴다면 나는 옆에서 뭐라고 할까? 어쩌면 그때 우리 엄마보다 한술 더 떠 딸아이 마음을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까 싶다. '자식 아끼는 마음과 남편 아끼는 마음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면 어느것이 이길까'하고 싱거운 생각이 잠시 스친다.

        "나는 늘 이것을 삽니다. 왜냐하면 제 가족 모두를 아낄 수 있으니까요." 이런 광고는 없을까? 아무도 섭섭하지 않게 골고루 아껴주는 그런 지혜를 파는 광고 말이다. 오늘 아침 한마디의 광고가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아이처럼 푸르고 예쁜 울 엄마에게 그때  그 얘기를 해드리면 뭐라고 하실까? 분명 눈을 흘기며 이러실 것 같다. " 얘, 내가 언제...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리고 아파서 늘어진 애가 무슨 기억이 제대로 나겠니..."이렇게 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옆에 계신다면 빙그레 웃으시리라. 아마 아버지도 그때 내가 들은 엄마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테니까. 당신을 아끼는 아내의 마음을 이미 그때 접수하셨으리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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