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성찰과 청음의 시학-홍문표
2003.07.28 01:27
◇ 시평
존재의 성찰과 청음의 시학
-문인귀 시인의 시집 [떠도는 섬]을 중심으로-
홍 문 표
(문학평론가·명지대 교수)
1. 허상과 실상
문인귀 시인이 시집 [떠도는 섬]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순을 맞으며 일백여편의 시를 묶어 내는 것을 보니 그동안의 문학을 총 결산하고 새로운 후반기의 인생과 시도(詩道)를 모색하려는 비장한 결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번 시집은 여섯 묶음으로 되어있다. 내용을 보건대 묶음·하나는 자아와 세계의 존재인식에 관한 깊은 성찰의 언어이고, 묶음·둘은 시간과 공간 속에 경험되는 세계의 감각적 반응이며, 묶음·셋은 시인과 더불어 사랑으로 얽혀진 혈연들, 묶음·넷은 아직도 뜨거운 가슴의 노래, 묶음·다섯은 신앙시와 동시, 묶음·여섯은 시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번 시집은 문 시인의 삶과 인생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 시인의 이번 시집을 보면서 가장 먼저 비중있게 다가오는 부분은 역시 제목이 보여 주듯이 떠도는 섬과 관련한 묶음·하나의 작품들이다.
문 시인의 시는 거울과 그림자의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거울은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성들을 그대로 반영한다. 시간적 측면과 존재론적 측면에서 다양성을 띠는 거울의 기능은 다양한 연상을 환기한다. 거울은 흔히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형식적 실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식 혹은 상상력을 상징한다. 또한 거울은 사고를 상징하는바, 이는 세계를 반영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성찰하는 도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반영하거나 자기를 반영한다는 이런 관점은 거울의 상징을 물의 상징, 나아가 나르시스 신화와 연결시킨다. 이때 우주는 인간의 의식 속에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대한 나르시스로 인식된다. 따라서 변화와 대치의 법칙을 따르는 불연속 상태로서의 우주는 거울에 반영되는 생성과 소멸의 만화경적 이미지가 된다.
한편 태양이 정신의 빛을 상징한다면 그림자는 육체의 부정적 이중성, 혹은 육체가 표상하는 악과 비열한 측면을 상징한다. 원시인들 사이에는 그림자가 또 하나의 자아, 혹은 영혼이라는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 민담이나 현대 문학 작품 속에도 이런 인식이 드러난다. 프레이저가 말했듯이 원시인들은 물이나 거울에 비치는 그의 그림자를 자신의 영혼, 혹은 살아 숨쉬는 일부로 간주한다.
이처럼 거울과 그림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시적 이미지를 시집의 화두로 삼은 것은 그만큼 자신의 성찰에 대한 충실성일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것은
네 안에 있는 나를 보기 위함이다
너에게 말을 거는 것은
네 안의 내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 [거울을 보며]
내가 없어도 무방하다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내가 없는 날
당신은,
그러는 당신은 어디 계시나요
하늘로 가버리셨나요?
- [허상에 대하여-그림자·하나]
나의 고뇌와
내가 누리고자하는 최상의 욕망과
그것들 모두의 무게와 부피와
나의 절망까지도
여과 없이 흡입되는 그날까지
묵묵히 따를
오직 하나의 존재가
나를 위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
- [실상에 대하여-그림자·둘]
나무가 나무를 만나 겹하고
내가 뛰어들어
나도 겹하고
그림자만 남고
나무는 없듯
나도 없고
그림자, 그림자가 흔들릴 때
나도, 나무도 흔들리고.
