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고원교수와의 대담
2003.04.29 01:38
재외 한국문인 탐방 1 >
원로시인 고 원 교수와의 대담 1
대담자: 문인귀(시인/창조문학 미주편집위원)
날짜: 2002년 10월 1일
장소: 캘리포니아주 라크레센타, 고 원 박사 자택
문: 선생님 반갑습니다. 창조문학사에서는 해외에서 오히려 열심히 창작하고 계신 원로문인들을 찾아 그분들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폭넓은 한민족 문학의 이해와 정체성을 찾고자 "재외 한국문인 탐방"을 기획하였습니다. 고국의 문인들과 더불어 선생님의 문학이 보다 넓고 깊게 이해되고 교류되기를 소망하면서 첫 번 대담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먼저 선생님의 해외 정착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미국에 오신지가 아주 오래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오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 64년 정월에 아이오와로 왔습니다. 그러니 벌써 39년이 됐네요. 내 생애의 반 이상을 줄곧 미국에서 살아온 거지요.
문: 어떻게 아이오와로 가시게 됐지요?
고: 아이오와대학에서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 대학은 특히 문예창작으로 유명하잖아요? 아이오와 라이터즈 워크샵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지요. 그 워크샵의 대표였던 시인 폴 엥글 교수와의 만남이 나를 거기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때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의 사무국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시아재단에서 공문이 왔어요. 필리핀의 씰리만대학에서 여름학기 문예창작 워크샵을 하고,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폴 엥글 교수가 시부문 강사로 초청돼 있다, 아시아재단에서 모든 경비를 대줄 테니 가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였어요.
문: 그래서 필리핀에 가셨겠네요.
고: 그렇지요. 니그로스라는 섬에 있는 대학 강습회에 가서 엥글 교수와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참가자들이 자기 작품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제출하게 돼있었으니까 나도 영시 몇 편을 들고 갔지요. 강습이 끝나던 날이었어요. 뜻밖에도 엥글교수가 최우수작품에 대한 상을 준다면서 고원을 불러 세우는 거에요. 얼마였었는지 잊어버렸지만 상금을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 나를 꼬셨습니다.
문: 아이오와대학으로 오라는 말이었겠지요?
고: 여러 말 말고 오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미국 국무성에서 왕복 여비,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아재단 본부에서 생활비, 대학에서는 학비 전담, 이런 결정과 절차가 본인이 모르는 새에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나는 실상 마음의 준비가 잘 안된 상태에서 서울을 떠나야 했습니다.
문: 좀 고민 하셨겠네요.
고: 그렇지요. 그보다 전에 1년간 영국 유학을 갔을 때하고는 가정 사정이 많이 달랐거든요. 그러나 결심을 했습니다. 당시의 한국 정치 상황, 사회 현실이 주는 부정적인 압박감도 내 결심에 상당히 큰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단돈 50불을 들고 프로펠러로 움직이는 비행기로 아이오와 시티라는 대학촌에 도착한 날은 내 맘처럼 무척 추운 날씨였어요.
문: 50불만 갖고 오신 이유가 있었던가요?
고: 우습게 들리지요? 그때 한국에서는 해외에 나가는 사람에게 백불까지 은행에서 바꿔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어요. 한국은행에서 50불을 바꿔달라 했더니, 창구 담당자가 참 이상하다는 어조로 그럼 나머지는 자기가 바꿔서 가져도 좋겠느냐 면서 조심스럽게 대하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문: 정말 옛날 얘기네요.
고: 아이오와의 문예창작 석사, 즉 MFA 과정은 다른 석사 과정보다 학점이 더 많이 요구되고 시간이 더 걸립니다. 그런데도 영국에서 공부한 걸 인정받고 해서 비교적 빨리, 그리고 우등생으로 일단 석사를 끝내고는 더 머물러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문제가 생겼지요.
문: 무슨 문제가요?
고: 원래 국무성의 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J visa로 왔었거든요. 계약 기간이 이미 지났으니 더 연장이 안되고 어서 돌아가라는 거지요. 그때부터 시작된 체류 신분 문제에 얽힌 곡절과 일화들이 참 많아요.
문: 그러면 J 비자 규제를 벗어나는 과정으로부터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기까지 남다른 경험을 하셨겠네요? 그 체험을 좀...
고: 지금 생각하면 그랬었구나 하는 정도의 경험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러한 절차상의 과정보다는 왜 이렇게까지 애를 써가면서 미국에 남겠다는 거냐, 왜 즉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안달인가.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많이 던지고 확실한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문: 그게 중요한 대목인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라도 미국 정착 과정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 아이오와를 떠나 국회도서관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국회의원은 "개인 법안"이라는 걸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이오와 출신 하원의원과 연결이 지어졌지요. 아무개를 6개월 이내에 출국시키지 말라. 이런 법안을 국회의원 몇 사람이 몇 번 상정해서 체류 연장이 됐어요. "연명"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몰라요.
문: 그건 일시적인 해결이었겠지요?
