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블로그
이월란(10/06/17)
거미가 되어 줄을 치러 가요
조막만한 아바타는 면상 가득 숨을 쉬고
발자국들이 찍어 놓은 아라비아 숫자는
비밀계좌의 잔고처럼 상승의 꿈을 꾸고 있네요
손익었던 방은 천국처럼 낯설지만
손마디 몇 번 까딱이면 활자가 되고
손목 몇 번 조아리면 문장이 되네요
눈먼 하루가 무성영화처럼 끝없이 돌아가고 있어
자막 한 줄 넣었다 내가 먼저 지우고 나오지요
정지되어버린 자막 속에 내 이름 같은 타인의 이름
절지동물의 다리로 절름대며 다가가지요
날개와 더듬이로 진득진득한 추억의 실을 내어
기억의 벌레 하나 잡아먹고 나와요
주정하듯 알을 슬어도 제자리에서 멀쩡히 부화되는 것들
나는 몰라요
겹눈 하나 없이 허깨비를 보기도 하는 데요
책장처럼 겹쳐진 폐서肺書의 주름 사이로도 나는
굳건히 살아내고 있지요
내가 친 그물 사이로 나방처럼 파닥이는 사지는 바로 나 였어요
구속해버렸다고 여긴 범인이 유유히 사라지는 뒷모습
어디선가 본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거미줄에 목을 매어요
영원히 나를 모른다고 하세요, 제발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며 믿고 살아요
줄도 수없이 많아지면 집이 되는지
결박된 줄 하나 풀어내어 걸어두고
익숙해져가는 지옥으로 다시 빠져 나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