- [그림자가 흔들릴 때-그림자·넷]
문 시인의 [거울을 보며]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보고 내 목소리를 듣고자 함이다. 거울은 나의 반영이고 거울은 나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진실은 모두 거울로 현상된다. 그러나 거울은 표면만을 드러낼 뿐 그 이면까지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까지를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눈빛을 통하여 나의 고독은 자세를 고치게 되고 그 웃음을 통하여 나의 울음을 지우는 변화와 갱생까지도 모색한다. 사실 우리들 일반의 풍속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도 내면 깊이의 영혼이 아니라 표면에 드러난 감각적 현상만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문 시인은 그 표면의 인식이 아니라 그 내면의 진실, 그 깊은 심층의 자아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찰을 통하여 자아의 새로운 발전을 시도한다. 여기에 시인의 성실성이 있고 진실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거울에 대한 시학은 그만큼 철저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 시단에 거울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시인으로는 이상의 [거울]과 윤동주의 [참회록]이 있다. 이상은 [거울]에서 "거울 속에는 소리가/저렇게 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것이오//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라고 하였다. 그도 거울 속에서 단순한 현상의 인식이 아니라 그 내면의 소리까지 듣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거울에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실토하고 있다. 윤동주의 [참회록]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흘러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속에 나타나온다"고 하였는데 이 시도 자기 성찰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이들 두 시인의 거울에 대한 기대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단절감이나 슬픈 자아의 뒷모습이나 보아야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거울의 인식에 비하여 문 시인의 거울은 자기성찰, 자기반성, 자기갱신이라는 적극적인 의지와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림자에 대한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허상에 대하여]는 진실이 은폐된 거짓의 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세상의 온갖 물상들은 모두가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과 거짓의 허상들이 판을 친다. 진정한 자아가 상실된 거짓의 자아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실상에 대하여]다. 비록 세상은 허상들의 잔치로 허전하지만 그래도 실상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 수 없다. 나의 고뇌와 욕망과 그것들 모두의 무게와 부피에 절망까지도 분명해질 수 있는 실상의 현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의 긍정적인 확신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그것은 그가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는 기독교적 삶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림자와 나의 일치를 꿈꾼다. 즉 허상과 실상의 결합이다. [그림자가 흔들릴 때]는 바로 나무와 그림자와 내가 융합되는 세계를 그린다. 실상과 허상의 결합은 내면과 외면, 영혼과 육신, 현실과 이상의 일치라는 보편적 삶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림자와 내가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한 극복이고 온전한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그림자와 동행하는 존재가 된다. 그림자가 흔들릴 때 내가 흔들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2. 끝과 시작
문 시인은 그림자와의 동행이라는 허상과 실상의 일치를 위하여 다시 길을 만든다. 그는 그림자 연작시 다음에 길에 대한 작품 세 편을 배치한다. 길은 원래 자연공간을 인간의 거주할 수 있는 문화의 공간을 만든다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공간의 길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나아가서는 우주적 비밀에 접근하는 소통의 통로로 의미화 된다.
그것은
늘 겸허한 마음으로
몸을 낮추는 일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모두의 편안한 소유이다
그래서
그것은
제 몸 길이 만큼 하늘을 재고
언젠가는 오고야 말
마지막 발길을 위해
가슴 하나로 남아 있는 기다림이다.
- [길·하나]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잎에 머물던 햇살들,
따라 부를 수 없던 들판의 그 상긋한 노래들,
터널 속, 그 깊고 깊던 가슴앓이도
강바람에 날려버린 좌절된 흔적도,
구비 구비 해안(海岸)에 남겨온 발자국들까지
이어온 가느다란 숨결에
먼 빛으로 보이는 시발점始發點,
그제야 하늘은 암말 않고
고루고루 뿌려주는 별빛.
- [길·셋-종착점에 관하여]에서
[길·하나]는 그의 삶의 자세가 진솔하게 고백되어 있다. 우선 길이란 늘 겸허한 마음으로 몸을 낮추는 것이라 하였다. 모두의 편안한 소유라고도 하였다. 제 몸 길이 만큼 하늘을 재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만나게 될 그리움이라 했다. 결국 길은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도달해야하는 완성의 세계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위해서는 몸을 낮추어야한다. 마음이 가난한자가 천국을 소유할 것이라는 경전의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모두에게 편안한 소통의 깃발이다. 그러나 길이라고 해서 다 길이 아니다. 길도 길의 성격에 따라 그 기능이나 효용성에 차이가 있다. 여기에 최선의 길이니, 올바른 길이니 하는 왕도(王道)가 논의된다. 그래서 시인은 '제 몸 길이 만큼 하늘을 재고'라 했다. 길의 역량에 따라 성취되는 세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길은 그러나 목적지를 위한 것이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함으로 그 임무를 마친다. 시인은 여기서 오고야말 마지막 발길이라 했다. 가슴 하나로 남아 있는 기다림이라 했다. 그만큼 그의 시들은 마지막 세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보인다.
길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그는 [길·셋]에서 종착점의 그의 성격을 놀랍게도 시발점이라 했다. 길에 대한 성찰은 결코 공리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적이다. 그는 종착점을 향한 구도의 길을 햇살들, 노래들, 가슴앓이, 좌절된 흔적, 발자국 등으로 은유화했고, 그것은 종착점이자 마침내 시발점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지상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를 초월하는 세계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은 다시 별빛이라 하였다. 역시 시적인 결론이다.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라는 영원회귀의 초월은 결국 별빛으로 수렴된다.