고: 그래요. 워싱턴 DC에서 뉴욕까지 처음 1년간 통학을 하고는 뉴욕으로 이사를 가고 해서 NYU 박사과정을 그 개인법안 덕에 마쳤습니다. 비교문학 전공이었지요. 학위논문이 채 끝나기 전에 뉴욕 시립대학교에 속해있는 브룩클린대학의 비교문학 강사로 채용이 됐어요. 인도문학과 인도-이라니안계 신화를 가르치는 자리였는데, 둘 다 자신이 없으면서도 면접에서 시침을 떼고 그럴듯하게 답을 해 가지고 미국 내 대학교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그게 또 내 체류문제에 큰 전환을 가져왔어요. 이번에는 "연명"이 아니라 아예 교환비자를 바꿔서 영주권으로 몰고 가자는 게 대학 측의 전략이었어요. 미국의 국방요원쯤 돼야 겨우 면제받는 'J' 딱지를 어떻게 떼느냐? 그때 나는 이미 조교수 발령을 받고 있었어요. 대학에서 이민국에 보낸 편지가 요란스러웠습니다. 5개국어에 능통한 비교문학 교수를 미국인중에서 찾을 수가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가지고 공문을 보냈어요. 나는 나대로 그 때에 맞게 브룩클린 출신 국회의원에게 손을 썼지요.
문: 재미있네요.
고: 일이 잘 됐습니다. "미국 국익에 이바지"할 시민으로 NASA 요원 아닌 비교문학 교수에게 영주의 길이 열렸어요.
문: 그때 바로 미국시민이 되신 건 아니지요?
고: 아닙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나라 시민이 되겠다는 결심을 오랜 후에야 하게 됐어요. 70년대 초에 뉴욕에서 내게도 교수생활 이외의 새바람이 불었지요. 고국의 유신 독재 반대, 인권운동, 김지하시인 구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도 금방 선두에 나서서 말이지요. 민주화운동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김지하의 벗'이라는 조직체의 대표로 무척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박정권이 나를 미국시민으로 만들었습니다.
문: 무슨 말씀인지?
고: 박정권의 해외 정보기관이 여러 면으로 감시하고 있는 중에 우리 부부가 한국여권 연장 신청을 냈어요. 나는 결코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에 유효한 여권을 갖고 있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부부의 여권이 몰수당하고 말았습니다. 국적을 박탈당한 거지요. 그 무렵에 유럽과 일본 등지를 여행할 때, 미국 이민국은 내게 "무국적자" (Stateless) 출입국 허가서를 내주었어요. 미국 여권 노릇을 할 수 있는 증명서지요. 미국은 정말 특별한 데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 국적 없는 미국 시민으로 대접하는 셈이군요.
고: 나는 그때, '시인은 특정 국적이 없는 세계시민이 아니냐'고 혼자 속으로 외쳤습니다. 한편으로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쾌했습니다. 그러나 수년 후에 국적이 필요해 결국 미국 시민이 되고 말았어요. 법적으로는 세계시민이 아니고 소위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거지요.
문: 특수한 얘깃거리가 얼마든지 있겠습니다만 화제를 문학 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저는 가끔 후배들한테서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요. 좀 평범하게,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왜 시인이 됐느냐는 말로 바꿔도 좋을 듯해요.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고: 시가 좋아서 많이 읽다 보니까 어느 틈에 시를 쓰게 됐다 하면 그만이겠지만, 나 같은 연배의 경우에는 민족문제가 바탕에 깔렸다고 말할 수 있지요. 나는 소년시절에 쇼펜하워를 좋아해서 일본말로 된 그의 저서를 애독했고, 니체도 꽤 읽었어요. 철학에 못지 않게 서양문학과 한국문학 책을 열심히 구해서 읽는 중에 좀 일찍부터 인생문제를 생각하는 한편으로 정의감과 애족심이 소년의 혼을 사로잡았다 할까요. 이런 사고와 감정, 그리고 좀더 높은 차원에서 정서, 서정으로 올라서게 되면 그 전체를 한데 뭉쳐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않겠어요? 이때 자연스러운 장르 선택이 시일 수밖에 없었어요. 일제 시대 중학생이었던 내 글이 '수험생' 잡지에 처음 발표된 건 일본말로 쓴 시였습니다. 오래 보관하지 않았으니까 무얼 썼는지 알 수 없지요.
문: 이런 대담에서 으레 나오는 질문 하나 드릴까요? 언제, 어떻게 소위 "등단" 하셨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도 있을 테니까.
고: 지금 얘기했잖아요? 그건 농담이고요. 우리 젊었을 때는 [문예]가 추천제를 쓰고 있었는데, 나는 추천이나 당선이 아니라 동인 시집으로 나왔습니다. 그게 1952년 12월에 피난처 부산의 협동문화사에서 출판해준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시 몇 편이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됐었지만, 우리 세 사람은 이 시집을 등단으로 잡고 있지요. 장호형은 세상을 떠났고, 이민영형은 주소를 모르고 지내네요.
문: 1952년이면 만 50년 전이군요.
고: 사실은 장호가 살아있던 몇 년 전에 부산에서 우리 [시간표 없는 정거장] 간행 50주년 기념의 모임을 가지기로 예정했었어요. 자주 가던 '파도'다방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장호는 부산 자기집으로 피난 가 있었고, 이민영은 부산 어느 국민학교 교사였으니까 나만 나그네였지요. 당시 협동문화사에서 '파랑새'라는 어린이 잡지를 시인 김용호씨 주간으로 내고 있었어요. 김선생이 나를 불러들여 취직이 됐거든요. 그런데다 출판사 사장은 이민영형이 가르치던 학생의 학부형이었어요. 이런 연유로 우리 시집이 전시인데도 아주 순탄하게 세상 빛을 보게 됐어요. 이 책의 제목을 내가 붙이고, 발문도 내가 썼습니다. 지금 수준으로는 책 같지도 않게 초라해 보이지만, 제목이나 내용 면에서 꽤 주목을 받았다고 기억해요.
