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2 20:20
1, 설국(雪國) / 성백군
저건 점령군이다
하늘을 펄펄 날아
허공에 소리 없는 포화를 터트리며
산야를 하얗게 덮는다
세상아, 꼼짝 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사람이든
과거도 현재도
너희는 다 포위되었다
내 나라는
신분에 귀천이 없는 평등한 나라
인간사 다 내려놓고 납작 엎드려
겸손을 배우라
결국, 저건
세상사 다시 쓰라는 하늘님의 말씀
한참 바라보다 보면
내 마음도 하얗게 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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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입춘(立春) / 성백군
가랑잎이
언 땅 위를
굴러다닙니다
겨우 내
두들기며 노크하더니
드디어 땅이 문을 열었습니다
문 틈새로
뒤란, 돌담 밑 난초가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는
“아, 봄이다!”는 탄성(歎聲)에
지푸라기 속 잔설이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제풀에 녹아 스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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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칩(驚蟄) / 성백군
개구리 두 마리
얼음 풀린 개울, 이끼 낀 너럭바위 위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
“개골”
하고 반가워 아는 체하는데도
눈만 말똥말똥
기억상실증인가 치매에 걸린 걸까, 대답이 없더니
폴짝, 뛰어내린다
참, 다행이다 싶다
저 미물이 겨울잠 자는 동안
혹한이 제 곁을 지나간 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저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곧 파문은 잠잠해 지고
물속이 편안해지면
세상 사는 데는 몰라서 좋은 것도 있다며
올챙이들 오글오글
개구리들 개골개골 제 철 만나 새끼 키운다고
봄이 야단법석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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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월 바람 / 성백군
바람이 분다
6월 바람
봄과 여름 샛길에서 이는
틈새 바람이 분다
봄 꽃향기 대신 여름 풀 내가
내 몸에 풀물을 들인다
이제는 젖내나는 연두 아이가 아니라고
짝을 찾는 신랑 신부처럼 초록이
내 몸을 핥고 지나간다
풀들이 일어서고
이파리가 함성을 지르고
나는 그들과 함께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바람을 맞으며 심호흡을 한다.
하다,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주눅 든 것이 없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잘 섞인 신록이다
서로의 공간을 내어주며 배려하는 적당한 거리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넉넉한 모습
다 6월 바람이 만들어낸 싱싱함이다
서로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하지만 그게 사는 모양이라서
막히면 안 된다고,
벌컥벌컥 봄 여름 소통하느라
6월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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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티눈 / 성백군
길을 가는데
작은 돌이 신 안으로 들어와
발바닥이 꼼지락거리며 아프다
잠깐 멈춰 서서
꺼내면 되련만 뭐가 그리 급했던지
그냥 불편한 대로 살아온 것들이
너무 많다
싸우고 화해하지 못 한 것
오해받고 해명하지 못 한 것
삐친 것, 화낸 것, 무시한 것, 교만한 것,
친구 간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질투하여 지금까지 머쓱한 것.
사람 한평생이 얼마나 된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막산 것들이
늙으 막에 티눈이 되어 마음을
콕콕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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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을 밤송이 / 성백군
가시로도
세월은 못 막는지
몸에 금이 갔습니다
누가 알았습니까?
몸이 찢어지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알밤 세 개가 머리를 맞대고 있네요
햇볕이 탐하고, 바람이 흔들고
다람쥐가 입맛을 다시는 줄 알지만
힘이 부친 밤송이, 더는
알밤을 지켜 내지 못하고
한 번 벌린 입 다물지도 못하고
땅 위에 떨어져 뒹굽니다
이제는, 가시 대신
제 자식 발자국 따라가며
세상을 살피느라 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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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단풍잎 예찬 / 성백군
묵묵히 살았다
변두리 생(生)이라 아무 말 못 했지만
기죽지 않았다. 펄펄 뛰며
초록으로 살아 냈다
꽃이 색 향을 자랑하고
열매가 자태로 으스댈 때
비바람 먼저 맞으며,
저들 보듬고 대신 맞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고생이라 여기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덕에 계절 가는 줄 몰랐다
돌아보니, 꽃도 열매도 일장춘몽,
혼자 남았다. 생의 끝자리에서
저녁노을처럼 온몸이 발갛게 물들었다
보면 볼수록 그윽하고 깊어서
풍진세상을 이겨낸 어머니의 사랑 같아서
불길도 연기도 없이
내 마음 저절로 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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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낙엽 한 잎 / 성백군
우듬지에서
낙엽 한 잎 떨어지며
말을 건넨다
그동안 잘 지냈니
아무 일 없었니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았니
생각하다가
할 말 없어 머뭇거리다가
슬쩍, 등을 내미는
바람 타고
바람이 가자는 데로 끌려가다가
이건 아닌데
여기는 아닌데, 아직
쉴 곳 찾지 못해 바닥을 헤매는
나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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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동행 / 성백군
길이
오르막이라고
내가 땀을 흘립니다
나는
그만 가고 싶은데
길은 벌써 저만치
산모퉁이를 돌아가네요
어찌합니까
나도 따라갔더니
길이 먼저 알고
산기슭에 누워 있네요
나도
쉴 곳 찾아 그곳에
묘터 하나 봐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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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 나무 / 성백군
열매도 잎도 다 털어낸
나뭇가지가
지나가는 바람 앞에 섰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빈 몸뚱이를 거친
겨울바람이 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버림이 생존의 방법임을 알았습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다 털어버리고
가볍게
욕심 없는 마음이 되어야 한결
견디기가 쉽다는
마지막 잎사귀마저 털어내며
겨울 채비를 하는 나무 곁에
나도 한번 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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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백군 : 목사, 경북 상주 출생
1980년 미국 이민,하와이 거주
2005년 4월 : 한국 월간스토리문학 시부문 신인상 등단
저서 : 제1시집 : 풀은 눕지 않는다(문학공원 시선 61. 2010년 발간)
제 2 시집 : 비의 화법(문학공원 시선99. 2015년 발간)
동인지 : 애인, 돌아온 소 외9권
수상경력 : 한국스토리문인협회, 2015년 제5회 스토리문학상
재외동포재단 , 2016년 제18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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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제에 왔다가 이곳 저곳 돌아보고 그냥 가기가 멋해서
발자국과 시 몇편 남기고 갑니다
종종 들려도 괜찮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