3. 떠도는 섬
문인귀 시인의 존재에 대한 시적 성찰은 돌섬 연작시로 확장된다. [고도의 변]에서 [몸부림치는 섬]까지, 그리고 [올 봄에 찾는 나의 시어는]을 추가하여 구상된 돌섬의 이미지는 이 시집뿐만 아니라 문 시인의 평소의 삶과 시학이 응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융에 의하면 섬은 무의식을 표상하는 바다의 위협적인 공격으로부터 인간을 지켜 주는 피난처, 바꿔 말하면 의식과 의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융은 짐머가 유의한 것처럼 인도인들의 신념을 따르고 있다. 그들의 신념에 의하면 섬은 넓은 바다가 표상하는 무한한 비논리적인 힘이 증류된 형이상학적 힘을 상징한다. 동시에 섬은 고립, 고독,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한 바다의 요정 칼립소의 이야기가 암시하듯이 섬이 환기하는 신성은 장례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런 점을 전제로 섬과 여성의 동일성, 괴물과 영웅의 대립성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 시인의 섬은 앞에 돌을 붙인 섬이고 이는 고유한 섬의 이름이거나 돌로 되어있는 시인의 독특한 창조적 이미지로서의 섬일 수 있다.
오늘은
동쪽 바위 끝에 있던 놈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며
산술이 표백하는
그 마지막 소리를 듣는다
- [바다에 떠있는 징검다리일 뿐-돌섬·여섯]
눈길이 닿아야
물위로 솟는 가슴
지척에 두고도
구만리 그 저 편에
갈매기를 띄운다
하도 짙어버린 청감색의 수림水林은
어둠뿐이구나
섬아, 섬아,
그 자리에 없는 섬아
너 하늘에 있니?
- [떠도는 섬-돌섬·일곱]
그렇게 해서 생긴 섬은
열 다섯 해를 네 곱이나 더 살아온
막내 딸 가슴에
아직껏 동동 떠있다는데
어찌 정부자(鄭富者)집 막내딸만 그러겠습니까.
- [아직 떠도는 섬-돌섬·열]에서
밤바다에는
등불이 없었다
그래서 늘 무섭기만 했다
오, 달이 뜬다
달이 뜨는 밤
저 만큼에 목선 한 척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몸부림치는 섬-돌섬·열 하나]
문 시인에게 있어서 섬은, 융이 말하는 것처럼 의식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의지의 표상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오랜 삶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심적인 매듭일 수도 있고, 자신의 실존적 인식의 상징일 수 있다. 그런가하면 단순한 섬이 아니라 견고한 돌섬이라는 데서 그가 추구하는 미학적 이상일 수도 있다. 이 시집에서는 먼저 섬의 외로움에 대한 고백을 제시한다. 절해고도라는 말이 있는데 섬은 기본적으로 외로운 속성을 지닌다. 외로움이란 타자와 격리된 주체의 인식이다.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모두가 모여서 엉겨사는 도시적 삶이 매우 북적대는 것 같지만 개성이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대화가 단절된 고독이 있다. 그러나 고독의 본질은 유한한 세계내 존재라는 실존적 인식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고독한 것이다. 따라서 문 시인의 고독한 섬의 인식은 가장 원초적인 정서일 수 있다.
그런데 인용된 돌섬·여섯에서는 섬을 바다에 떠있는 징검다리라 했다. 징검다리는 무엇과의 연결통로다. 비록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유일한 가교다. 이쪽이 시적 주체라면 저쪽은 추구하는 세계다. 그런데 섬은 그 양쪽을 연결해 주는 중간자라는 것이다. 돌섬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면서 산술이 표백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조개껍질의 흩어짐이고 신발끈을 고쳐매는 바람이다. 매우 시적인 해석이다.
결국 돌섬의 정체성은 떠도는 섬으로 압축된다. 떠도는 섬은 외로움과 곁들여 나그네 인생이라는 에뜨랑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떠도는 섬]의 시적인 문맥은 오히려 불확정성이다. 섬은 눈길이 닿아야 물위로 솟는 가슴이지만 지척이 구만리가 되어 감지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곳은 짙은 어둠의 수림이 있을 뿐이다. 도대체 그가 소망하는 섬은 어디있을까, 꼭 찾아야 하겠지만 쉽게 접근되지 않는데 비밀이 있고 고독이 있고 몸부림이 있다. [몸부림치는 섬]에서도 섬은 등불도 없는 밤의 두려움이다. 달이 떴을 때 섬은 몸부림치는 목선이었다. 그런데 이 섬은 역사성을 지닌다. [아직 떠도는 섬]을 보면 이 섬은 6.25의 상처로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막내딸 가슴에 떠있는 상흔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적인 정부자의 경우만이 아니라 전쟁을 경험한 모두의 정신적 상처가 된다. 그렇다면 떠도는 섬은 우리들 내면에 상흔처럼 박혀있는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이처럼 문 시인의 돌섬은 다양한 상징적 언어의 숲으로 가리워져 있어 명쾌하게 감지되지 않는 매력이 있다. 다만 [올 봄에 찾는 나의 시어는]을 통하여 그 진실이 어느정도 드러나고 있다.
