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2013.05.20 14:16

연규호 조회 수:1115 추천:56

제목: 돌아가는 길(귀향) 단편소설: 돌아가는 길(歸鄕) 1. 내 나이 금년, 66세, 후회 없이 잘 먹고 잘 살았다. 돌이켜 보면 지난 42년,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여 돈도 잘 벌고 좋은 일에 인색하지 않게 잘 썻으니 성공한 인생이요, ‘행운아(幸運兒) ’임에 틀림없다. 환자 하나라도 더 살려 보려고 응급실에서, 수술실에서 아니 병원 복도에서 잠도 못자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것은 의사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사명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철철 흘리는 환자의 피를 손으로 막아 보기도 했으며 악취가 풍기는 환자의 입에 내 입을 대고 숨을 몰아 쉬어 넣기도 했다. ‘환자를 내 생명처럼 생각하고 끝까지 살려라! 죽이면 안 된다!’라고 외치던 선배 의사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밤새, 고생한 보람도 없이 소생시키지 못하고 내 앞에서 운명한 환자도 수없이 많았다. 살려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지칠 때까지 노력은 했으나 용틀음을 하며 정작 환자가 운명하면, 입고 있던 땀으로 젖은 까운과 피가 묻은 수술 장갑을 벗어 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환자의 얼굴과 몸을 흰 모포로 덮어주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환자는 운명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환자의 아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이거, 돌파리 의사 아냐! 사람 죽여 놓고.” 험한 욕설을 듣는 순간 강한 주먹 펀치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마치 죄인처럼 비실비실 일어나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와 손을 씻으면 그것으로 내가 할 일은 끝이 난 셈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내 가슴에 일격을 가한 죽은 환자의 아들을 생각하면 한방 맞아 쓸어 진 것도 의사가 격어야 할 마땅한 수련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서 한 잠을 푹 자고 나면 죽은 환자도 내 기억에서 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명을 살리려고 했을 뿐, 내 손에 죽은 환자의 육체와 영혼은 그 후 어디로 가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아니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성직자들이 해야 할 입씨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장원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한 후, 피를 토하고 죽은 제갈공명도 그가 죽는 것은 알았으나 죽은 후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듯이 나도 내가 죽은 후에 어디로 갈 것인지는 모르고 지금까지 바쁘게 앞만 보고 살아왔다. 그러던 차에 중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하면서 ‘죽은 후에 나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대답을 알게 되었다. 천당이니 극락이니 하는 것은 입담 좋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의사들도 환자를 살리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를 필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 나는 숨을 몰아가며 죽어간 친구의 임종을 보면서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됐으며 덩달아 나도 그리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의학적으로 숨이 끊어져 가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주치의(主治醫)인 내가 한 일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잘 가거라. 자현아.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목멘 소리만 낸 것 뿐이었다. ‘이러고도 내가 의사인가?’ 죽음 앞에서 의사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피조물이었다. 2011년 4월 18일 밤 10시 12분, 내 친구, 자현(資賢)은 천곡병원(川谷病院)에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 -“오늘 저녁, 너? 당장 죽는다면, 너! 고향에 갈 준비가 됐니?”라고 그는 내게 여러 차례 질문을 했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해주고 사라졌다. ‘죽으면 고향에 갈 준비가 됐는가?’ 