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지성' 시인선 242는 김영태(金栄泰)화백의 ‘그늘 반 근’이었다.
상처를 싸매 주는데 반 근의 사랑이면 되고 슬픔도 반 근이면 족하다는 그의 비명을 듣는 듯 했다. 항상 외로워 보이는 듯 조그마한 어깨 밑에 깔린 반 근의 압축된 응시는 무대 위로, 원고지 위로, 캔버스 위로 자연스럽게 분출되어 비평가답게 더욱 빛이 났다.
김영태화백은 늘 반 근의 여백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없는 듯 꽉 채우며, 모자라는 듯 가득했다. 실체 없는 그늘이 존재 할 리 없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의 개입으로 그늘의 존재가치는 더욱 선명해졌다. 풀기 가신 윗도리, 그 아래 헐렁하게 삶의 원고지를 놓고 하루하루 지고의 미(美)로 가득 채우며 살아가는 자유인, 가끔은 이빨도 아프고 기가 질리는 속 쓰림마저 껴안고 외로움과도 살을 섞으며 살아갈 줄 아는 그가 옆에 있어서 그와의 사귐이 소중했고 서가엔 그의 저서들이 거의 다 꽂혀 있는 게 나로선 큰 자랑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풀어놓는 옛날이야기 중 기억나는 것 하나는 천상병(千祥炳)시인이 소설가 한무숙(韓戊淑)씨 댁에 갔을 때 향수병을 미니 양주병으로 잘못 알고 단숨에 마셔 까무러쳤다가 깨어난 후 계속 입에서는 향수 냄새가 폴폴 풍겼다는...
김영태화백의 "그늘 반 근"의 시집 첫 장에는 이렇게 쓴 그의 사인이 있다.
친구 영교,
내게 남은 건 그늘 밖에 없군요.
草芥
초개는 그의 아 호이다. 옛날 내가 서울 살 때 그가 일러 준 호는 목우(木雨)였다. 그때 그의 시작활동은 왕성했다. 나무가 물을 만나 더욱 푸른 생명으로 충만했다. 첫 아들에게 목우를 넘겨주고 자신은 초개가 되어 '초개수첩'을 내 놓았다. 어느 날 초개 얼굴을 기라성 같은 미녀들에게 돌리더니 무용평론계의 독보적 존재로 지상(紙上)을 주름 잡았다. 본래 그의 '다재 다능'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건너 사는 나에게는 늘 경이로운 바람이었다.
김영태 시인이 자신을 일컬어 초개라고 부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푸라기와 풀잎은 '풀'에 근 원을 두고 있다. 풀이 별 것은 아니지만 우주와 교감하는 물방울을 지닐 줄 알았다. 연약한 풀잎에 물방울이 맺히면 신비에 감전된 듯 그는 안테나 몇 개나 더 달고 예술의 하늘을 환하게 열어 재낀다. 그의 말대로 '춤추는 풍경'을 풍경인이 되어 들낙이는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목에 힘 줄줄 모르지만 무게 없는 초개의 눈은 항상 번득였다. 바싹 말라 버린 지푸라기 같은 보잘 것 없는 비 생명체마저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존재가치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명에는 에너지라는 질긴 힘이 내재율(内在律)로 잠복해 있었다. 생명 에너지가 풀이라면 에너지의 부재는 지푸라기다. 서로 연결되어 풀과 지푸라기, 생과 사, 밤과 낮, 선과 악, 유와 무, 등의 상극의 에너지로 미를 극대화시키는 우주의 원리를 늘 제시하는 장인이었다. 예리한 직관력은 한 순간도 그냥 낭비되지 않았다. 우주의 호흡을 따라 음악이 늘 배후에 초대되었고 음악평론집만 보아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의 삶을 휘어잡고 있는 걸 쉽게 알아 체릴 수 있었다.
풀잎과 지푸라기의 두 세계를 다 공유하면서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가슴이 서늘하게 떨릴 정도로 압권이었다. 무게도 없는 불과 반 근 밖에 안 되는
그늘의 실존은 옷깃을 여밀 정도로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다.
말수가 비교적 적은 그가 유독 ‘유서’라고 덧붙이며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을 먼저 읽어 보라 며 건네준 '그늘 반 근'의 표지엔 특유의 필치로 자화상이 그려져 있었다. 평생을 모았던 춤과 시와 그림 외 모든 책을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내 아르코 자료관에 기증하였다. 문화예술 진흥원의 김영태 자료실에는 육성 녹음과 그 유명한 1200명의 <예술가의 초상>이 다 보관되어있다.
4권의 나의 시집과 2권의 수필집 표지 그림을 애정으로 그려준 김영태 화백이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충격의 전화를 받은게 어제 같다. 그 후 두 차례 서울 방문은 주로 건강캠프며 건강식을 소개해주느라 다행이 자주 만났다. 나는 5월 중순 돌아왔고 지난 7월 12일 김영태화백의 부음을 들었다. 71세를 일기로 그늘 반근의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장사익의 추모곡을 들으며 강화 전등사 느티나무 수목장으로 우리 곁을 떠나간 거인-
그 특유의 필치로 사인해서 선물로 안겨 준 김영태시전집(1959-2005)<물 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 와 가 그의 체온을 이렇게 따뜻하게 지금 전해주고 있다. 무명의 발레리나와 정상에 세우고 나눔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반 근의 화살로 세상을 관통하던 쟁이, 2007년이 막을 내린다.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그 사람은 우뚝 서 있다 우리 가슴에.
김영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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