나의 노래는 의미를 버리고 소리만 남겨 혹은 파도가 되고 파도에 깨어지는 돌섬이 되고 그 꼭대기에 앉은 갈매기 한 놈의 그 보드란 잔등도 되고 혹은 그 잔등에 묻은 햇볕도 되고 섬 소나무 솔잎 끝에 매어 달린 이슬도 되고 굵은 주름의 섬 바위같은 그런 시어이고 싶다.
- [올 봄에 찾는 나의 시어는]에서
세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돌섬의 정체가 비교적 선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첫 연에서는 돌섬 꼭대기에 앉아 몰려오는 멸치떼와 갈매기 그 잔등에 누운 햇볕의 따스한 평화이기를 소망한다. 가장 자연스런 공간에서 평화를 만끽하는 돌섬, 둘째연에서는 사랑이나 소망의 황홀함마저도 부럽지 않은 돌섬, 그리고 인용된 마지막 연에서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하고 그냥 순수한 소리가 되고 돌섬이 되고 파도가 되고 햇볕이 되고 이슬이 되는 일체 인위가 배제된, 물아일체, 무위자연, 바로 자연과 어울어지는 순수한 본심이다. 그것이 돌섬이고 시이고 인생이고자하는 시적인 욕망이 바로 돌섬으로 형상화 된 것이다.
4. 청음의 시학
문인귀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시학은 소리를 알아듣는 깨달음의 언어다. 나이 육십이면 모든 말을 알아 듣는다는 이순(耳順)이란 말도 있지만 이는 단지 인격적인 성숙의 측면에서고 필자가 말하는 청음(聽音)은 스스로 소리를 듣고자하는 능동적인 노력과 그 내면의 소리를 깨닫는 발견을 말한다.
여기서 소리란 단순한 자연음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자연음이 아니라 말씀이었다. 소리는 의미를 반영하고, 소리는 모든 존재의 출발을 알리고, 소리는 모든 존재의 소멸을 알린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소리를 통하여 명멸한다. 소리에 의미가 있고 인격이 있을 때 이를 음성이라고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음성, 언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음성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본질이다 그러기에 창조적 음성은 바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음성에서 나고 음성에서 살다가 음성에서 죽는다. 따라서 우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음성을 듣고자 함이요. 그 음성을 깨닫고 이를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음성이란 진실이고 음성이란 계시이고 예언이고, 존재의 실상이다. 문 시인의 시적 관심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에서 마무리 짓는다.
사방에서
저렇게나 많은 자아가
저마다 고개를 내어 미는
곱기도 한 이 들판,
그래요,
온종일
당신의 숨소리를 세면서 있을라고요.
- [봄비]에서
퐁당,
퐁당,
온갖 생명들이
뛰어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천지는 이제
그 소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 [봄 이슬]에서
그의 소리는
그가 비워놓고 간 프라스틱 잔에서였다
그의 숨소리,
그의 체흔體痕,
그가 나를 위해 남겨둔 메아리였다.
- [비어있음에 대하여]에서
가슴을 열어보세요
소리가 나지요?
맑은 마음일 땐 더 곱게 울리는 소리
- [소리가 들려요]에서
미로 찾기에는 반드시
빠져나가는 길이 있다 하기에
마음놓고 접어들었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에까지 와버렸습니다
결국은
당신을 소리쳐 부르게 되었어요
오 - 주님!
- [상실喪失]
[봄비]에서는 자아가 저마다 고개를 내어미는 시력을 통하여 사물의 실상을 확인하더니 마침내 그곳에서 당신의 숨소리를 듣는다. 생명의 소리를 청음하는 것이다. 그것은 [봄이슬]에서도 그렇다. 처음엔 "그 작은 몸 가득/ 터지도록 담긴 햇살이/ 이리저리 눈망울을 굴립니다"에서처럼 시각적인 감각으로 사물을 발견하더니 마침내 온갖 생명들이 뛰어드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는 이제 천지는 그 소리로 가득할 것이라는 예언까지 한다. 그의 예민한 청력은 자연의 물상에서만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프라스틱 잔에서도 그의 숨소리와 체흔까지 듣는다. 그는 사물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서 조차 소리를 들음으로 존재를 확인하고 존재와 결합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소리는 물론 가슴을 열었을 때만 가능하다. 마음을 비웠을 때 청력은 더욱 왕성해진다. 그러나 그는 소리를 듣기만 하는 소극적 시학이 아니다. 때로는 스스로 소리를 지른다. [상실]에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당신을 부르는 적극적 목청으로 절대의 경지에 다가선다. 그의 시학은 마침내 소리의 주고 받음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문인귀 시인의 시법은 존재의 성찰이라는 진지한 시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한결같이 예리한 투시력과 열정적인 애정으로 사물을 본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사물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소리를 경청함으로 완전한 시적 통합을 이룬다.
