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밸리 시편들

2016.10.19 02:45

이성열 조회 수:146

Death Valley 시편들

                                        이성열

1 입구에서

 

! 괴괴하기 달밤의 묘지 같네

이게 만일 저승이라면

언젠가는 우리도 이렇게 당도할 게 아니겠나?

아름다운 Mt. 씨에라 풍광을 뒤로하고

구릉으로 향하는 적막한 발길

헐벗음과 그득한 고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마지막 고개 넘을 때는

만년설을 뒤집어 쓴 마운틴 위트니를

미진한 듯 자주 돌아보며 사진도 박았다

칼러 필름이 소용없는 지대

 

문명의 자취 아스팔트 길 위조차도

구렁이 잔등이에 흐르는 광채처럼

고요만이 질주할 뿐

서둘러 가도 가도 느껴지는 태만

드넓은 하늘에 가득한 감당 못할 허무

코요테처럼 자꾸 짖어보고 싶은 권태

! 소유권 주장이 필요 없는 이 넉넉한 불모

<데스밸리에서>

 

2 죽음 골짜기

 

사막은 사막이다

물이 없어 죽음 골짜기

허나 순종하는 이들에겐

차라리 포근한 품속이다

그 속에 들자마자 잠들게 하는

아늑한 숨결이다

심은 만큼 거두게 하는

우리가 몸담은 이 땅의 본성

준비된 자에게는

결코 죽음 골짜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안에선 속임수 없이

속속들이 벗게 하는 힘이 있다

풀 한포기 없는 진흙의 언덕들

산도 헐하게 헐벗었고

강과 폭포, 또한 바다조차도

그 깊이의 알몸을 드러내고 누웠다

은밀함과 부정을 허용치 않는

소금을 견디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데스밸리에서>

 

 

3 황금 골짝

 

누으런 황소 잔등처럼

친근한 황금 골짝에선

토담집 지붕들이 우리를 맞았다

 

그 안으로 들어 가

농부의 이마, 볼에 패인

굵은 진흙 골을 따라 헤매노라면

어느덧 편안한 기분 되어

시장기마저 들고

 

진흙을 깔고 앉아 점심을 먹고

고요에 눌려 잠이라도 들면

하늘에선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고

진흙이 무너져 내려

선산보다 더 아늑하게

나를 묻어 줄 것도 같다

<데스밸리에서>

 

4 바람과 모래톱

 

모래톱의 고운 선이, 그 결이

또 그늘의 은밀함이

여인 모습을 닮았다 해서

어느 수컷이 홀딱 벗은 알몸으로

그곳에 숨어들었다

그는 풍만한 육체의

은밀하고 깊숙한 골에 몸을 눕히고

따듯한 체온과 안락함에

깊은 잠으로 떨어져 버렸다

 

한 밤이 되어서야 돌연

여인의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바람으로 자신의 여자를 씻기고

더렵혀진 생채기와 오물들을 덮고

잠든 수컷의 생명마저도

사정없이 묻어버리고

새롭게 선과, 결과, 무늬로

문신을 새긴 다음

물러가는 밤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데스밸리에서>

 

5 단테의 전망대

 

탕아 죄인이 되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단테의 지옥이 이런 골짜기라면

남북으로 펼쳐진 골 한 눈에 다 보려면

물고기의 눈을 가지고도 부족할 듯싶다

 

하늘 바다보다도 더 넓고 깊게 보이는

이 터전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

내리는 이슬로 수분을 섭취하고

널브러진 소금으로 양식을 삼아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독특한

생물 되어 번영 누리고 싶다

 

천년 왕국의 도읍지로 정하고 싶다

지천에 깔린 소금을 견디는

강인한 썩지 않는 생명들로

백성을 삼고 싶다 이곳에 살고 있는

눈이 부리부리한 까마귀 독수리들로

근위병을 삼아 온갖 악의 씨들의

유입으로부터 보호받고 싶다

<데스밸리에서>

 

6 솔트크릭

 

장소는 백성들의 농업장

논에는 소금물이 흐르고

물속에는 작은 펍피쉬(Pupfish)

파리 떼처럼 맹렬한

생명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비료는 짠 소금 뿐

그걸 영양 삼아 자잘한 향나무가

수확을 올리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얀 비료더미들만

여기저기 풍요로운데

 

이곳 백성의 허락을 받은 듯

작은 풍물들의 지문이 새겨진

바싹 졸아든 목판엔

농장의 역사와 그 농사법이

방문객들을 훈몽하고 있었다

<데스밸리에서>

 

7 폭포

어라! 이곳도 홍수가 있었나? 언제?

노아의 홍수 때?

물이라곤 귀해 많은 생명이 죽었다는 데스밸리에

급류는 사정없이 흙을 무너트려

천연다리를 만들고 위에서 아래로 흐른 물을

무수의 폭포를 통해 방류한 다음에

대지를 즉각 화덕에 넣어 말린 듯

대 홍수 흔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물 없는 폭포는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 하려 하는가?

<데스밸리에서>

 

8 흙빛은 노을을 닮았다

 

흙빛 노을을 닮았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그 빛이 달라지는

부채살 모양의 절벽

 

그 절벽에서는 알처럼

자갈 돌멩이들을 낳는다

그 돌들도 어미를 닮아

제각기 색, 모양새가 다르다

 

아직 세상 풍수에 길들지 않고

각지고 모진 생김새들이

어설프지만 당당하다

 

마치 그 어설픔이

이 우주의 원형이라고

바로 자신들이 우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듯이

 

<데스밸리에서>

 

9 살아있는 계곡

 

죽음 골짜기엔 죽음이 아닌

생명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평지엔 상점이 있고 물과

돌멩이와 필름을 팔 듯

이미지를 팔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시민들이 몰려 와

물도 사고 돌맹이나 이미지를

한 아름 사서는 되게 좋아하며

제각기 밖으로 나선다

 

그들은 마을 골짜기로 올라가

캠프를 치고 그 이미지들을

카메라 통에 넣고 요리를 한다

온갖 공을 들여 요리를 하지만

이곳에선 아직 그 요리를

본 사람도 먹어 본 사람도 없다

 

그들은 오늘도 마을에 와서

물도 사고 이미지들을 사서는

카메라 통에 넣고 요리할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 데스밸리에서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6 헬리콥터 [2] 이성열 2017.01.10 168
115 감으로 열병을 앓다 [2] 이성열 2017.01.04 200
114 표정 [1] 이성열 2017.01.04 100
113 하이웨이 1번 드라이브* [1] 이성열 2017.01.04 164
» 데스밸리 시편들 이성열 2016.10.19 146
111 인상깊은 연출 [1] 이성열 2016.09.12 629
110 좁은문 [1] 이성열 2016.09.12 116
109 비애 [1] 이성열 2016.09.06 120
108 절규 [1] 이성열 2016.09.06 243
107 헐리우드 산에 올라 [1] 이성열 2016.08.31 147
106 줄서기 [2] 이성열 2016.08.22 174
105 때늦은 만찬 [1] 이성열 2016.08.19 126
104 나무는 아직도 그렇게 서 있었네 [2] 이성열 2016.08.13 116
103 당당한 새 [1] 이성열 2016.08.13 105
102 시조 자카란타 lapoesy 2016.05.09 93
101 초대장 [1] 이성열 2016.04.18 138
100 오파슴 (Opossum) 이성열 2016.04.17 71
99 너구리 이성열 2016.02.18 46
98 헐리우드의 사슴 이성열 2016.01.16 30
97 시조 상공에서 이성열 2015.12.15 56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5
어제:
3
전체:
4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