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를 보며
2003.05.24 15:40
우리 집 창 밖으로 보이는 단풍나무가 이번 바람에 이파리를 거의 다 떨궈내고 앙상한 몸을 드러내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단풍나무의 이파리들을 보면서 겨울이 우리 곁에 왔음을, 그리고 한해가 저물고 있음을 느낀다.
팜트리에 육박하는 큰 키를 가진 이 단풍나무들은 여름에는 무성한 진초록 이파리로 그 푸르름을 자랑한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한 점의 초록도 남기지 않고, 붉게 타오르는 커다란 불꽃이 된다. 가을 저녁 퇴근길에 노을이 깔릴 때는 단풍나무에서 시작한 불길이 온 동네를 태우고 하늘까지 번져간다. 숨을 멈추게 하는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겨울에는 모든 이파리들을 떨궈내고 맨살을 드러낸 빈 몸으로 남는다. 길에 떨어져 뒹굴던 낙엽도 없어질 무렵, 화려한 장식을 벗은 나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져있는 구도자의 모습이 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단풍나무는 쌀쌀한 날씨에 온몸을 맡기고 자신을 단련시키기도 하고, 어느 날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 되어 화려했던 젊음과 경력, 재산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단풍나무에 숨겨진 매력은 봄의 신록이다. 새 싹이 돋아나 이파리가 돼 제법 나무를 덮을 즈음에 단풍나무는 연한 녹색의 신선함에 감싸인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이양하님의 수필, '신록예찬'에 있었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 하다."는 구절을 생각나게도 한다. 아마도 신록의 "이상한 힘"은 죽음의 계절인 겨울을 맨 몸으로 겪고 새로 태어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죽어 있는 듯한 나뭇가지가 신록의 이파리들로 덮이는 그 변화는 단풍나무가 매 계절 보여주는 의상 쇼 중에서 겨울에서 봄으로, 죽어 있는 것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사망에서 부활로 바뀌는 가장 극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신록이 성장하여 더 무성한 진초록으로 바뀌는 것이나, 나이가 들어 단풍이 들거나 결국에 떨어져 나가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겪는 길이라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의 시간들을 겪은 후에 우리의 눈앞에 다시 신록으로 살아나는 변화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봄은 오고 새해가 온다. 모두가 기다리는 새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막연하고 멀게 느껴지던 서기 2000년이 시작된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새 봄'과 '새 해'는 과거를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맞을 수 없다. 단풍나무와 같이 과감하게 헌 옷을 벗어 던져야 새 옷을 입을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독립투사를 잡아들이던 일제의 경찰이 "빨갱이를 잡는 반공투사"로 변신했던 우스꽝스런 일이 있었다. 요즈음에는 소위 공안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이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투사"로 감히 스스로를 높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이 모두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있는 탓으로 생기는 현상이고 벗어버려야 할 과제다.
이런 정치의 혼란과 후진성이 오늘 우리 조국의 현실이라면 IMF 경제 환란, 민족분단의 비극과 더불어 언젠가는 지나가고 말 겨울의 추위쯤으로 여기고 싶다. 사철이 따뜻한 지역의 사람들은 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어려움에 적응력이 없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외침을 견뎌온 저력을 가진 우리 민족은 잘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말을 쓰면서 다른 문화의 토양 위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 이민자들 또한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기존의 사람들보다 몇 배나 불리하다. 하지만 '토끼와 거북이' 얘기의 거북이처럼 결국에 승리하는 동포들을 많이 보게 된다. 불리한 여건이 도전이 되고 그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우리를 발전시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LA의 사철 푸른, 다른 나무들에서는 새 잎이 오래된 이파리 사이에 섞여있기 때문에 봄날 단풍나무에서 볼 수 있는 신록의 물결을 느낄 수 없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아무 때나 꽃이 피고 지는 이곳의 나무들처럼 그렇게 흐리멍텅하게 살고있는 나에게 단풍나무는 감동과 깨우침을 준다. 겨울을 나는 단풍나무는 버릴 것은 버리고, 허튼 자존심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성찰하고 단단한 내적인 성장을 꾀한다.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리는 인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겨울은 모든 것을 정체시키고 위축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은 봄을 낳는다. 봄의 신록을, 그 찬란한 부활의 색깔을 낳는다. 단풍나무를 보며 신록으로 덮인 새 날들을 기다린다. 2000년이라고 하지 않은가. 새 천년이라고 하지 않은가.