존재의 성찰과 청음의 시학
-문인귀 시인의 시집 [떠도는 섬]을 중심으로-
홍 문 표
(문학평론가·명지대 교수)
1. 허상과 실상
문인귀 시인이 시집 [떠도는 섬]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순을 맞으며 일백여편의 시를 묶어 내는 것을 보니 그동안의 문학을 총 결산하고 새로운 후반기의 인생과 시도(詩道)를 모색하려는 비장한 결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번 시집은 여섯 묶음으로 되어있다. 내용을 보건대 묶음·하나는 자아와 세계의 존재인식에 관한 깊은 성찰의 언어이고, 묶음·둘은 시간과 공간 속에 경험되는 세계의 감각적 반응이며, 묶음·셋은 시인과 더불어 사랑으로 얽혀진 혈연들, 묶음·넷은 아직도 뜨거운 가슴의 노래, 묶음·다섯은 신앙시와 동시, 묶음·여섯은 시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번 시집은 문 시인의 삶과 인생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 시인의 이번 시집을 보면서 가장 먼저 비중있게 다가오는 부분은 역시 제목이 보여 주듯이 떠도는 섬과 관련한 묶음·하나의 작품들이다.
문 시인의 시는 거울과 그림자의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거울은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성들을 그대로 반영한다. 시간적 측면과 존재론적 측면에서 다양성을 띠는 거울의 기능은 다양한 연상을 환기한다. 거울은 흔히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형식적 실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식 혹은 상상력을 상징한다. 또한 거울은 사고를 상징하는바, 이는 세계를 반영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성찰하는 도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반영하거나 자기를 반영한다는 이런 관점은 거울의 상징을 물의 상징, 나아가 나르시스 신화와 연결시킨다. 이때 우주는 인간의 의식 속에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대한 나르시스로 인식된다. 따라서 변화와 대치의 법칙을 따르는 불연속 상태로서의 우주는 거울에 반영되는 생성과 소멸의 만화경적 이미지가 된다.
한편 태양이 정신의 빛을 상징한다면 그림자는 육체의 부정적 이중성, 혹은 육체가 표상하는 악과 비열한 측면을 상징한다. 원시인들 사이에는 그림자가 또 하나의 자아, 혹은 영혼이라는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 민담이나 현대 문학 작품 속에도 이런 인식이 드러난다. 프레이저가 말했듯이 원시인들은 물이나 거울에 비치는 그의 그림자를 자신의 영혼, 혹은 살아 숨쉬는 일부로 간주한다.
이처럼 거울과 그림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시적 이미지를 시집의 화두로 삼은 것은 그만큼 자신의 성찰에 대한 충실성일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것은
네 안에 있는 나를 보기 위함이다
너에게 말을 거는 것은
네 안의 내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 [거울을 보며]
내가 없어도 무방하다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내가 없는 날
당신은,
그러는 당신은 어디 계시나요
하늘로 가버리셨나요?
- [허상에 대하여-그림자·하나]
나의 고뇌와
내가 누리고자하는 최상의 욕망과
그것들 모두의 무게와 부피와
나의 절망까지도
여과 없이 흡입되는 그날까지
묵묵히 따를
오직 하나의 존재가
나를 위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
- [실상에 대하여-그림자·둘]
나무가 나무를 만나 겹하고
내가 뛰어들어
나도 겹하고
그림자만 남고
나무는 없듯
나도 없고
그림자, 그림자가 흔들릴 때
나도, 나무도 흔들리고.