라는 그의 질문에, 내 대답은 사실 궁색했었다. “가긴 어디로가? 땅에 묻혀 썩어 버리는 거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앞으로 10년은 더 살터인데 벌써부터 죽는 타령을 하다니...“나는 자현을 미친놈이라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100% 절대적으로 옳았음을 오늘저녁 깊이깊이 깨닫게 되었다. * 돌이켜 보면, 나보다 덩치가 크고 건강했던 자현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이 불과 1년 전 부터였다. 65세가 되면서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은퇴 준비를 시작하였다. 근무시간을 대폭 줄였으며 반대로 밖에 나가 골프와 테니스를 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2010년 6월,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자현은 웬일인지 육체적으로 다소 힘들어 했다. 조금만 걸어도 가슴이 아프며 숨을 헐떡거리며 몰아쉬기도 했다. 체중이 약 10파운드나 줄었으며 가슴근육이 유달리 많이 빠져 있었다. 천곡병원에 두 차례 입원시켜 정밀 진단을 하고 보니 아주 희귀한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Amyotropic lateral sclerosis, ALS)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슴샘(凶腺) 암과 관련된 마이아스테니아 그라비스(Myasthenia Gravis)가 같이 발생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치료가 변변치 않아 눈에 띄게 체중이 감소되더니 끝내 걷지를 못해 침대에 눕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슴에 붙은 근육이 거의 다 빠져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폐염에 자주 걸리면서 급격하게 악화 되었다. 마침내 호흡부전증으로 오늘 밤, 천곡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은퇴 후 편안하게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20년을 살다가 85세에 죽으려고 생각을 했었는데, 불행하게도 중병을 앓다가 겨우 1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인간적으로는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 구자현(具資賢)과 나(姜錫浩 醫師)는 지난 58년간 절친한 친구,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살아 왔는데 여러모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자현은 남성다우며 모험적인 반면 나는 수줍어하며 뒤로 물러서는 편이었다. 모든 면에서 그는 나보다 앞섰기에 나는 그를 따라가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달랐다. 그는 죽어 가는 환자이며 나는 그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주치의(主治醫)이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자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잘 가라, 잘 가.’를 반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옆에 있던 백인 간호사가 보다 못해 짜증을 내며 “닥터.강! 환자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젠 공식적으로 사망을 선어하시죠.”라고 재촉을 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방문객이 아니고 환자의 주치의임을 화들짝 느꼈다. 챠트에 사망시간을 명기하고 사인을 했다. 자현은 꼭 잡았던 내 손을 힘없이 놓았다. 그리고 거친 숨소리도 잠잠해 지면서 침대 윗머리에 설치된 심전도가 밑밑한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맥박과 호흡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의 숫자도 제로가 되면서 체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금생에서 이생으로 갔음을 알리는 사망의 순간이었다. -공식적으로 사망진단서가 발부되며 호적에도 사망이라고 기록이 된다고 했다.- 2. 자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53년 봄, 우리나이 8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강원도 철원에서 살다가 1951년 1.4 후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청주근처로 피난 나왔다. 수용소에서 1년 2개월을 살았다. 휴전이 돼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건만 그들 가족은 청주에 눌러 앉아 계속 살게 돼,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하면서부터 내 친구가 됐다. 우리는 가난했다. 