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읽다
이월란 (2014-5)
첫 페이지의 의혹을 넘겨버린 것도 세월이었다
더 이상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당신을 눕혀두면
눈 밖에 난 활자들도 어둠을 먹고 자란다
신비롭게 제본된 팔 다리를 흔들어 본다
사서처럼 당신을 들고 오던 날 편협한 장르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을 펼치고도 늘 화자였던 나는 바깥이 그리운 아내가 되고
숨 쉬는 것조차 다른 당신을 매일 덮었다
아이들은 생소한 이야기를 시작한지 오래다
나의 눈높이로 들어 올린 당신은 한 번씩 버려진 문장처럼 뚝 떨어진다
글자보다 여백이 많은
감명 깊은 나라로 떠난 여행길에서도
당신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개미의 길처럼 작은 통로로 끊임없이 사라지는 주인공을 따라오는 사이
당신은 헌책방의 고서처럼 누렇게 뜨고 있다
신간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나는 돋보기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이 뭐였더라, 당신?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발라 한 끼의 그리움을 번역해낸다
한 번도 대출 받은 적 없는 목록마저 사라졌다
나의 환한 등잔 밑에 숨어 있던 책 속의 길
저자는 죽었다
나비효과처럼 팔랑이는 페이지마다 읽어서 도달할 경지였다면
화려한 세간 밑에서 먼지가 쌓였겠다
더 이상 속독이 되지 않는 느린 벤치 위에서 바람이 당신을 읽고 간다
오래 흘러야 강이 된단다
평생을 먹어도 배가 고픈 우리는 간단한 줄거리를 오래도 붙들고 있다
어느 날은 율법처럼 서 있던 당신을 성경 옆에 꽂아 두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꺼내어 일기를 쓴다
어느 페이지인가에 나의 혼을 접어 두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