- [그림자가 흔들릴 때-그림자·넷]
문 시인의 [거울을 보며]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보고 내 목소리를 듣고자 함이다. 거울은 나의 반영이고 거울은 나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진실은 모두 거울로 현상된다. 그러나 거울은 표면만을 드러낼 뿐 그 이면까지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 즉 내면까지를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눈빛을 통하여 나의 고독은 자세를 고치게 되고 그 웃음을 통하여 나의 울음을 지우는 변화와 갱생까지도 모색한다. 사실 우리들 일반의 풍속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도 내면 깊이의 영혼이 아니라 표면에 드러난 감각적 현상만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문 시인은 그 표면의 인식이 아니라 그 내면의 진실, 그 깊은 심층의 자아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찰을 통하여 자아의 새로운 발전을 시도한다. 여기에 시인의 성실성이 있고 진실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거울에 대한 시학은 그만큼 철저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 시단에 거울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시인으로는 이상의 [거울]과 윤동주의 [참회록]이 있다. 이상은 [거울]에서 "거울 속에는 소리가/저렇게 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것이오//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라고 하였다. 그도 거울 속에서 단순한 현상의 인식이 아니라 그 내면의 소리까지 듣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거울에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실토하고 있다. 윤동주의 [참회록]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흘러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속에 나타나온다"고 하였는데 이 시도 자기 성찰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이들 두 시인의 거울에 대한 기대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단절감이나 슬픈 자아의 뒷모습이나 보아야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거울의 인식에 비하여 문 시인의 거울은 자기성찰, 자기반성, 자기갱신이라는 적극적인 의지와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림자에 대한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허상에 대하여]는 진실이 은폐된 거짓의 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세상의 온갖 물상들은 모두가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과 거짓의 허상들이 판을 친다. 진정한 자아가 상실된 거짓의 자아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실상에 대하여]다. 비록 세상은 허상들의 잔치로 허전하지만 그래도 실상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 수 없다. 나의 고뇌와 욕망과 그것들 모두의 무게와 부피에 절망까지도 분명해질 수 있는 실상의 현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의 긍정적인 확신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그것은 그가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는 기독교적 삶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림자와 나의 일치를 꿈꾼다. 즉 허상과 실상의 결합이다. [그림자가 흔들릴 때]는 바로 나무와 그림자와 내가 융합되는 세계를 그린다. 실상과 허상의 결합은 내면과 외면, 영혼과 육신, 현실과 이상의 일치라는 보편적 삶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림자와 내가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한 극복이고 온전한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그림자와 동행하는 존재가 된다. 그림자가 흔들릴 때 내가 흔들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2. 끝과 시작
문 시인은 그림자와의 동행이라는 허상과 실상의 일치를 위하여 다시 길을 만든다. 그는 그림자 연작시 다음에 길에 대한 작품 세 편을 배치한다. 길은 원래 자연공간을 인간의 거주할 수 있는 문화의 공간을 만든다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공간의 길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나아가서는 우주적 비밀에 접근하는 소통의 통로로 의미화 된다.
그것은
늘 겸허한 마음으로
몸을 낮추는 일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모두의 편안한 소유이다
그래서
그것은
제 몸 길이 만큼 하늘을 재고
언젠가는 오고야 말
마지막 발길을 위해
가슴 하나로 남아 있는 기다림이다.
- [길·하나]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잎에 머물던 햇살들,
따라 부를 수 없던 들판의 그 상긋한 노래들,
터널 속, 그 깊고 깊던 가슴앓이도
강바람에 날려버린 좌절된 흔적도,
구비 구비 해안(海岸)에 남겨온 발자국들까지
이어온 가느다란 숨결에
먼 빛으로 보이는 시발점始發點,
그제야 하늘은 암말 않고
고루고루 뿌려주는 별빛.
- [길·셋-종착점에 관하여]에서
[길·하나]는 그의 삶의 자세가 진솔하게 고백되어 있다. 우선 길이란 늘 겸허한 마음으로 몸을 낮추는 것이라 하였다. 모두의 편안한 소유라고도 하였다. 제 몸 길이 만큼 하늘을 재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만나게 될 그리움이라 했다. 결국 길은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도달해야하는 완성의 세계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위해서는 몸을 낮추어야한다. 마음이 가난한자가 천국을 소유할 것이라는 경전의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모두에게 편안한 소통의 깃발이다. 그러나 길이라고 해서 다 길이 아니다. 길도 길의 성격에 따라 그 기능이나 효용성에 차이가 있다. 여기에 최선의 길이니, 올바른 길이니 하는 왕도(王道)가 논의된다. 그래서 시인은 '제 몸 길이 만큼 하늘을 재고'라 했다. 길의 역량에 따라 성취되는 세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길은 그러나 목적지를 위한 것이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함으로 그 임무를 마친다. 시인은 여기서 오고야말 마지막 발길이라 했다. 가슴 하나로 남아 있는 기다림이라 했다. 그만큼 그의 시들은 마지막 세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보인다.
길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그는 [길·셋]에서 종착점의 그의 성격을 놀랍게도 시발점이라 했다. 길에 대한 성찰은 결코 공리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적이다. 그는 종착점을 향한 구도의 길을 햇살들, 노래들, 가슴앓이, 좌절된 흔적, 발자국 등으로 은유화했고, 그것은 종착점이자 마침내 시발점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지상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를 초월하는 세계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은 다시 별빛이라 하였다. 역시 시적인 결론이다.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라는 영원회귀의 초월은 결국 별빛으로 수렴된다.