논과 밭에서 인분냄새가 나는 청주 북쪽 변두리, 산자락 달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자현은 나보다 체격이 좋았으며 담력도 세었기에 나는 그를 마치 보스처럼 따라다녔다. * 피난통에 내 동생, 석진(姜錫鎭)이 뛰어 놀다가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안전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앞부분, 두개골이 쑥 들어간, 함몰 골절이 생겼는데, 운이 나쁘다보니 살과 뼈에 염증이 생겼다.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못해 이젠 뇌에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열이 나고 간질을 했다. 일 년 이상을 집에서 앓다가 혼수에 빠졌다. 숨을 몰아쉬기를 이틀이나 했다. 눈동자가 위로 쳐지며 눈의 흰 부분이 밖으로 삐죽 보이며 목구멍에 찐덕찐덕한 곱이 생겼다. 며칠간 헐떡이더니 동생은 죽고 말았다. 흐느껴 울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뒤에서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며 서있었다. 자현은 신기한 듯이 동생을 뚤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죽은 동생의 모습을 본 것이 내가 본 최초의 죽음, 아니 시체였다. 나와 자현의 나이 9살이었다. 부모가 울고불고 슬퍼하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의아해 할 뿐이었다. 다음날, 뻣뻣한 장작처럼 그리고 어름처럼 차디찬 시신을 흰 광목에 싸, 사과 괴짝으로 만든 나무관에 넣고 동네 아저씨 둘이 둘러메고 우암산 산골짜기로 서둘러 가고 있었다. 죽은 동생의 이름을 소리소리 쳐 부르며 울고불고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완력으로 방에 가두었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6살짜리 동생은 불효자라고 했다. 나와 자현은 아저씨들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암산(牛岩山)으로 올라가던 아저씨들이 중간에 들른 곳이 있었다. 밤에는 귀신, 도깨비가 나온다는 상여(喪輿)집, 또는 곳집이라고도 했다. 그곳에서 흰광목을 꺼내 나무관에 덮고 작은 상여를 꺼내 아저씨 둘이서 상여 앞과 뒤에 불쑥 나온 나무로 된 손잡이를 잡고 산으로 올라가자 다른 아저씨 둘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뒤를 따랐다. 뒤 따라 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는 아저씨를 멀리하고 우리는 슬금슬금 뒤를 밟았다. 땅을 파는 소리, 곡괭이와 삽이 부딪치는 금속소리가 멀리서 훔쳐보는 우리의 귀에 울렸다. 얼마 후 나무관이 땅속으로 내려지더니 부지런히 파낸 흙을 도로 덮어버렸다. 네 명의 아저씨들은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들고 간 막걸리 병을 꺼내 벌떡 벌떡 마신 후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반대로 숨어서 보고 있던 나와 자현은 그곳으로 향해 돌진했다. 잔디를 거둬낸 곳에 붉은 흙더미가 덮혀 있었다. 감히 죽은 동생이 묻혀 있는 땅속을 다시 파 시체를 꺼낼 수는 없었다. 동생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동생은 어디로 갔는가? 땅속에?’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만나게 된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나에게 남는 질문이 있었다. -“형? 나, 죽는 거야? 나 무서워.” 피골이 상접한 6살짜리 동생이 죽기 전에 형인 나에게 한 말이었다. ‘죽는 것이 무서운가? 여섯 살짜리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면 왜 무서운가? 죽으면 아픔도 없고 평안할 텐데.’- 어둑어둑 해가지자 우리는 산에서 내려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지나야 할 곳, 상여집이 가까이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기와집도 아닌 헛간처럼 섬찟하게 보이는 상여집에서 분명, 귀신이 나오는지 번쩍하는 불빛이 보였다. “어! 귀신!” 나는 혼공하여 잠시 길가에 주저앉았다. “석호야, 정신 차려. 별거 아냐, 임마!” 자현은 나를 흔들었다. “야! 저기, 달걀귀신!” 나는 또 다시 소스라쳤다. “어, 자식. 귀신. 아냐!” 자현은 나를 들쳐 엎고 상여집을 지나갔다. “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자현이 덕분에 나는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는데 도착해 보니 아버지가 화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 어디 갔다 온 거여!” 아버지는 내게 달려와 내 등을 후려쳤다. “악!”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쓸어졌다. 얼마 후 눈을 떠 보니 자현이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내 일생동안 죽음은 공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부를 많이 한자나, 무식한 자나, 죽음을 만나면 악을 쓰며 부들부들 떨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했다. 