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학고재
2007년 9월 24일 프랑스 파리 동쪽 시골 마을 보농. 팔순의 노부부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시신으로 발견된다.
앙드레 고르와 도린 고르. 두 사람은 독극물 주사를 맞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장 폴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 했던 남편 앙드레 고르는 생태정치학을 창시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었다.
이튿날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고르는 유럽 좌파의 위대한 지성이었으며 사회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심층 분석에 평생을 바쳤다”며 공개적으로 조의를 표했다.
‘르몽드’, ‘르피가로’ 등 프랑스 언론은 고르 부부의 죽음을 연일 대서특필했고 동반 자살 동기에 주목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에 관심이 집중된다.
바로 이 책 『D에게 보낸 편지』다.
책은 앙드레 고르가 죽기 한 해 전인 2006년 3월부터 3개월에 걸쳐 쓴 한 통의 편지다.
한 살 아래인 아내 도린(Dorine)에게 보낸 공개 편지였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내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고백으로 말문을 연 앙드레는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사랑의 역사를 다정한 목소리로 되짚는다.
두 사람은 1947년 스위스 로잔에서 처음 만났다. 숫기 없는 앙드레가 주춤거리며 “춤추러 갈래요?”라고 묻자 도린은 “좋아요(why not)” 담백하게 대답한다. 눈 내리는 날의 첫 데이트였다.
여든셋의 앙드레는 낡은 소파 위에서 도린을 처음 안았던 순간도 생생히 떠올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당신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러자 현실과 상상이 袖扈낮?맞아 떨어져 나는 살아 있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쾌락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또 상대가 자신을 내어주게 만드는 것이더군요.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었습니다.”
‘무일푼의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앙드레와 ‘빛나는 영국 아가씨’도린은 매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로 발전하고 49년 초가을 결혼한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도린은 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사유하는 세계의 중심에 선다. 앙드레의 토론상대가 돼주었고, 넘어지고 좌절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독려했다. 일생동안 수입이 일정치 못했던 그를 대신해 생계를 유지한 것도 아내 도린이었다.
따뜻한 사랑의 내조 덕분에 앙드레 고르는 수많은 저작물을 내고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창간하는 등 시대의 지성으로 우뚝 선다.
『D에게 보낸 편지』에서 앙드레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한다. 사르트르가 서문을 써 유명해진 자신의 첫 작품 『배반자』(1958년)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아내에 대해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가여운 처녀, 내가 떠나 보냈더라면 어떻게든 망가져 버렸을 여자’라고 묘사한다. 단 여섯 줄의 문장이었지만 그는 평생을 두고 이를 후회한다. 그 미안함을 담아 생애 마지막 작품을 아내에게 바친 것이다.
83년 도린은 ‘거미막염’이라는 불치병에 걸린다.
8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 때 엑스레이 촬영을 위해 투여한 혈관 조영제 ‘리피오돌’의 부작용 때문에 발병한 것이다. 이때부터 앙드레는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아내 곁에 머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도린을 보면서 그는 “우리 둘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고 믿고 싶었는데 당신만 혼자 그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2006년 도린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두 사람은 동반 자살을 감행한다.
책의 마지막 장은 그들의 죽음을 예고한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앙드레와 도린은 죽는 날까지 서로에게 공명하는 젊은 연인이었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 도파민과 프로락틴, 아드레날린, 그리고 옥시토신. 몇 가지 호르몬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랑학이 당연시되는 요즘. 두 사람이 남기고 간 질기고도 절절한 사랑은 그래서 더욱 값지고 부럽다.
오죽하면 소설가 김훈이 “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 라고 추천했을까.
중앙일보 이에스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