3. 떠도는 섬
문인귀 시인의 존재에 대한 시적 성찰은 돌섬 연작시로 확장된다. [고도의 변]에서 [몸부림치는 섬]까지, 그리고 [올 봄에 찾는 나의 시어는]을 추가하여 구상된 돌섬의 이미지는 이 시집뿐만 아니라 문 시인의 평소의 삶과 시학이 응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융에 의하면 섬은 무의식을 표상하는 바다의 위협적인 공격으로부터 인간을 지켜 주는 피난처, 바꿔 말하면 의식과 의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융은 짐머가 유의한 것처럼 인도인들의 신념을 따르고 있다. 그들의 신념에 의하면 섬은 넓은 바다가 표상하는 무한한 비논리적인 힘이 증류된 형이상학적 힘을 상징한다. 동시에 섬은 고립, 고독,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한 바다의 요정 칼립소의 이야기가 암시하듯이 섬이 환기하는 신성은 장례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런 점을 전제로 섬과 여성의 동일성, 괴물과 영웅의 대립성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 시인의 섬은 앞에 돌을 붙인 섬이고 이는 고유한 섬의 이름이거나 돌로 되어있는 시인의 독특한 창조적 이미지로서의 섬일 수 있다.
오늘은
동쪽 바위 끝에 있던 놈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며
산술이 표백하는
그 마지막 소리를 듣는다
- [바다에 떠있는 징검다리일 뿐-돌섬·여섯]
눈길이 닿아야
물위로 솟는 가슴
지척에 두고도
구만리 그 저 편에
갈매기를 띄운다
하도 짙어버린 청감색의 수림水林은
어둠뿐이구나
섬아, 섬아,
그 자리에 없는 섬아
너 하늘에 있니?
- [떠도는 섬-돌섬·일곱]
그렇게 해서 생긴 섬은
열 다섯 해를 네 곱이나 더 살아온
막내 딸 가슴에
아직껏 동동 떠있다는데
어찌 정부자(鄭富者)집 막내딸만 그러겠습니까.
- [아직 떠도는 섬-돌섬·열]에서
밤바다에는
등불이 없었다
그래서 늘 무섭기만 했다
오, 달이 뜬다
달이 뜨는 밤
저 만큼에 목선 한 척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몸부림치는 섬-돌섬·열 하나]
문 시인에게 있어서 섬은, 융이 말하는 것처럼 의식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의지의 표상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오랜 삶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심적인 매듭일 수도 있고, 자신의 실존적 인식의 상징일 수 있다. 그런가하면 단순한 섬이 아니라 견고한 돌섬이라는 데서 그가 추구하는 미학적 이상일 수도 있다. 이 시집에서는 먼저 섬의 외로움에 대한 고백을 제시한다. 절해고도라는 말이 있는데 섬은 기본적으로 외로운 속성을 지닌다. 외로움이란 타자와 격리된 주체의 인식이다.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모두가 모여서 엉겨사는 도시적 삶이 매우 북적대는 것 같지만 개성이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대화가 단절된 고독이 있다. 그러나 고독의 본질은 유한한 세계내 존재라는 실존적 인식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고독한 것이다. 따라서 문 시인의 고독한 섬의 인식은 가장 원초적인 정서일 수 있다.
그런데 인용된 돌섬·여섯에서는 섬을 바다에 떠있는 징검다리라 했다. 징검다리는 무엇과의 연결통로다. 비록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유일한 가교다. 이쪽이 시적 주체라면 저쪽은 추구하는 세계다. 그런데 섬은 그 양쪽을 연결해 주는 중간자라는 것이다. 돌섬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면서 산술이 표백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조개껍질의 흩어짐이고 신발끈을 고쳐매는 바람이다. 매우 시적인 해석이다.
결국 돌섬의 정체성은 떠도는 섬으로 압축된다. 떠도는 섬은 외로움과 곁들여 나그네 인생이라는 에뜨랑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떠도는 섬]의 시적인 문맥은 오히려 불확정성이다. 섬은 눈길이 닿아야 물위로 솟는 가슴이지만 지척이 구만리가 되어 감지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곳은 짙은 어둠의 수림이 있을 뿐이다. 도대체 그가 소망하는 섬은 어디있을까, 꼭 찾아야 하겠지만 쉽게 접근되지 않는데 비밀이 있고 고독이 있고 몸부림이 있다. [몸부림치는 섬]에서도 섬은 등불도 없는 밤의 두려움이다. 달이 떴을 때 섬은 몸부림치는 목선이었다. 그런데 이 섬은 역사성을 지닌다. [아직 떠도는 섬]을 보면 이 섬은 6.25의 상처로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막내딸 가슴에 떠있는 상흔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적인 정부자의 경우만이 아니라 전쟁을 경험한 모두의 정신적 상처가 된다. 그렇다면 떠도는 섬은 우리들 내면에 상흔처럼 박혀있는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이처럼 문 시인의 돌섬은 다양한 상징적 언어의 숲으로 가리워져 있어 명쾌하게 감지되지 않는 매력이 있다. 다만 [올 봄에 찾는 나의 시어는]을 통하여 그 진실이 어느정도 드러나고 있다.