문: 세분이 모일 수 없어도 50주년 기념 모임을 가지러 부산에 가실 계획이신 가요?
고: 그렇게 안될 것 같네요. 이 대담과 함께 [창조문학]이 고 원 특집을 내보내면 나로서는 그게 기념행사가 되겠습니다. 아까 얘기한대로 [시간표 없는 정거장]을 내 문단 진출의 정식 출발로 잡을 때, 2002년 12월은 곧 고원의 문학생활 50여년을 기념하는 달이 되는 셈이니까 그것으로 만족하고 말겠습니다.
문: 저희 [창조문학이] 그런 일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마침 잘 됐네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L.A.에서라도 모임을 가져야겠네요.
고: 아닙니다. 나 혼자 조용히 내 문학과 인생을 정리해보는 시간이라도 만들 생각입니다.
문: 3인 시집이 나온 뒤에 환도하시고, 그 후로 많은 개인 작품집이 나온 줄 압니다만,
고: 책이 출판된 권수는 많지요. 54년에 나온 [이율의 항변]에서부터 64년 초의 [속삭이는 불의 꽃]까지 10년 동안에 개인 시집 다섯 권이 서울에서 나왔고, 미국에 온 후 뉴욕에서 시집 두 권, 다시 서울에서 시집 4권, 신작을 포함한 시선집 하나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시집만 열둘이고, 이밖에 시조집이 둘 있지만, 나로서는 결정판이란 이름으로 두 번째 것 [새벽별] 하나만 칩
니다. 시조집을 합쳐서 시집 열세권이 나온 거지요.
문: 산문집도 여러 권 있지 않습니까.
고: 도미 후에 첫 산문집 [갈매기]가 일본 도꾜에서 출판됐고, 그 뒤에 두 권이 서울에서 나왔습니다. 두 번째 것 [노피곰 머리곰]에는 문학평론도 들어있어요.
문: 최근에 출판된 명상 수필집 제목이 뭐든가요?
고: 좀 길어요. [갈밭에 떨어진 시간의 조각들]입니다.
문: 그 책 속에 교수님의 관심사와 사상이 역력히 보여요. 그밖에 번역 시집이 많지요?
고: 서울에서는 주로 영미(英美)시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나왔고, 미국에서 한국의 현대시를 영어로 번역한 시집이 세 권 있습니다.
문: 영역 시집을 좀 소개해 주시겠어요?
고: 첫 작품이 아이오와대학 출판부에서 1970년에 나온 Contemporary Korean Poetry지요. 도미 6년만에 훌륭한 출판사에서 번역시집을 내게 된 데는 나를 아이오와대학으로 불러온 엥글교수의 힘이 컸어요.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획기적인" 영역 앤솔로지로 간주돼 왔습니다. 나로서도 무척 가슴 뿌듯하게 귀중히 여겨요. 하드 카버와 페이퍼백으로 많이 팔렸습니다. 두 번째는 10년 후, 한국의 저항시선이 한영 대역으로 뉴욕에서 나왔습니다. 역시 많이 나간 모양입니다. 그리고 최근 것이 작년에 뉴욕에서 나왔지요. 한국문예진흥원의 문학 번역 지원금을 받아 가지고 한참 병석에 있는 동안에 참 열심히 작업을 했지요. 지금은 그 번역 출판 지원사업이 한국문학번역원으로 넘어갔습니다. 해방 후에 출생한 중견시인들을 추리고, 그분들의 작품을 골라서 번역한 Voices in Diversity입니다. 문선생께서도 보셨지요? 미국문학번역가협회 (ALTA)의 번역상 최종 대상작으로 뽑혀 있습니다. 상이 문젠 게 아니라 한국의 현대시를 해외에서 중하게 여겨주는 일이라면 좋지 않아요?
문: 물론이지요. 축하 드립니다. 번역 외에 선생님의 자작 영시집도 좀 소개해 주시지요.
고: 뭐 대단한 게 있나요. 내게는 1974년이 중요한 해였어요. 뉴욕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영아와 결혼하고, 내 첫 번째 영시집이 출판된 해거든요. 시집 제목은 The Turn of Zero. 뉴욕에서 나왔고, 아주 큰 문학상 후보에 올랐었지만 당시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종심사까지 못 가고 말았어요. 그후 전적으로 세계의 신화들을 소재로 한 시집과 최근 것으로 Some Other Time이 L.A.에서 나왔습니다.
문: 2001년 한해에만 선생님의 책이 세 권이나 나왔습니다. "노익장"이라 더니 고 원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네요.
고: 나 아직 늙지 않았어요.
문: 죄송합니다. 가까운 장래에 또 어떤 책이 출판될 예정인가요?
고: 당장은 내가 주재하고 있는 [문학세계] 14호가 겨울 전에 나가야 해요. 개인 저서로는 한국말 새 시집 준비가 거의 다 끝나 가는 중이고, 영시집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문: 참 대단하십니다.
