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전사
이월란(10/06/10)
중년의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떡하니 퇴직을 해버리자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남편이 서서히, 아니 교묘히 돌변했다
이건 울 엄마가 만든 거니까 내가 먹을거야
넌 친정김치나, 하선정김치나, 전주김치 같은 걸 먹어
저 간사한 화상을 보겠나
내 입맛일랑은 열녀문 아래 고이 묻어두고
저 늙은 마마보이의 입맛을 죽여줘야 한다
마늘 내 푹푹 나는 명동 칼국수집 김치 같은 붉은 전사들로
땡스기빙 휴가철이면 연중행사로 김장을 하시던 시어머니
유타의 매서운 겨울 날씨 속에서 손을 호호 불며 장화를 신고
소금에 절인 배추와 하루 종일 전투를 치렀던 나였다
만삭의 배로 쪼그리고 앉아
산더미 같은 무채 앞에서 강판을 휘두르던 나였다
무는 왜 그렇게 무겁고 미끄럽던지
엄마, 맛있네, 맛만 봐드려도 오냐, 우리 새끼, 하시던 엄마를 그리며
옛 조선여자들의 애환까지 끌어안고 삶의 투지를 불태우던 나였다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매고 나는 붉은 전사가 되었다
견뎌낸 강 훈련은 과연 헛되지 않았다
이건 내가 만든 거니까 나만 먹을거야, 맘에도 없는 유세를 떠는데
맛을 보더니, 울 엄마가 만든 건 니가 다 먹어, 찌개를 끓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