나의 노래는 의미를 버리고 소리만 남겨 혹은 파도가 되고 파도에 깨어지는 돌섬이 되고 그 꼭대기에 앉은 갈매기 한 놈의 그 보드란 잔등도 되고 혹은 그 잔등에 묻은 햇볕도 되고 섬 소나무 솔잎 끝에 매어 달린 이슬도 되고 굵은 주름의 섬 바위같은 그런 시어이고 싶다.
- [올 봄에 찾는 나의 시어는]에서
세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돌섬의 정체가 비교적 선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첫 연에서는 돌섬 꼭대기에 앉아 몰려오는 멸치떼와 갈매기 그 잔등에 누운 햇볕의 따스한 평화이기를 소망한다. 가장 자연스런 공간에서 평화를 만끽하는 돌섬, 둘째연에서는 사랑이나 소망의 황홀함마저도 부럽지 않은 돌섬, 그리고 인용된 마지막 연에서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하고 그냥 순수한 소리가 되고 돌섬이 되고 파도가 되고 햇볕이 되고 이슬이 되는 일체 인위가 배제된, 물아일체, 무위자연, 바로 자연과 어울어지는 순수한 본심이다. 그것이 돌섬이고 시이고 인생이고자하는 시적인 욕망이 바로 돌섬으로 형상화 된 것이다.
4. 청음의 시학
문인귀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시학은 소리를 알아듣는 깨달음의 언어다. 나이 육십이면 모든 말을 알아 듣는다는 이순(耳順)이란 말도 있지만 이는 단지 인격적인 성숙의 측면에서고 필자가 말하는 청음(聽音)은 스스로 소리를 듣고자하는 능동적인 노력과 그 내면의 소리를 깨닫는 발견을 말한다.
여기서 소리란 단순한 자연음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자연음이 아니라 말씀이었다. 소리는 의미를 반영하고, 소리는 모든 존재의 출발을 알리고, 소리는 모든 존재의 소멸을 알린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소리를 통하여 명멸한다. 소리에 의미가 있고 인격이 있을 때 이를 음성이라고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음성, 언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음성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본질이다 그러기에 창조적 음성은 바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음성에서 나고 음성에서 살다가 음성에서 죽는다. 따라서 우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음성을 듣고자 함이요. 그 음성을 깨닫고 이를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음성이란 진실이고 음성이란 계시이고 예언이고, 존재의 실상이다. 문 시인의 시적 관심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에서 마무리 짓는다.
사방에서
저렇게나 많은 자아가
저마다 고개를 내어 미는
곱기도 한 이 들판,
그래요,
온종일
당신의 숨소리를 세면서 있을라고요.
- [봄비]에서
퐁당,
퐁당,
온갖 생명들이
뛰어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천지는 이제
그 소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 [봄 이슬]에서
그의 소리는
그가 비워놓고 간 프라스틱 잔에서였다
그의 숨소리,
그의 체흔體痕,
그가 나를 위해 남겨둔 메아리였다.
- [비어있음에 대하여]에서
가슴을 열어보세요
소리가 나지요?
맑은 마음일 땐 더 곱게 울리는 소리
- [소리가 들려요]에서
미로 찾기에는 반드시
빠져나가는 길이 있다 하기에
마음놓고 접어들었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에까지 와버렸습니다
결국은
당신을 소리쳐 부르게 되었어요
오 - 주님!
- [상실喪失]
[봄비]에서는 자아가 저마다 고개를 내어미는 시력을 통하여 사물의 실상을 확인하더니 마침내 그곳에서 당신의 숨소리를 듣는다. 생명의 소리를 청음하는 것이다. 그것은 [봄이슬]에서도 그렇다. 처음엔 "그 작은 몸 가득/ 터지도록 담긴 햇살이/ 이리저리 눈망울을 굴립니다"에서처럼 시각적인 감각으로 사물을 발견하더니 마침내 온갖 생명들이 뛰어드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는 이제 천지는 그 소리로 가득할 것이라는 예언까지 한다. 그의 예민한 청력은 자연의 물상에서만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프라스틱 잔에서도 그의 숨소리와 체흔까지 듣는다. 그는 사물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서 조차 소리를 들음으로 존재를 확인하고 존재와 결합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소리는 물론 가슴을 열었을 때만 가능하다. 마음을 비웠을 때 청력은 더욱 왕성해진다. 그러나 그는 소리를 듣기만 하는 소극적 시학이 아니다. 때로는 스스로 소리를 지른다. [상실]에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당신을 부르는 적극적 목청으로 절대의 경지에 다가선다. 그의 시학은 마침내 소리의 주고 받음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문인귀 시인의 시법은 존재의 성찰이라는 진지한 시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한결같이 예리한 투시력과 열정적인 애정으로 사물을 본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사물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소리를 경청함으로 완전한 시적 통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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