고: 양만 많으면 뭐해요. 질적인 면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정리하려고 애를 씁니다.
문: 문학인생 50여년을 넘기시는 이 귀중한 시기에 문학에 대한 소신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 나는 [글마루]교실에서 가끔 청마선생 얘기를 합니다. 유치환선생의 아홉 번째 시집이 나온 무렵에 서울에서 만나 뵈었다고 기억해요. 그때 청마선생이 내게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고형, 나 이젠 점점 더 시가 뭔지 모르게 됐어요." 내가 [자유문학]에다 현대시강좌를 연재하고 있을 때였지요.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문: 그 얘기도 좋습니다만 교수님 자신의 문학관을 좀 들려 주셔야겠어요.
고: 문학이 뭐냐. 왜 문학을 하느냐. 다른 사람하고 다른 게 뭐냐. 대강 이런 질문이 나올만하지요. 내게 있어서 문학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말로 요약해도 좋겠고요. 사실은 이 요약된 질문이 최근에 [글마루]에서 내준 장기 숙제인데, 내 자신이 그 숙제를 하는 셈이네요.
문: 바로 그 점을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 문학이란 결국 인간과 인생, 사회, 자연, 그리고 우주의 총체적인 실존적 증거 같은 게 아니겠어요? 그런 증거의 호흡이 있지요. 또 그 숨결 속에 비밀이 있어요. 쓰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그리움이 물결치지요. 참되고, 선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이지요. 기도 혹은 기도의 눈물이라 할까요. 그 간절하고 뜨거운 눈물 속에 퍼져나는 상상의 날개도 한이 없지요.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을 찾아내는 눈이 감동을 일으키고, 그게 다 결국은 표현으로 고착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아주 간단하게 '문학은 발견이요 표현이다'라고 말할 때가 많아요.
문: 그런 생각들이 고박사님의 시에서 어떤 특색으로 나타나게 되는가요?
고: 50년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내 시에 여러 모로 변화가 참 많았다는 걸 알겠어요. 대단히 서정적인가 하면 지적인 면이 강하고, 현실 비판, 사회의식이 두드러졌던 시기도 있어요. 일관된 줄기가 있다면 영상--이미지, 이미저리와 상징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라 할까요. 몇 년 전부터 의도적으로 시도해온 지침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짤막한 글로 이미 공언한 대로 시
의 길이를 15행 넘지 않게 제한한다는 '단시'주의지요. 근작들은 모두 3행에서 12, 13행이고 어쩌다가 15행까지 갑니다. 최대한 압축하고 최대한 함축시키는 고통스러운 재미. 그걸 문선생도 잘 아실 겁니다. 둘째는 1920년대 이후의 서구 문예사조와 시가 현대화하는 흐름에다가 우리 시조의 현대화를 접목시킨다는 건축설계입니다. 말이 거창하지요. 물론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해볼만한 도전이라고 믿어요.
문: 최근 한국의 [월간문학]이라든지 [자유문학], 그리고 이곳 [미주문학]등에 발표된 선생님의 시에 그러한 뚜렷한 경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래 전으로 돌아가서, 혹시 특별한 영향을 받으신 면이 있을까요?
고: 글쎄요.
문: 좋아하셨던 작가와 작품을 들어주시겠어요?.
고: 젊었을 때 김기림 선생의 초기 작품을 좋아했어요.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상징시인들 모두, 중국의 이백, 인도의 타고르, 영국의 15세기 시인 존 던, 20세기 T.S. 엘리오트와 딜란 토마스, 영미 이미지스트, 다다와 쉬르레알리슴 시인들... 많네요. 대부분 지금도 좋아해요. 소설은 실존주의 계통의 작가를 계속 애독합니다.
문: 해외 문학단체와의 관계는 어떻지요?
고: 40년 이상 국제 PEN 회원이고, 지금은 미국 센터에 속해 있습니다.
문: 교수님의 대표작을 뽑아주실 수 있을까요?
고: 그런 것 없어요. 한 작가에 대한 평가라든지 대표작 선출은 남이 하는 거겠지요.
문: 재미 교포 문학의 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고: 이민문학 후기 30년 정도를 두고 보면 계속해서 많이 쓰는 문인들의 수준이 차츰 높아져 가고 있어서 기뻐요. 좀더 신선해져야겠지요. 현재로서는 개성이 약하지 않나 생각해요.
문: 교포문학의 앞날은 어떨까요?
고: 교포문학, 이민문학으로서의 특질이 뚜렷해지고, 폭과 깊이와 무게가 올라가고, 그래서 한국문학의 영역도 확대될 날이 멀지 않으리라고 기대해요. 한국말과 영어 양쪽으로 새 시대에 걸맞게 성장하겠지요.
