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의 하루... 2월 한국일보

2012.02.20 06:23

김인자 조회 수:404 추천:25

병상의 하루
김인자
   한 달이 넘게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 열과 기침과 어지럼증 때문에 고생했는데, 어제는 같은 교회 성도가 여러 가지 음식을 정성스레 해와서 한결 기운이 나고 즐거운 대화를 하고 있으니 호흡을 눌렀던 가래도 좀 사라졌다. 병원에 전부 3번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강도 높은 약을 쓴 후에야 겨우 숨쉬는 것이 부드러워지고 답답한 가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잠이 깨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소파에 길게 누워서 구스타프 말러의 심오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잊어버렸다. 이 숨막히는 감동을 헤르만 헤세는 1913년 말러와 교류하며 그의 유명한 제8교향곡을 취리히에서 들었다. 또 헤세의 친구 앙드레아는 말러의 교향곡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2012년 올해는 말러의 해인가? 정명훈이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2년에 걸쳐 지휘하고, 할리우드 볼에서는 구스타프 두다멜도 말러의 교향곡 9곡을 완주했다. 깊고 완벽하게 이어받은 고전음악의 정수를 들으며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뒷문이 드르륵 열린다.

   남편이 밖에서 화단을 손보고 있었는지 "밖에 날씨가 기막히게 화창한데 꽃구경하게 나오라"고 성화다. "아직 바람 끝이 차가우니 쟈켙을 걸치고 입을 막고 나오라"고 한다.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톡톡 튀는 햇빛과 코끝을 때리는 상큼한 바람, 자스민의 청초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제라늄과 여러 가지 꽃들이 마치 봄이 온 듯 색색으로 피어있다.

   감기를 안고 지내느라 오랜만에 뒤뜰에 나온 때문인지 창밖의 새로운 생명들은 햇빛과 물과 공기로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신비디움의 잎들이 엉켜있는 화분들에서 난꽃 줄기 여러 개가 솟아 나와 손을 흔들며 청아한 자태를 뽐낸다.

   감기로 앓고있었던 집안분위기와 다르게 창 밖의 자연은 법칙대로 왕성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선하고 맑은 자연이 눈부시게 생명을 찬양하고 있는데, 우리와 함께 하는 자연을 외면 한 채, 지구촌의 사람들은 더 분주해지고 더 불행해 지는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로 세상이 초시로 변해서 이란이나 아프리카나 시리아나 마치 저 멀리 다른 항성에 존재했던 외계의 이름들이, 마치 아래동네 골목처럼 귀에 익어져서 그들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닌 지구촌 바로 우리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젠 동화 속의 먼 나라는 마법의 양탄자도 없고, 거지왕자도 없으며, 돈 키호테도 산초를 데리고 활보하지 않는다.

   경제라는 십자군이 70억의 인류를 정복한 지금, 다 투명하게 비쳐지는 지구촌에서 민족이나 국가나 지엽적이 아닌 만인과 만인의 무한경쟁 사회가 되어가고, 생존의 성취를 위한 백미터 경주를 뛰어야하는 스트레스를 겪고있는 오늘에, 그래도 우리는 원래의 생존을 위해 가만히 돌아보며 귀기울여서 어려움을 초월하는 지혜를 찾아 현재의 삶에서 행복한 마음의 귀향을 꿈꿔봐야 할 것 같다.

   모든 지혜의 본질은, 행복은, 단지 사랑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헤르만 헤세는 좌절과 방황의 시절에도 참으로 기쁜 행복을 조용히 자연사랑에서 구했다. 그는 스위스의 테신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미모사같은 섬세한 감성으로 아름다운 전원을 가꾸는 자연의 탐미 자였다.

   현실의 일상에 마비된 현대인들에게 자연은 "그대는 나의 창조물이다... 고로 나와함께 있으면 즐거우리라"고 한 에머슨의 자연론에도 귀 기우려본다.

   헤세는 일생동안 그의 글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사색을 했는데,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전과정을, 삶과 죽음까지도 하나의 삶의 과정으로 여기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 태양이여, 흙이여, 사랑이여, 삶이여, 내 작은 뒤뜰의 생명들이 자연이라는 어마어마한 신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2-18-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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