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아버지의 결혼 수정 연재 5
2012.07.12 06:15
아 버 지 의 결 혼
제 5 회
언젠가는 정미가 막 들어서는데 아버지가 뭔가를 황급히 감추어 그냥 예사롭게 넘겨버렸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돈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에는 5백 달러를 옷장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없어졌다고 해서 숙자 씨가 없을 때 찾느라고 법석을 떤 적이 있다. 물론 못 찾았다.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정미는 “할머니가 못 믿어우면 나한테 맡기고 타 쓰세요.”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뱉지는 못했다.
어느 날, 양복 단추를 다는 중에 어쩌다 안주머니를 엿보게 되었다. 한쪽에는 20달러짜리가 족히 열 장은 넘게 들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1백 달러짜리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돈을 넣어 놓고도 잊어버린 것이다. 돈을 꺼내 들고 아버지에게 내밀었더니 주머니는 왜 뒤지느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정미는 아버지한테 돈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감춰놓다 보면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못 할 테니 잃어버리고도 모를 수도 있다. 100달러가 80달러로 둔갑을 했더라도 ‘80불이었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렇게 되더라도 숙자 씨가 아버지한테만 잘해준다면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니 손해날 것은 없다.
언젠가 한 번은 참말로 어이없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게 그동안 나하고 살면서 방세도 한 푼 안 냈다고.”
법적으로 묶여진 어엿한 부인한테 그런 망발이 없다. 숙자 씨가 이불을 똘똘 말아 쥐기 때문에 아내라는 감정이 없어 그럴까? 돈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는 할머니한테 도리어 아버지가 돈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방세 운운하면서 돈타령을 했다.
아버지의 이혼 타령은 그칠 줄을 몰랐다. 들어줘야 하는 상대는 항상 정미이니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 입에서 이혼 말이 안 나오게 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좋은 안이 떠올랐다.
“아버지, 요즘 돈 받고 하는 계약결혼 때문에 단속이 굉장히 심하대요. 아버지가 지금 이혼을 하면 이민국에서 당장 조사가 나온다고요. 영주권 받자마자 이혼했다고 할머니는 추방당할 게 뻔하고, 아버지한테까지 화가 미쳐요. 자칫 잘못되면 감옥 갈지도 모르니 제발 이혼 소리 이제 그만하세요.”
그냥 해본 소리이지만 해놓고 보니 좀 심했다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담담했다.
“걱정 마라. 내가 그런 것도 안 알아봤을까 봐 그래?”
그리고 한심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웬만한 일에도 벌컥벌컥 화를 내는 아버지이니, 집이 떠나가게 소릴 질러야 마땅하건만 그는 조용했다. 정미는 더 불안했다.
드디어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우선은 큰아들 집에 들어가 6개월 별거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족회의를 열었다. 가족회의는 항상 그녀가 나가고 없을 때 열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아들한테 한마디로 거절을 당했다. 아내가 퍽 오래전부터 온 전신이 저린 병에 걸렸는데 하와이에 용한 한의사가 있어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팔에 힘이 없어 파도 제대로 자르지 못한다고 한다. 몸이 약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런 병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혼자 있을 수 있다면서 계속 고집을 피웠다. 통하지를 않자 큰아들은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양로원을 들먹거렸다.
“아버지 혼자 밖에 나갔다가 길 잃어버리면 순경이 잡아가요. 잡아가서는 그 다음 날로 당장 양로원으로 보낼 텐데, 아버지 양로원 가시고 싶어요?”
큰아들한테 그렇게 화를 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어디서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지 아파트가 떠나가는 것 같았다. 아비가 늙었다고 이제 양로원에 갖다버리려고 한다면서 큰아들한테 달려들었다. 형님 말뜻은 그게 아니라고 작은아들이 아버지를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너도 똑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며 머리를 벽에다 쾅쾅 찧으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울고불고했다.
아버지는 며칠을 끙끙 앓았다. 하늘같이 믿었던 큰아들로부터 단단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양로원 이야기를 자꾸 들먹거렸다.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분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양로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이제부터라도 양로원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 드려야 한다. 하늘이 내린 건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언젠가는 아버지도 가야 할 곳인지 모르기 때문이다.아버지는 계속 큰아들 욕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던졌다.
"돈, 다 뺏어 먹고 나더니 이제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려고 해?”
정미는 깜짝 놀랐다. 돈을 뺏어 먹다니··· ···.
