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없는 것

2003.08.20 00:44

김동찬 조회 수:753 추천:36

요즘 우리 집 식탁에는 '콩잎'이 오른다. 깻잎처럼 콩잎을 양념에 절여 만든 반찬이다. 한달 전 한국에 사는 큰처남 부부가 우리 집에 다니러올 때 가져온 선물중 하나이다.
큰처남댁이 뭐 필요한 것 없냐고 전화로 물어왔을 때 아내는 "LA에는 없는 게 없다"며 그냥 몸만 오라고 대답했었다. 그런데도 그 대답을 사양하는 말로 들었는지 큰처남 내외는 내 아내가 좋아할 것 같으면서 LA에 없을만한 것들로 큰 가방 하나를 가득 채워 가져왔다.
이번에 다녀간 큰처남은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내 아내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청상의 홀어머니를 모신 데다 동생 셋을 거느리고 집안을 꾸려 나가느라 많은 애를 쓰셨다. 이제는 형편이 나아져서 딸을 캐나다에 유학 보내고 그 딸에게 다녀가는 길에 LA에 있는 막내 여동생 집에 들린 것이었다.
아내가 학교 다닐 때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특별히 어렵게 지낸 기억이 없다는 걸로 보아 힘든 시절에도 큰처남댁이 나름대로 막내 시누이에게 최선을 다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큰처남댁은 유학간 딸에게 "느그들한테 해준 것 반만 느그 고모한테 해줬어도 이리 마음이 안 아플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마음이 따뜻한 큰처남댁 스스로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 막내 시누이에게 좀 더 흡족한 뒷바라지를 못해준 것이 못내 아쉬었던 모양이다.
그런 아쉬움의 발로였던가. 가방에 눌러 담았던 보따리를 풀어놓으니 흥부 박타듯 선물이 쏟아져 나와 수북이 쌓였다. 김, 고춧가루, 오징어젓, 창난젓, 마른 오징어, 표고버섯, 북어포, 콩잎, 깻잎, 미숫가루, 마른 멸치 등등.. 마른 멸치는 조그만 것과 큰 것이 따로 봉투에 담아졌고 큰 멸치는 반으로 갈라 머리와 창자는 정갈하게 다듬어 진 것이었다. 이렇게 가지고 오다가 세관에서 이것저것 따지면 어떻게 하려고 했냐고 아내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푸짐한 선물에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여자들에게는 비닐 봉지에 담긴 고춧가루를 보아도 이곳 LA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고춧가루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나 보다. 아내는 이제야 고향에서 먹던 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부렸다. 아내는 하나 하나에 정성이 담긴 선물들을 펼쳐보다가 콩잎에 이르러서는 탄성을 내질렀다. 이민온 지 십 수년 동안 콩잎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노라고 반색을 했다. 아내가 어릴 적 고향, 진해에서 먹던 콩잎을 잊지 못하고 간간이 얘기하던 것을 나도 들은 기억이 난다. 아내가 콩잎에 대해서 큰처남댁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데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하던 콩잎을 이바지 속에 포함시켜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큰처남댁이 아내를 얼마나 생각하는 지에 대한 또 다른 반증이 돼 보였다.
아내는 좋아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언니도 어디 다닐 때 바리 바리 싸들고 다니는 걸 보니 할머니 다 됐우"하면서 큰처남댁을 놀렸다. "글쎄 나이가 들어갈수록 남이 좋아할지도 안 좋아할지도 모르면서 이리 싸들고만 뎅길라 안 카나"하면서 핀잔을 주는 큰처남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를 수척해진 체구로 말해 주었다.
자연스레 화제는 남 싸주기 좋아하던, 돌아가신 장모님에게로 건너갔다. 아내는 신혼 때 친정에 다녀오던 이야기를 했다. 첫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두 손에 잔뜩 장모님이 쥐어준 이바지를 들고 기차에서 내리다 사람에게 밀려 넘어졌다고 한다. 무릎은 까졌지만 다행히 앞으로 넘어져 애는 무사했더란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보자기 속에서 '크라운 로얄' 양주병이 때구르 빠져 굴러 나왔다. 그 깨지지 않은 튼튼한 병에는 물론 양주가 담겨있지 않고 친정 어머니가 짜주신 참기름이 담겨있었다. 그 때는 창피도 하고, 미국에 먼저 들어가 있는 남편도 밉고, 특히 이것저것 싸주신 친정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다 "친정 어머니의 딸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아내의 그 얘기를 듣는 동안 자꾸만 싸주시는 장모님이 보이는 듯 해서 모두들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웃음끝에 오랫만에 만난 처가 식구들의 눈가에 잠깐씩 눈물이 비치는 것을 못 본 척 훔쳐보고 말았다.
LA에는 없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큰처남 부부가 다녀간 뒤로 부쩍 LA에 없는 것이 많다고 느껴진다. 콩잎과 고운 고춧가루뿐만이 아니라 처남댁이 정성스레 가져오신 선물 하나 하나가 다 LA에는 없는 것들이다. 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 물건들에는 찾아볼 수 없는, 내 아내와 우리 집 식구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그 선물들에는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 미주 중앙일보 칼럼 <이 아침에> 1999년 12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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