---- 미주 중앙일보 칼럼 <이 아침에> 1999년 12월 29일자
팜트리에 육박하는 큰 키를 가진 이 단풍나무들은 여름에는 무성한 진초록 이파리로 그 푸르름을 자랑한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한 점의 초록도 남기지 않고, 붉게 타오르는 커다란 불꽃이 된다. 가을 저녁 퇴근길에 노을이 깔릴 때는 단풍나무에서 시작한 불길이 온 동네를 태우고 하늘까지 번져간다. 숨을 멈추게 하는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겨울에는 모든 이파리들을 떨궈내고 맨살을 드러낸 빈 몸으로 남는다. 길에 떨어져 뒹굴던 낙엽도 없어질 무렵, 화려한 장식을 벗은 나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져있는 구도자의 모습이 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단풍나무는 쌀쌀한 날씨에 온몸을 맡기고 자신을 단련시키기도 하고, 어느 날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 되어 화려했던 젊음과 경력, 재산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단풍나무에 숨겨진 매력은 봄의 신록이다. 새 싹이 돋아나 이파리가 돼 제법 나무를 덮을 즈음에 단풍나무는 연한 녹색의 신선함에 감싸인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이양하님의 수필, '신록예찬'에 있었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 하다."는 구절을 생각나게도 한다. 아마도 신록의 "이상한 힘"은 죽음의 계절인 겨울을 맨 몸으로 겪고 새로 태어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죽어 있는 듯한 나뭇가지가 신록의 이파리들로 덮이는 그 변화는 단풍나무가 매 계절 보여주는 의상 쇼 중에서 겨울에서 봄으로, 죽어 있는 것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사망에서 부활로 바뀌는 가장 극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신록이 성장하여 더 무성한 진초록으로 바뀌는 것이나, 나이가 들어 단풍이 들거나 결국에 떨어져 나가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겪는 길이라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의 시간들을 겪은 후에 우리의 눈앞에 다시 신록으로 살아나는 변화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봄은 오고 새해가 온다. 모두가 기다리는 새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막연하고 멀게 느껴지던 서기 2000년이 시작된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새 봄'과 '새 해'는 과거를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맞을 수 없다. 단풍나무와 같이 과감하게 헌 옷을 벗어 던져야 새 옷을 입을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독립투사를 잡아들이던 일제의 경찰이 "빨갱이를 잡는 반공투사"로 변신했던 우스꽝스런 일이 있었다. 요즈음에는 소위 공안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이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투사"로 감히 스스로를 높이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이 모두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있는 탓으로 생기는 현상이고 벗어버려야 할 과제다.
이런 정치의 혼란과 후진성이 오늘 우리 조국의 현실이라면 IMF 경제 환란, 민족분단의 비극과 더불어 언젠가는 지나가고 말 겨울의 추위쯤으로 여기고 싶다. 사철이 따뜻한 지역의 사람들은 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어려움에 적응력이 없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외침을 견뎌온 저력을 가진 우리 민족은 잘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말을 쓰면서 다른 문화의 토양 위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 이민자들 또한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기존의 사람들보다 몇 배나 불리하다. 하지만 '토끼와 거북이' 얘기의 거북이처럼 결국에 승리하는 동포들을 많이 보게 된다. 불리한 여건이 도전이 되고 그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우리를 발전시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LA의 사철 푸른, 다른 나무들에서는 새 잎이 오래된 이파리 사이에 섞여있기 때문에 봄날 단풍나무에서 볼 수 있는 신록의 물결을 느낄 수 없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아무 때나 꽃이 피고 지는 이곳의 나무들처럼 그렇게 흐리멍텅하게 살고있는 나에게 단풍나무는 감동과 깨우침을 준다. 겨울을 나는 단풍나무는 버릴 것은 버리고, 허튼 자존심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성찰하고 단단한 내적인 성장을 꾀한다.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리는 인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겨울은 모든 것을 정체시키고 위축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은 봄을 낳는다. 봄의 신록을, 그 찬란한 부활의 색깔을 낳는다. 단풍나무를 보며 신록으로 덮인 새 날들을 기다린다. 2000년이라고 하지 않은가. 새 천년이라고 하지 않은가.
---- 미주 중앙일보 칼럼 <이 아침에> 1999년 12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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