아버지는 뜻밖의 사실을 고백했다. 한국서 가지고 온 돈을 큰아들에게 몽땅 주었다는 것이었다. 정미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담담해지려고 노력을 했으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아버지, 큰오빠한테 돈 준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해요? 아버지가 큰오빠보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하셨을 텐데 왜 아버지가 그 얘기를 하세요?”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도산하고 살던 집마저 은행으로 넘어가고 미국으로 왔기에 정미는 아버지에게 돈이 한 푼도 없는 줄 알았다. 미국에 온 후에도 큰오빠가 생활비를 댄다고 해 그런 줄 알았다. 나 죽으면 그래도 큰아들이 제사를 지내줄 것이고 또 앞으로 여생을 큰아들한테 맡겨야 하겠기에 있는 돈 다 줬는데 그놈이 배신했다고 치를 떨며 분해했다. 이제는 작은아들한테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단다. 그런데 돈이 조금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불쌍했다. 아들한테 돈을 주어야만 당신 한 몸을 의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안됐었다. 그렇다면, 딸인 정미는 아버지를 도저히 못 모실 형편에 처해 있으니 돈을 한 푼도 줄 필요가 없다는 답이 나온다. 정미는 아버지한테 돈이 얼마 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3만 불”이라고 또렷이 말했다. 정미는 깜짝 놀랐다. 3만 달러라면 정미에게는 무지하게 큰돈인데 아버지는 ‘조금’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큰오빠한테 도대체 얼마를 주었을까? 가물에 콩 나듯 가끔 와서는 개밥 주듯 던져주는 1백 달러짜리 한 장, 코빼기도 안 내미는 큰올케를 생각하면 껄끄러운 기분이었으나 그래도 정미는 고맙게 받았었다. 그게 다 아버지 돈이었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버지는 이제 돈 3만 달러를 들고 작은아들네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작은며느리는 좋은 점을 많이 가진 여자다.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자신의 의무에는 충실하고 또 아주 싹싹하다. “아버님, 아버님” 하면서 시아버지를 자상스럽게 대해주어 아버지는 작은아들은 제쳐놓고 며느리에게 이런저런 상의를 한다. 무능한 남편 때문에 거의 평생을 직장 생활을 하며 혼자서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지만, 그녀는 늘 명랑하다. 어릴 때부터 큰아들만 편애한 시아버지를 은근히 원망하면서도 그런 내색은 안 한다.
그 바쁜 중에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정기적으로 안부 전화를 걸고 정미한테도 수고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위층에 사는 딸의 고충도 잘 알아 늘 위로를 해준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시아버지를 모실 작은며느리는 결코 아니다.
“아버지, 한국 사람도 없는 외딴 데서 온종일 집 안에 갇혀 어떻게 사신다고 그러세요? 작은 오빠네는 아버지가 계실 방도 없잖아요?”
아버지는 얼른 방을 하나 들이면 된다고 했다. 돈 3만 달러가 있으니 방 들이는 값은 당신이 부담하겠다는 뜻일 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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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영 (2012-07-12 16:34:27)
저 대책없는 아버지를 어쩌면 좋죠?
저런 양반이 있어 늙어가는 남자들이 도매금으로 두둘겨 맞는 거겠죠.
정 나오려면 방 하나 얻어 놓고 딱 버티는 거지 아들, 딸네는 왜 기웃거리는 겁니까.
늙어 갈 수록 김치 담그는 거 조금 배우고, 밥 짓는 거 조금 익히고, 반찬 만드는 거 조금 숙달시킨 다음,
할매가 한 달 동안 집을 비워도 눈 하나 까딱 않고 버텨, 할매 기를 팍 죽이는 재미를 몰라 그러는 거지요.
남의 눈에 눈물을 내려면 내 눈에서는 핏물이 나와야 한다지요.
읽다 보니 나도 도매금으로 넘어 가는 것 같아 은근히 뿔따구가 나기까지 하네요.
그만큼 실감나게 잘 쓰신다는 밀씀입니다. 다음을 기다립니다.
김영강 (2012-07-12 16:35:15)
정말 그러네요. 강 선생님 말씀대로 방 하나 얻어서 자립을 하지, 왜 자식들을 괴롭힙니까? 주인공 "아버지"가 진작에 강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소원성취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사실 그래요. 요즘은 관광이다 뭐다 하고 "할매가 한 달 동안 집을 비워도 눈 하나 까닥 않고 버텨, 할매 기를 팍 죽이는 재미"를 만끽하는 할배들도 많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보면 혼자 지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요? 마누라 잔소리도 안 듣고. 하지만 또 어떤 할배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도 꺼내서 먹을 줄을 모른다나요? 그 소리 듣고 정말 뿔따구 났어요. 도매금은 아니니 안심하세용. "실감나게 잘 쓴다"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메로나 박인숙 (2012-07-12 16:36:07)
한편으로 보면 만정 떨어지는 할배지만...죽기전에 사랑받아 보겠다고 결혼을 했는데 그런 것과는 먼 삶을 살면서 죽어가니...또 원하지 않는 사람과 살다보면 서로간에 인간성이 다 추락하고 자신도 모르게 살짝 돌아버리는 수도 있기에 할배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네요. 인간성은 접고라도 위의 상황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헤어지는게 정답인 것 같네요. 할아버지를 통해서 가족관계 역학이 소용돌이 치네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에 흥미가 진진합니다. 저도 다음을 기다립니다.