죽은 다음에 찾아 갈 내세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가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죽음과 공포, 질병과 죽음에서 힘들어 하는 환자들을 고쳐 주겠다는 이유에서 였다. 3. 죽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통이 크고 배포가 쎄다고 생각한 자현도 어처구니없게도 ‘ 사람이 땅에 묻히면 뱀 들이 관을 뚫고 들어와 살을 뜯어 먹을 거라고’ 말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와! 자현아 너도 무서운 게 있니?” 나는 그에게 물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키가 사형장에서 겪은 ‘5분의 단상’이 기억난다. -혁명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이 되기 5분전, 그는 생각해 보았다. ‘죽은 후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러나 그는 대답을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는 사형을 면제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은 후 에 어디로 가는가를 알게 됐다고 한다. 불확실한 내세 앞에서 그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우리는 종교도 사상도 없는 무신론자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자현은 경제과에, 나는 죽음과 삶을 다루는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해부학(解剖學)공부를 하면서 나는 죽은 시체를 만졌다. 예리한 칼로 살을 째고 신경과 심줄을 절단하며 사람의 구조를 공부했다. 해부학 공부 첫 시간은 악몽의 시간이었다. 너무나 무섭고 떨렸기 때문이었다. 20개의 해부용 테이불의 뚜껑을 열면 포르마린으로 방부처리 되어 냄새를 풍기는 시체가 표정도 없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니 나의 뒤통수에 비수가 꽃히는 듯했다. 신원도 잘 모르는 거지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으면 어떤 경로를 거쳐 합법적으로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된다. 불쌍한 시체 한구 한구마다 애틋한 사연이 말라비틀어진 그들 가슴속에 간직돼 있는듯했다. 더 더욱 섬찟하고 무서운 것은 해부학 실험실 뒤편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주먹만한 자물쇠가 저승사자의 칼처럼 문 앞에 걸려 있었는데 가끔은 열어져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드려다 보면 포르마린 용액 속에 저장돼 있는 몇 구의 예비용 시체가 뒤엉켜 있는 것이 마치 지옥의 한 구석을 보는 듯했다. 코를 콱 쏘는 냄새가 눈물을 나게 했다. 냉동기 모터가 돌아가는 ‘윙윙’ 소리가 마치 원혼들이 잠을 못자고 울고 있는 듯했다. 80명 의학생들과 교수가 같이 있을 때는 그래도 덜 무서웠는데, 어쩌다 늦게 까지 남아 해부를 하다보면 나 혼자 남아 있는 때가 있었다. 나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으악’하는 느낌이 났다. 마치 옆에 있는 관의 뚜껑이 열리면서 2년 전에 죽어 길거리에 버려진 어느 처녀가 산발을 하고 입에 칼을 물고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아, 아악”나는 기겁을 하며 황급히 책가방을 싸들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순간 포르마린 냄새가 코에 확 퍼지면서 바싹 마른 어느 할아버지가 관을 열고 튀어 나와 나를 막는 듯했다. “아!” 나는 손을 내 저었다. “흐흐흐...학생, 어디가려고? 날 좀 보자고. 날 좀.” “안 돼!” 나는 노인을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진땀이 흐르며 기운이 쭉 빠졌다. 다음 날, 내 경험담을 들은 자현은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네게 말하지 않던! 너는 의사가 될 놈이 아냐. 시체를 보고 놀라다니. 그러고도 네가 의사가 돼? 의과대학에 헛 갔구나. 쯧쯧...” “그래, 나도 차라리 너처럼, 경제과에 갈걸.” 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짜식, 포부를 크게 가지라고. 큰 포부를. 시골에서 돌파리나 하지 말고...” “......” 나는 대답을 못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 데. ‘소의(小醫)는 치병(治病)이요. 대의(大醫)는 치국(治國)’이라고 했어. 그래서 나는 미국에 가서 경제학을 더 공부하여 한국 경제를 부흥 시킬 거여. 배불리 먹게 하려고 말야.” 자현은 나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그래, 나는 작은 의사가 되마. 병이나 치료하는. 그리고 너는 큰 의사가 되라! 나라를 먹여 살리는 큰 의사!” 4. 자현의 시신은 흰 모포에 싸여 천곡병원 시체 안치소로 내려갔다. 그리고 약 4시간 후, 장의사 차가 와 그의 시신을 싣고 퍼시픽 헤이븐 장의(葬儀) 안치소로 이동했다. 