문: 고국을 중심으로 한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고: 너무 일반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 모르는 부분도 많구요. 나는 주로 한국 현대시의 영어 번역과 [글마루] 과목중 하나로 정한 한국 현대소설분석을 통해서 좀 선택적인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내 관찰은 제한을 면할 수 없어요. 그런 범위 내에서 나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봅니다. 특히 근래에는 소재나 주제 등이 전에 비해 놀라울 만큼 자유스럽고 다양해진 점에 감탄해요. 좀더 깊은 사색, 철학이 들어있기를 기대하고, 표현기술에서 좀더 언어의 경제에 주력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문: 장시간 귀한 말씀 들려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원로시인 고 원 교수와의 대담 1
대담자: 문인귀(시인/창조문학 미주편집위원)
날짜: 2002년 10월 1일
장소: 캘리포니아주 라크레센타, 고 원 박사 자택
문: 선생님 반갑습니다. 창조문학사에서는 해외에서 오히려 열심히 창작하고 계신 원로문인들을 찾아 그분들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폭넓은 한민족 문학의 이해와 정체성을 찾고자 "재외 한국문인 탐방"을 기획하였습니다. 고국의 문인들과 더불어 선생님의 문학이 보다 넓고 깊게 이해되고 교류되기를 소망하면서 첫 번 대담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먼저 선생님의 해외 정착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미국에 오신지가 아주 오래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오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 64년 정월에 아이오와로 왔습니다. 그러니 벌써 39년이 됐네요. 내 생애의 반 이상을 줄곧 미국에서 살아온 거지요.
문: 어떻게 아이오와로 가시게 됐지요?
고: 아이오와대학에서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그 대학은 특히 문예창작으로 유명하잖아요? 아이오와 라이터즈 워크샵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지요. 그 워크샵의 대표였던 시인 폴 엥글 교수와의 만남이 나를 거기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때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의 사무국장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시아재단에서 공문이 왔어요. 필리핀의 씰리만대학에서 여름학기 문예창작 워크샵을 하고,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폴 엥글 교수가 시부문 강사로 초청돼 있다, 아시아재단에서 모든 경비를 대줄 테니 가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였어요.
문: 그래서 필리핀에 가셨겠네요.
고: 그렇지요. 니그로스라는 섬에 있는 대학 강습회에 가서 엥글 교수와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참가자들이 자기 작품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제출하게 돼있었으니까 나도 영시 몇 편을 들고 갔지요. 강습이 끝나던 날이었어요. 뜻밖에도 엥글교수가 최우수작품에 대한 상을 준다면서 고원을 불러 세우는 거에요. 얼마였었는지 잊어버렸지만 상금을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 나를 꼬셨습니다.
문: 아이오와대학으로 오라는 말이었겠지요?
고: 여러 말 말고 오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미국 국무성에서 왕복 여비,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아재단 본부에서 생활비, 대학에서는 학비 전담, 이런 결정과 절차가 본인이 모르는 새에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나는 실상 마음의 준비가 잘 안된 상태에서 서울을 떠나야 했습니다.
문: 좀 고민 하셨겠네요.
고: 그렇지요. 그보다 전에 1년간 영국 유학을 갔을 때하고는 가정 사정이 많이 달랐거든요. 그러나 결심을 했습니다. 당시의 한국 정치 상황, 사회 현실이 주는 부정적인 압박감도 내 결심에 상당히 큰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단돈 50불을 들고 프로펠러로 움직이는 비행기로 아이오와 시티라는 대학촌에 도착한 날은 내 맘처럼 무척 추운 날씨였어요.
문: 50불만 갖고 오신 이유가 있었던가요?
고: 우습게 들리지요? 그때 한국에서는 해외에 나가는 사람에게 백불까지 은행에서 바꿔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어요. 한국은행에서 50불을 바꿔달라 했더니, 창구 담당자가 참 이상하다는 어조로 그럼 나머지는 자기가 바꿔서 가져도 좋겠느냐 면서 조심스럽게 대하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문: 정말 옛날 얘기네요.
고: 아이오와의 문예창작 석사, 즉 MFA 과정은 다른 석사 과정보다 학점이 더 많이 요구되고 시간이 더 걸립니다. 그런데도 영국에서 공부한 걸 인정받고 해서 비교적 빨리, 그리고 우등생으로 일단 석사를 끝내고는 더 머물러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문제가 생겼지요.
문: 무슨 문제가요?
고: 원래 국무성의 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J visa로 왔었거든요. 계약 기간이 이미 지났으니 더 연장이 안되고 어서 돌아가라는 거지요. 그때부터 시작된 체류 신분 문제에 얽힌 곡절과 일화들이 참 많아요.
문: 그러면 J 비자 규제를 벗어나는 과정으로부터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기까지 남다른 경험을 하셨겠네요? 그 체험을 좀...
고: 지금 생각하면 그랬었구나 하는 정도의 경험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러한 절차상의 과정보다는 왜 이렇게까지 애를 써가면서 미국에 남겠다는 거냐, 왜 즉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안달인가.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많이 던지고 확실한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문: 그게 중요한 대목인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라도 미국 정착 과정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 아이오와를 떠나 국회도서관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국회의원은 "개인 법안"이라는 걸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이오와 출신 하원의원과 연결이 지어졌지요. 아무개를 6개월 이내에 출국시키지 말라. 이런 법안을 국회의원 몇 사람이 몇 번 상정해서 체류 연장이 됐어요. "연명"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몰라요.
문: 그건 일시적인 해결이었겠지요?