김영강 (2012-07-12 16:36:48)
손정숙 (2012-07-12 16:37:30)
아직은 숙자씨 심중을 아무도 모르니 .. 숙자씨 계획대로 가는건지 할배가 대책이 없는건지 단정을 못하겠네요.
양단간에 결말이 어찌 날지 기다리겠습니다. ^^데이지
김영강 (2012-07-12 16:38:08)
"한 손은 사모님 치맛자락 꼭 잡고" 계신 것? 강 선생님, 정말 그런가요?
이제 두 회 남았으니 어찌되든 양단간에 결말은 납니다. 여기서 숙자 씨는 그리 깊은 심중을 가진 인물은 아니니 그녀에게 비중은 두지 마세요. 너무 기대하다가 실망하실까 봐 약간 귓띰을 드립니다.
달샘 (2012-07-12 16:39:36)
할아버지가 좋고 나쁘다기 보다 채질적으로 나이와 상관없이 거시기가 넘치는 사람이 있드군요.
예를들어, 우리 시아버지, 또는 미국대통령을 지낸 머기시씨...
'성 도착증?'이라 할까요?
이쪽의 할아버지 같네요.
어쩔 수 없어요. 눈 감으실 때 까지 ㅋㅋㅋ...
강기영 (2012-07-12 16:40:30)
김영강 (2012-07-12 16:41:26)
아이고, 이게 무슨 소리당가요? 달샘 선생님이 너무 솔직하게 거시기 얘기를 써, 답글을 어찌 달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는데, 강 선생님께서 더 솔직하게 고백을 해뿌럿네요. 그래서 소설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죄송할 건 없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면서 남자랑(?) 인터뷰를 했는데, 그 친구 말이 남자들의 본심은 다 그렇다고 하대요.
김영강 (2012-07-12 16:42:17)
그렇지 않은 분은 반박을 하셔도 좋습니다. 소설이 또 하나 나올지 모르잖아요?
빛과 그림자 (2012-07-12 16:43:06)
할아버지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잘 묘사를 하셨네요. 이런 소설을 세태소설이라고 하나요? 읽으면서 작고하신 박완서님의 글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모두들 할아버지를 비양심적이라고 하는데,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란 연극(각본)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소설 속의 할아버지는 그래도 양심적이고 선량하며 지극히 상식적인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이 아무리 허구라지만 언제나 "그럴 듯한" 현실 속의 인물을 그려내는 일 아닌가요? 한 마디로 현실 속에 "있을 법한", 그래서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인물과 사건을 그려낸다는 점이 이 글의 묘미인 것 같네요.
김영강 (2012-07-12 16:43:56)
맞습니다. 바로 세태소설입니다. "있을 법한" 현실 속의 얘기. 솔직히 고백할게요. 이 소설의 뼈대는 진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 보고 느끼고 하여, 거기에다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고 화장까지 시켜서 세상에 내놓았답니다. 어찌나 줄줄 잘 나오는지 하룻밤에 끝이 나, 저도 놀랄 지경이었어요. 물론 그 후에 읽고읽고 또 읽으며 수없이 퇴고를 했지만요. 박완서 님의 글, <친절한 복희 씨>던가요? 그 줄거리가 생생하게 기억 나네요. 호호호. 이 소설을 읽으시면서 또 다른 소설과 비유하고 음미하는 빛과 그림자 님의 댓글, 깊이 공감합니다. 그리고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면도 일깨워 주었어요. 감사해요.
물방울 (2012-07-12 16:44:44)
돈아라면 목숨을 거시는 아버님이 그 돈을 주고라도 숙자씨와 헤어지기로 결심 하심을 볼 때 그냥 참고 그대로 살 일은 아닌듯 합니다.이런 와중에 드러나는 딸은 몰랐던 비밀들, 아들을 믿고 주었던 그 돈의 효과를 볼 수 없는 배신감과 어떤 상황이든 아버지를 맡지 않으려는 자식들의 안간힘...... 덮혀졌던 문제들이 아버지가 붙잡고 계신 줄을 타고 계속 터지고 있네요. 전개가 박진감 있어 더욱 재밌는데 2회뿐이 남지 않았다니 아쉽네요.
김영강 (2012-07-12 16:45:35)
돈이 뭔지? 정미를 무참할 정도로 서운케 해버렸네요. 큰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배신감은 또 어떻고요. "덮혀졌던 문제들이 아버지가 붙잡고 계신 줄을 타고 계속 터지고 있네요." 이 구절이 진짜 박진감이 있습니다. 질질 끌다가는 박진감이 사라질 게 뻔해서, 이제 두 회만에 끝이 납니다. 이쉬워 마시고 기대해 주세요. 기대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