자현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말끔히 화장을 했으며 그의 가슴에 그가 늘 읽었던 낡은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쓰여 있는 글귀가 내 눈을 번뜩 뜨게 만들었다. ‘믿는 자의 갈 곳은 영원한 집, 고향이다.’라고. 그의 시신은 차디찼으나 오늘은 그의 찬 손에서 오히려 따스한 그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듯했다. 다음 다음날, 자현의 시신은 목사님의 축복 기도를 받으며 미리 파 놓은 3피트 깊이의 땅속으로 조용히 내려졌다. 그리고 장의사 직원들은 흙을 부어 땅을 메꾸었다. 마치 60년 전, 내 동생, ‘강석진’을 묻었듯이.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은 확실히 다른 것이 있었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요, 즐거운 집,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다.”라고 자현이 내 귀에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5. 생각해 보면 늘 붙어 다니던 우리에게도 긴 이별이 있었다. 자현은 군복무를 마치고 예쁜 규수와 더불어 미국으로 유학 갔다. “더 큰 세상에 가서 경제학을 공부하여 나라를 살리고 싶다”라는 원대한 포부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간 그에게서 소식이 뜸하더니 연락이 두절됐다. 나도 또한 군의관 3년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간 곳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비 위생적이라는 뉴욕, 부르클린에 있는 쿰벌랜드 병원이었다. 대낮에도 총성과 칼부림이 빈번한 게토에서 나의 미국 생활은 시작됐다. 고향생각이 났으며 괜히 왔다고 후회를 했다. 인턴을 그곳에서 겨우 마치고 레지덴트 수련은 생각도 못해본 남부 뉴. 올리안스에서 했다. 뉴.올리안스는 미국속의 또 다른 세계였다. 느릿느릿한 남부 흑인들이 프랑스 문화속에 뒤범벅이 된 인간 용광로 속에서 나 또한 녹아들어야 했다. 재즈 음악과 흑인들의 춤이 유달랐다. 루이지아나를 반 동강 내듯이 흘러 내려오는 미시시피 강물에서 흑인 영가가 흘러 나오는듯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마사와 미사는 어디로 갔나? 그 푸른 동산에 먼저 가셨나?“- 나는 이 노래가 너무나 좋았다. 금생을 포기하고 평화와 안락이 기다리는 내세, 고향을 그리워하는 절규의 가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흑인들은 병들어 눕게 되면 오히려 웃으면서 임종을 맞아야 할 터인데 그들도 공포를 느끼는지 벌벌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음과 공포’는 여기 뉴 올리안스에 사는 백인이나 흑인도 마찬가지였다. * 문득 친구 생각이 났다. -“고향에 가고 싶다. 자현아.” 내 입에서 패잔병처럼 볼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향? 석호야, 너 거기서 살지 말고 여기 로스앤젤스로 이사와 당장!” 자현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그럴게.” 나는 약속을 했으나 세상일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남들은 4년이면 끝내는 내과 전문의과정을 6년 걸려서 겨우 마쳤으나 전문의 시험에 계속 낙방을 하다 보니 어디에서 나를 뽑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친구에게 가서 밥 먹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뿐인가, 용기가 없으니 어디 가서 혼자 개업을 하기도 힘들었다. 마지못해 직장을 구한 곳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다운타운에 있는 빈민들을 위한 정부 진료소에서 월급쟁이 의사가 됐다. 흑인과 멕시칸들이 섞여 사는 곳으로 살벌하다 못해 무서웠으며 지저분했다. 그래도 전문의 시험공부는 계속했다. 빈민촌에 있는 병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죽어 가는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개나 소와 같은 동물로 보였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 소리를 꽥꽥 질러도 내게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죽은 다음에 흰 모포로 덮어두면 의무적으로 “환자 스미스는 몇 시 몇 분에 죽었음”이라고 쓴 후 싸인을 하면 법적으로 죽음이 확정된 것이다. 그 후 그 시체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됐는지 알바도 아니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목사와 신부가 찾아와 기도를 올리는 것도 내게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었다. “죽은 다음에, 천국 가게 하소서.” 는 내 귀에는 헛된 메아리 소리일 뿐이었다. 비록 빈민촌에서 일하는 의사라고는 하나 그래도 켄터키 루이빌에서 개업하는 백인여자 변호사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뜻밖에도 유순하며 동양적인 항가리 이민후손이었다. 신혼생활은 예상보다 즐거웠으며 아들과 딸을 낳았다. 