고: 그래요. 워싱턴 DC에서 뉴욕까지 처음 1년간 통학을 하고는 뉴욕으로 이사를 가고 해서 NYU 박사과정을 그 개인법안 덕에 마쳤습니다. 비교문학 전공이었지요. 학위논문이 채 끝나기 전에 뉴욕 시립대학교에 속해있는 브룩클린대학의 비교문학 강사로 채용이 됐어요. 인도문학과 인도-이라니안계 신화를 가르치는 자리였는데, 둘 다 자신이 없으면서도 면접에서 시침을 떼고 그럴듯하게 답을 해 가지고 미국 내 대학교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그게 또 내 체류문제에 큰 전환을 가져왔어요. 이번에는 "연명"이 아니라 아예 교환비자를 바꿔서 영주권으로 몰고 가자는 게 대학 측의 전략이었어요. 미국의 국방요원쯤 돼야 겨우 면제받는 'J' 딱지를 어떻게 떼느냐? 그때 나는 이미 조교수 발령을 받고 있었어요. 대학에서 이민국에 보낸 편지가 요란스러웠습니다. 5개국어에 능통한 비교문학 교수를 미국인중에서 찾을 수가 없다, 이 사람이야말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가지고 공문을 보냈어요. 나는 나대로 그 때에 맞게 브룩클린 출신 국회의원에게 손을 썼지요.
문: 재미있네요.
고: 일이 잘 됐습니다. "미국 국익에 이바지"할 시민으로 NASA 요원 아닌 비교문학 교수에게 영주의 길이 열렸어요.
문: 그때 바로 미국시민이 되신 건 아니지요?
고: 아닙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나라 시민이 되겠다는 결심을 오랜 후에야 하게 됐어요. 70년대 초에 뉴욕에서 내게도 교수생활 이외의 새바람이 불었지요. 고국의 유신 독재 반대, 인권운동, 김지하시인 구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도 금방 선두에 나서서 말이지요. 민주화운동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김지하의 벗'이라는 조직체의 대표로 무척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박정권이 나를 미국시민으로 만들었습니다.
문: 무슨 말씀인지?
고: 박정권의 해외 정보기관이 여러 면으로 감시하고 있는 중에 우리 부부가 한국여권 연장 신청을 냈어요. 나는 결코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에 유효한 여권을 갖고 있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부부의 여권이 몰수당하고 말았습니다. 국적을 박탈당한 거지요. 그 무렵에 유럽과 일본 등지를 여행할 때, 미국 이민국은 내게 "무국적자" (Stateless) 출입국 허가서를 내주었어요. 미국 여권 노릇을 할 수 있는 증명서지요. 미국은 정말 특별한 데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 국적 없는 미국 시민으로 대접하는 셈이군요.
고: 나는 그때, '시인은 특정 국적이 없는 세계시민이 아니냐'고 혼자 속으로 외쳤습니다. 한편으로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쾌했습니다. 그러나 수년 후에 국적이 필요해 결국 미국 시민이 되고 말았어요. 법적으로는 세계시민이 아니고 소위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거지요.
문: 특수한 얘깃거리가 얼마든지 있겠습니다만 화제를 문학 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저는 가끔 후배들한테서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요. 좀 평범하게,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왜 시인이 됐느냐는 말로 바꿔도 좋을 듯해요.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고: 시가 좋아서 많이 읽다 보니까 어느 틈에 시를 쓰게 됐다 하면 그만이겠지만, 나 같은 연배의 경우에는 민족문제가 바탕에 깔렸다고 말할 수 있지요. 나는 소년시절에 쇼펜하워를 좋아해서 일본말로 된 그의 저서를 애독했고, 니체도 꽤 읽었어요. 철학에 못지 않게 서양문학과 한국문학 책을 열심히 구해서 읽는 중에 좀 일찍부터 인생문제를 생각하는 한편으로 정의감과 애족심이 소년의 혼을 사로잡았다 할까요. 이런 사고와 감정, 그리고 좀더 높은 차원에서 정서, 서정으로 올라서게 되면 그 전체를 한데 뭉쳐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않겠어요? 이때 자연스러운 장르 선택이 시일 수밖에 없었어요. 일제 시대 중학생이었던 내 글이 '수험생' 잡지에 처음 발표된 건 일본말로 쓴 시였습니다. 오래 보관하지 않았으니까 무얼 썼는지 알 수 없지요.
문: 이런 대담에서 으레 나오는 질문 하나 드릴까요? 언제, 어떻게 소위 "등단" 하셨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도 있을 테니까.
고: 지금 얘기했잖아요? 그건 농담이고요. 우리 젊었을 때는 [문예]가 추천제를 쓰고 있었는데, 나는 추천이나 당선이 아니라 동인 시집으로 나왔습니다. 그게 1952년 12월에 피난처 부산의 협동문화사에서 출판해준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시 몇 편이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됐었지만, 우리 세 사람은 이 시집을 등단으로 잡고 있지요. 장호형은 세상을 떠났고, 이민영형은 주소를 모르고 지내네요.
문: 1952년이면 만 50년 전이군요.
고: 사실은 장호가 살아있던 몇 년 전에 부산에서 우리 [시간표 없는 정거장] 간행 50주년 기념의 모임을 가지기로 예정했었어요. 자주 가던 '파도'다방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장호는 부산 자기집으로 피난 가 있었고, 이민영은 부산 어느 국민학교 교사였으니까 나만 나그네였지요. 당시 협동문화사에서 '파랑새'라는 어린이 잡지를 시인 김용호씨 주간으로 내고 있었어요. 김선생이 나를 불러들여 취직이 됐거든요. 그런데다 출판사 사장은 이민영형이 가르치던 학생의 학부형이었어요. 이런 연유로 우리 시집이 전시인데도 아주 순탄하게 세상 빛을 보게 됐어요. 이 책의 제목을 내가 붙이고, 발문도 내가 썼습니다. 지금 수준으로는 책 같지도 않게 초라해 보이지만, 제목이나 내용 면에서 꽤 주목을 받았다고 기억해요.
