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오늘:
0
어제:
0
전체:
17,769

이달의 작가

묵은 값

2008.05.20 13:28

최향미 조회 수:668 추천:96




        오랜만에 한가로운 아침을 보내면서 TV를 틀었다, 마땅히 볼 것도 없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 한편을 보게 되었다. 장면은 어느 회사의 사무실이다. 직원들끼리 새로운 팀장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사내 결혼을 한 여자가, 다음 팀장은 당연히 본인의 남편이 될 것이라고 한껏 들떠서 이야기를 한다. 마주 앉아 있던 다른 직원이 이유가 뭐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남편이 이 팀에서 가장 오래 됐쟎아” 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직원은 눈을 흘기며 “ 아니....간장, 된장도 아니고 오래되면 장땡 이예요?” 라며 한 마디 한다.

        드라마의 대사를 듣는 순간 ‘간장 된장’ 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한다. 사람을 우리의 묵은 장맛과 비교한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잘 묵혀진 장맛만큼은 정말 좋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묵다’라는 말은 일정한 때를 지나 오래된 상태이거나 방이나 논 따위를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겼을 때 쓰이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묵혀 두거나 묵힌다는 말을 흔히 쓰고 있다. 유용한 것을 쓰지 않고 버려둔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 한편으로는 묵혀둔 장의 깊은 맛을 표현하기도 하니 우리말의 두 얼굴이 재미있다.

         잘 묵은 된장은 일년 내내 그 구수한 맛 값을 우리의 밥상위에서 톡톡히 해내고 있다. 된장이 스스로 뽐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맛이 그 묵은 값을 알아주는 것이다. 내가 내 나이만큼의 대접을 받으려면 거기에 걸 맞는 나이 값을 잘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 보다 더 크게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부끄러운 욕심도 들곤 한다. 배우면 배운 만큼, 가지면 가진 만큼 그리고 오래되면 오래된 만큼 그 값을 잘 해내며 살고 싶은데 내 모습은 그렇지가 못 한 것 같다.  

         드라마 속 그 남자는 결국 팀장이 될까? 곰삭지도 못한 채 그냥 묵어 버리기만 한 사람일까 아니면 정말 된장처럼 오랫동안 잘 묵어서 그 값을 해낼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 젊은 여직원의 대사가 다시 생각난다. “ 아니, 간장 된장도 아니고 오래되면 장땡 이예요?” 라는 빈정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불현듯 나에게 손가락을 들이밀며“ 아니 그만큼 가졌으면 가진 값 좀 하세요!”라며  한마디 더 보탤 것만 같다. 점점 목덜미가 뜨거워진다.




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05-20-08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최향미 2008.06.16 738
19 동방예의지국? 최향미 2008.06.09 609
18 창포물에 씻어내고 최향미 2008.06.03 613
17 더 가깝게 최향미 2008.05.27 643
» 묵은 값 최향미 2008.05.20 668
15 콩나물국 최향미 2008.05.13 807
14 대통령 되기 싫어요 최향미 2008.05.08 668
13 예쁘쟎아 최향미 2007.10.15 929
12 눈망울 최향미 2007.09.17 806
11 시원하다 최향미 2007.09.18 967
10 할머니 최향미 2007.09.17 874
9 너도 나중에 새끼 낳아봐. 최향미 2007.08.31 1096
8 참 깨 최향미 2007.07.13 795
7 보라꽃 쟈카란타 최향미 2007.07.13 902
6 앙꼬없는 찐빵 최향미 2007.06.20 795
5 아끼니까요 최향미 2007.05.24 638
4 봄이 오는 골목 최향미 2007.02.19 790
3 짝사랑 최향미 2007.02.14 635
2 안질뱅이 꽃 (2) 최향미 2007.02.10 876
1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 최향미 2007.02.05 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