오하이오 강이 서쪽으로 흘러 미시시피 강 본류와 만나듯이 나 또한 고향과 친구, 자현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아니 찾을 이유가 없었다. 오하이오 강이 도도히 흐르듯이 세월도 흘렀다. 6. 뒤늦게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 강 건너 켄터키 주 코빙톤에서 개업을 하였다. 좋은 집도 사고 애들 교육도 잘 시켰다. 아내가 백인이요 켄터키주에는 한국 사람도 없다보니 백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상상하기 힘든 인종 편견과 스트레스 속에서 외톨이 되었다. 얼굴을 보니 주름이 여기저기에 생겼으며 머리털은 반백이 되었다. 오하이오와 켄터키를 연결해 주는 켄터키 다리 전망대에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게 됐다. 우울, 고독, 외로움이라는 비슷비슷한 단어가 나의 전유물이 되었다. 문득 문득, 고향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 부모님은 돌아 가셨고 고향에 가도 나를 반겨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언젠가 갑자기 찾아 올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켄터키 코빙톤에 사 놓은 공동묘지에 죽어 묻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질식해서 관을 열고 튀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콱콱 막혔다. 어디론가 훌훌 가고 싶었다. 아니 백인들의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팽개쳐 두고 몸만이라도 좋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켄터키 옛집‘이란 노래가 나를 두고 한 노래였다. 문득 어린시절 같이 뛰어 놀던 자현이 생각났다. -“석호야, 지금이라도 안 늦어. 짐 싸들고 이리로 와! 내가 책임질게.” 자현의 목소리가 나의 귀를 뻥 뚤어 주었다. "그럴게. 자현아! “ 나는 마침내 친구가 사는 로스앤젤스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 아니, 한국말로 떠들고, 냄새난다고 백인들이 인상 쓰는 된장찌개와 김치, 불고기를 마음놓고 우적우적 씹어 먹고 사는 나처럼 생긴 한국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이빨사이에 붉은 고추가루가 껴도 흠이 안 되는 한국사회에 동화되고 싶었다. * 2003년 여름, 내 나이 58세, 켄터키에 있는 집과 부동산을 아내와 자식에게 다 넘겨주고 보따리 하나와 의사 면허증만 가지고 자현이 살고 있는 남가주 천곡동(川谷洞)으로 이사 왔다. 친구의 도움으로 천곡동에서 내과 개업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 풀렸다. “야! 석호야, 나 죽을 때 돈 싸가지고 가는 것도 아닌데 너를 위해 뭔들 못하랴. 같이 살겠다고 아내와 애들을 두고 나를 찾아와 준 것도 감동인데...” 막상 얼굴을 대하고 보니 자현은 여러모로 변해 있었다. 자수성가해 돈도 많았으며 상업용 부동산도 여러 채 갖고 있어 명실상부 알부자였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놀란 것은 한국에서는 나처럼 무신론자였는데, 지금은 확고부동한 기독교 신자였다. 40년 전, 한국을 떠날 때는 죽음을 무서워하며 기독교와 성직자를 부인했었는데 지금은 정반대가 됐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으며 확고해 보였다. 죽은 후에 찾아갈 고향이 있다고 했다. 육(肉)적인 고향이 아니라 영(靈)적인 고향이란다. 그리고 그는 내게 자주 물었다. “야! 강석호? 너 지금 당장 죽게 된다면 영원한 고향에 갈 준비가 돼 있니?” “영원한 고향? 그게 어딘데. 내 고향은 너도 알다시피 청주야. 암 가고 싶지.” “그래 네 말대로 청주가 네 고향이지. 그런데 영원한 고향은 청주가 아니고 낙원(樂園)이야.” “낙원? 너, 그런거 믿니?”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 물었다. “물론이지, 너도 믿어야 해. ”그는 힘을 주어 내게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고향이란, 내가 태어나 자란 곳, 청주일 뿐. 무심천(無心川)에서 송사리를 잡고 우암산에 가서 진달래 꽃을 따면서 뛰어 놀던 곳이다. 그리고 내 동생, 석진이 6살 때 죽어 묻힌 곳. 그곳에 푸른 잔디가 있었다. 그러나 자현이 말하는 고향은 청주도 아니고 철원도 아닌 다른 곳이다. 세상에서 잠시 살다가 창조주가 오라고 부르면 가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영원한 고향이요 낙원이라고 했다. “자식, 웃기는 구먼. 그동안 종교에 미쳤군. 고향도 모르는 녀석” 나는 쓴 웃음을 지었었다. 나는 지난 30여 년, 뉴욕, 켄터키 그리고 오하이오에서 너무나 바쁘게 살았기에 종교도 없이 살았음은 물론, 오히려 기독교 신자들을 은근히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 신자들이야말로 가식적이며 체면치례를 하는 광적인 집단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평화니 안식이니 하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는데 실제 행동하는 것을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안 믿는 사람보다 더했기 때문이었다. 