문: 세분이 모일 수 없어도 50주년 기념 모임을 가지러 부산에 가실 계획이신 가요?
고: 그렇게 안될 것 같네요. 이 대담과 함께 [창조문학]이 고 원 특집을 내보내면 나로서는 그게 기념행사가 되겠습니다. 아까 얘기한대로 [시간표 없는 정거장]을 내 문단 진출의 정식 출발로 잡을 때, 2002년 12월은 곧 고원의 문학생활 50여년을 기념하는 달이 되는 셈이니까 그것으로 만족하고 말겠습니다.
문: 저희 [창조문학이] 그런 일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마침 잘 됐네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L.A.에서라도 모임을 가져야겠네요.
고: 아닙니다. 나 혼자 조용히 내 문학과 인생을 정리해보는 시간이라도 만들 생각입니다.
문: 3인 시집이 나온 뒤에 환도하시고, 그 후로 많은 개인 작품집이 나온 줄 압니다만,
고: 책이 출판된 권수는 많지요. 54년에 나온 [이율의 항변]에서부터 64년 초의 [속삭이는 불의 꽃]까지 10년 동안에 개인 시집 다섯 권이 서울에서 나왔고, 미국에 온 후 뉴욕에서 시집 두 권, 다시 서울에서 시집 4권, 신작을 포함한 시선집 하나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시집만 열둘이고, 이밖에 시조집이 둘 있지만, 나로서는 결정판이란 이름으로 두 번째 것 [새벽별] 하나만 칩
니다. 시조집을 합쳐서 시집 열세권이 나온 거지요.
문: 산문집도 여러 권 있지 않습니까.
고: 도미 후에 첫 산문집 [갈매기]가 일본 도꾜에서 출판됐고, 그 뒤에 두 권이 서울에서 나왔습니다. 두 번째 것 [노피곰 머리곰]에는 문학평론도 들어있어요.
문: 최근에 출판된 명상 수필집 제목이 뭐든가요?
고: 좀 길어요. [갈밭에 떨어진 시간의 조각들]입니다.
문: 그 책 속에 교수님의 관심사와 사상이 역력히 보여요. 그밖에 번역 시집이 많지요?
고: 서울에서는 주로 영미(英美)시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나왔고, 미국에서 한국의 현대시를 영어로 번역한 시집이 세 권 있습니다.
문: 영역 시집을 좀 소개해 주시겠어요?
고: 첫 작품이 아이오와대학 출판부에서 1970년에 나온 Contemporary Korean Poetry지요. 도미 6년만에 훌륭한 출판사에서 번역시집을 내게 된 데는 나를 아이오와대학으로 불러온 엥글교수의 힘이 컸어요.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획기적인" 영역 앤솔로지로 간주돼 왔습니다. 나로서도 무척 가슴 뿌듯하게 귀중히 여겨요. 하드 카버와 페이퍼백으로 많이 팔렸습니다. 두 번째는 10년 후, 한국의 저항시선이 한영 대역으로 뉴욕에서 나왔습니다. 역시 많이 나간 모양입니다. 그리고 최근 것이 작년에 뉴욕에서 나왔지요. 한국문예진흥원의 문학 번역 지원금을 받아 가지고 한참 병석에 있는 동안에 참 열심히 작업을 했지요. 지금은 그 번역 출판 지원사업이 한국문학번역원으로 넘어갔습니다. 해방 후에 출생한 중견시인들을 추리고, 그분들의 작품을 골라서 번역한 Voices in Diversity입니다. 문선생께서도 보셨지요? 미국문학번역가협회 (ALTA)의 번역상 최종 대상작으로 뽑혀 있습니다. 상이 문젠 게 아니라 한국의 현대시를 해외에서 중하게 여겨주는 일이라면 좋지 않아요?
문: 물론이지요. 축하 드립니다. 번역 외에 선생님의 자작 영시집도 좀 소개해 주시지요.
고: 뭐 대단한 게 있나요. 내게는 1974년이 중요한 해였어요. 뉴욕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영아와 결혼하고, 내 첫 번째 영시집이 출판된 해거든요. 시집 제목은 The Turn of Zero. 뉴욕에서 나왔고, 아주 큰 문학상 후보에 올랐었지만 당시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종심사까지 못 가고 말았어요. 그후 전적으로 세계의 신화들을 소재로 한 시집과 최근 것으로 Some Other Time이 L.A.에서 나왔습니다.
문: 2001년 한해에만 선생님의 책이 세 권이나 나왔습니다. "노익장"이라 더니 고 원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네요.
고: 나 아직 늙지 않았어요.
문: 죄송합니다. 가까운 장래에 또 어떤 책이 출판될 예정인가요?
고: 당장은 내가 주재하고 있는 [문학세계] 14호가 겨울 전에 나가야 해요. 개인 저서로는 한국말 새 시집 준비가 거의 다 끝나 가는 중이고, 영시집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문: 참 대단하십니다.
고: 양만 많으면 뭐해요. 질적인 면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정리하려고 애를 씁니다.