독생자 예수도 십자가를 지고 죽기 전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창조주에게 ‘이 쓴잔을 내게서 거두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도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단 말인가? “죽음? 나 두렵지 않아. 죽은 후, 나는 더 좋은 천국에 가는데 왜 두려워 해. 왜 떨어?”라고 자현이 큰 소리를 쳤을 때 나는 이 친구 정말 돌아도 한참 돌았구나. 허풍이구나. 너 죽을 때 보면 알지. 그 때도 이런 소리를 하며 죽을 지...그래 너 죽을 때 보자. 네가 정말 평안하게 가면 나도 네가 믿는 그 예수를 믿으마. 라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7. -“어느 부자가 곡간에 곡식을 가득히 쌓아두고 심히 흡족해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했으나 하나님이 부자에게 이르되,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던 것처럼 “강석호! 너도 오늘밤 하나님이 너의 영혼을 거둬 가신다면 지금까지 벌어둔 돈을 다 버리고 너는 낙원에 갈 수 있겠느냐?” 어느 무더운 저녁 테니스를 치는 도중 땀을 닦으며 자현이 뚱딴지 같이 물었다. “또 시작이다. 또. 야! 집어 쳐!” 나는 불쾌한 듯이 대답을 했다. 의사해서 벌은 돈은 죽으면 남의 것이 된다고 하며 죽은 후에 찾아갈 고향집, 낙원에 가려면 ‘우리 인간을 위해 대신 죽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정말 준비됐냐?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고?” 나는 비아냥거렸다. “물론이지, 석호야. 나는 언제 죽어도 하나님이 계신 낙원에 갈 준비가 돼 있어.” 그리고 그는 이번에는 한 술 더 떠 찬송, 한곡을 불렀다. ‘짜식, 정말 너, 죽을 때 보자. 그 때도 이딴 소리하며 찬송을 할 수 있을까? 못하지. 짜식 괜히 가식과 위선, 그리고 웃기는 거지.’나는 자현의 행동을 광적인 종교라고 단정했다. 비록 죽마고우지만 정신병자라고 생각을 했다. * 테니스를 치고 돌아 온 그날 저녁, 운이 나쁘게도 천곡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늙은 환자의 임종이 있었다. 새벽 두시에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84세 된 어느 목사님의 어머니 되는 진실한 기독교 신자의 임종이었다. 아주 경건하고 신령한 할머니 환자가 죽음이 임박해 지자 악악 소리를 치며 침을 질질 흘리면서 눈을 흘키더니 폭 고꾸라져 죽었다. 평소에 보았던 그 신령한 모습이 아니라 사단의 얼굴을 한 악마 같은 얼굴이었다. * 정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3시 반이었다. 잠을 자려고 애를 써도 잠에 들지 않았다. 임종한 그 할머니가 악을 쓰다가 돌아가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 나도 그녀처럼 악을 쓰다 죽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걱정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65세, 그동안 수많은 목사 신부의 성경강의를 들었건만 나는 감동을 받지 못했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잘난 의사라서? 돈을 잘 벌어서?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놈의 천당과 지옥이 있나? 밤새 뒤척이다 얻은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사람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자연의 법칙(自然法則)이란? -봄이 되면 나무 잎새가 파랗게 자라나고 여름이 되면 큰 잎새가 돼 나뭇가지를 가리우고 가을이 되면 큰 잎새는 하나 둘 땅에 떨어져 썩어 거름이 되며 겨울에는 눈에 덮혀 버리는 것...그것이 인생이요, 자연의 법칙이라고. 다음해 봄이 되면 잎새가 다시 돋아나듯이 모든 것이 반복되는 것. 금생다음에 내세가 있다는 기독교나 불교 따위를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현을 내가 좋아 한다고 해도 종교 문제에서는 달랐다. 8. 2010년 8월, 우리 나이 65세. 드디어 지루하고 힘들었던 미국에서의 직장을 거두고 명예롭게 은퇴를 했다. 모든 것이 후련했다. 은행 구좌에 매달 일정액의 연금이 입금되어 우리는 풍족한 마음으로, 그동안 일 때문에 바빠서 못했던,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둘 해보기 시작했다. 골프. 테니스. 걷기, 산행, 컴퓨터, 사진 배우기 손자 손녀와 같이 놀아주기. 아들 딸 며느리 만나기...그리고 친구 만나기....아, 도서관에도 가야지..... 갑자기 한꺼번에 다 한다면 너무 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은퇴를 즐겨야 할, 자현은 계속해서 피곤해 하며 살이 더 빠지고 있었다. 2-3개월 사이에 15파운드나 빠졌으니 몰골이 완전히 병색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은퇴하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했다. 