문: 문학인생 50여년을 넘기시는 이 귀중한 시기에 문학에 대한 소신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 나는 [글마루]교실에서 가끔 청마선생 얘기를 합니다. 유치환선생의 아홉 번째 시집이 나온 무렵에 서울에서 만나 뵈었다고 기억해요. 그때 청마선생이 내게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고형, 나 이젠 점점 더 시가 뭔지 모르게 됐어요." 내가 [자유문학]에다 현대시강좌를 연재하고 있을 때였지요.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문: 그 얘기도 좋습니다만 교수님 자신의 문학관을 좀 들려 주셔야겠어요.
고: 문학이 뭐냐. 왜 문학을 하느냐. 다른 사람하고 다른 게 뭐냐. 대강 이런 질문이 나올만하지요. 내게 있어서 문학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말로 요약해도 좋겠고요. 사실은 이 요약된 질문이 최근에 [글마루]에서 내준 장기 숙제인데, 내 자신이 그 숙제를 하는 셈이네요.
문: 바로 그 점을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 문학이란 결국 인간과 인생, 사회, 자연, 그리고 우주의 총체적인 실존적 증거 같은 게 아니겠어요? 그런 증거의 호흡이 있지요. 또 그 숨결 속에 비밀이 있어요. 쓰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그리움이 물결치지요. 참되고, 선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이지요. 기도 혹은 기도의 눈물이라 할까요. 그 간절하고 뜨거운 눈물 속에 퍼져나는 상상의 날개도 한이 없지요.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을 찾아내는 눈이 감동을 일으키고, 그게 다 결국은 표현으로 고착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아주 간단하게 '문학은 발견이요 표현이다'라고 말할 때가 많아요.
문: 그런 생각들이 고박사님의 시에서 어떤 특색으로 나타나게 되는가요?
고: 50년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내 시에 여러 모로 변화가 참 많았다는 걸 알겠어요. 대단히 서정적인가 하면 지적인 면이 강하고, 현실 비판, 사회의식이 두드러졌던 시기도 있어요. 일관된 줄기가 있다면 영상--이미지, 이미저리와 상징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라 할까요. 몇 년 전부터 의도적으로 시도해온 지침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짤막한 글로 이미 공언한 대로 시
의 길이를 15행 넘지 않게 제한한다는 '단시'주의지요. 근작들은 모두 3행에서 12, 13행이고 어쩌다가 15행까지 갑니다. 최대한 압축하고 최대한 함축시키는 고통스러운 재미. 그걸 문선생도 잘 아실 겁니다. 둘째는 1920년대 이후의 서구 문예사조와 시가 현대화하는 흐름에다가 우리 시조의 현대화를 접목시킨다는 건축설계입니다. 말이 거창하지요. 물론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해볼만한 도전이라고 믿어요.
문: 최근 한국의 [월간문학]이라든지 [자유문학], 그리고 이곳 [미주문학]등에 발표된 선생님의 시에 그러한 뚜렷한 경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래 전으로 돌아가서, 혹시 특별한 영향을 받으신 면이 있을까요?
고: 글쎄요.
문: 좋아하셨던 작가와 작품을 들어주시겠어요?.
고: 젊었을 때 김기림 선생의 초기 작품을 좋아했어요.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상징시인들 모두, 중국의 이백, 인도의 타고르, 영국의 15세기 시인 존 던, 20세기 T.S. 엘리오트와 딜란 토마스, 영미 이미지스트, 다다와 쉬르레알리슴 시인들... 많네요. 대부분 지금도 좋아해요. 소설은 실존주의 계통의 작가를 계속 애독합니다.
문: 해외 문학단체와의 관계는 어떻지요?
고: 40년 이상 국제 PEN 회원이고, 지금은 미국 센터에 속해 있습니다.
문: 교수님의 대표작을 뽑아주실 수 있을까요?
고: 그런 것 없어요. 한 작가에 대한 평가라든지 대표작 선출은 남이 하는 거겠지요.
문: 재미 교포 문학의 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고: 이민문학 후기 30년 정도를 두고 보면 계속해서 많이 쓰는 문인들의 수준이 차츰 높아져 가고 있어서 기뻐요. 좀더 신선해져야겠지요. 현재로서는 개성이 약하지 않나 생각해요.
문: 교포문학의 앞날은 어떨까요?
고: 교포문학, 이민문학으로서의 특질이 뚜렷해지고, 폭과 깊이와 무게가 올라가고, 그래서 한국문학의 영역도 확대될 날이 멀지 않으리라고 기대해요. 한국말과 영어 양쪽으로 새 시대에 걸맞게 성장하겠지요.
문: 고국을 중심으로 한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고: 너무 일반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 모르는 부분도 많구요. 나는 주로 한국 현대시의 영어 번역과 [글마루] 과목중 하나로 정한 한국 현대소설분석을 통해서 좀 선택적인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내 관찰은 제한을 면할 수 없어요. 그런 범위 내에서 나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봅니다. 특히 근래에는 소재나 주제 등이 전에 비해 놀라울 만큼 자유스럽고 다양해진 점에 감탄해요. 좀더 깊은 사색, 철학이 들어있기를 기대하고, 표현기술에서 좀더 언어의 경제에 주력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문: 장시간 귀한 말씀 들려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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