곧 회복이 될거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인 내 눈에는 혹시, 당뇨병, 갑상선 항진증, 소모성 질환,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암이라도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중이 20파운드가 빠지고 보니 바지가 헐렁거렸으며 힘이 들고 땀을 많이 흘리며 숨이 찬듯했다. 나는 보다 못해 억지로 자현을 병원에 입원시켜 검사를 시작했다. -혈액검사, 소변, 대변, X-레이, 위 장 내시경, 복강 단층 촬영, 그리고 뇌 단층촬영 등. 그러나 모든 결과는 정상이었다. “자현아? 모든 결과가 정상으로 나왔어, 근육통이나 만성 피로군 같아. 암이 아니니 일단 퇴원하기로 하자. 모든 게 다 정상이니까. 잘 먹어야 체중이 늘지.” 우리는 정상임을 자축했다. “너? 돌팔이 아냐?” 그는 안도의 숨을 쉬며 농담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증상은 조금도 좋아 지지 않았다. ‘아닌데...’ 나는 자현에게 다시 입원해 정밀 검사를 더 하자고 했다. 강경하게 거부하는 자현을 억지로 설득해 병원에 다시 입원 시켰다. -역시 복부 뇌 등의 단층 촬영은 정상이었다. 그런데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병명은 생각지도 못했던 신경과 의사, 닥터 첸(Chen)이 내려줬다. “닥터.강? 아무리 봐도 구자현 환자는 루. 게릭( Lou Gerrik, Amyotropic lateral Sclerosis, 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이거나 흉선 암과 관련 있는 마이아스테니아 그라비스(Myasthenia Gravis) 같습니다." 주: 루 게릭,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병은 척추의 질환으로 몸의 근육이 줄러들며 가슴 금육이 퇴화되어 마침내는 호흡부전증으로 갑자기 사망하는 병으로 뉴욕 양키 야구팀의 강타자 루 게릭의 이름을 따서 지은 병으로 예후가 아주 나뻐 1-2년 사이에 비참하게 죽는다. 주:마이아스테니아 그라비스는 흉선에 나오는 홀몬으로 인해 근육의 힘이 없어지며 근육의 마비가 오는 병임. 내과 의사인 나도 놀랐다. 왜? 루게릭병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자현에게 무어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로 나쁜 병인데. -문득 생각나는 루 게릭 환자들이 눈에 떠올랐다. 뉴 올리안스 원호병원 4층 컴컴한 구석방에 호흡기를 달고 사는 루. 게릭 환자가 셋이 있었다. 그리고 오하이오 신시내티 대학병원 7층, 쾌쾌한 냄새가 나는 구석방에 역시 호흡기를 달고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루 게릭 환자가 둘이 있었다. 팔과 다리근육의 힘이 약해 일어서지도 못하고, 얼굴 근육이 약해 말도 못하였다. 식도로 내려가는 근육이 약해 먹지를 못해 위에 구멍을 뚫어 영양분이 있는 음식을 넣어 주었다. 아니면 간호사가 떠 넣어주는 미음이나 먹으니 바싹 말라있었다. 게다가 방광과 괄약근의 힘이 없어 소변대변도 제대로 보지 못해 모두 받아 내야 했다. 그뿐인가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갈비뼈(늑골)에 붙어 있는 근육이 없어 숨을 쉬지 못해 산소 마스크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호흡기계를 부착해야 하루하루를 지탱할 수가 있었다. 조용한 방에 “추-추-, 푹-” 마치 기관차가 소리를 내듯 호흡기계가 일분 간에 12회씩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루 게릭 환자들은 눈을 감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현도 그렇게 컴컴한 방구석에서 인공호흡기에 매달려서 살다가 어느날, 호흡 부전증으로 죽어야 한다니... * 이 진단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누구에게 말을 할까? 자현에게? 아니지 아내에게. 나는 밤새 고민, 그리고 고민을 하다가 아침이 돼 진료실로 출근을 했다. 아무래도 부인에게 먼저 설명을 하는 편이 좋을 듯 싶어 전화를 걸어 이 엄청난 병의 진단을 그의 아내에게 설명해 주었다. 의사가 아닌 그녀에게 루게릭 병은 이해하기 힘든 병이었으나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치료약도 없다면, 그냥 죽는다는 병이군요?” 자현의 아내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간호를 잘한다면 2년은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덧부쳤다. 그날 오후 자현은 아내의 도움을 받아 나의 진료실을 찾아왔다. 며칠 전과 비슷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웃음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발 달린 지팡이를 집고 겨우 겨우 찾아왔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자 겪한 감정이 북 바쳤다. 무어라고 그에게 진단을 설명해 주어야 하나? “야! 석호, 진단 결과가 나쁘다고?” 그는 큰 소리로 물었으나 워낙 몸이 약하다보니 개미 목소리 같았다. “어-너무 과로하다 보니 신경과 근육에 이상이 생겨 만성 피로군(Fibromyalgia)이란 병이 생겼네.” 나는 엉뚱한 진단을 말해 주었다. “그럼, 루게릭은 뭐고?” 그는 이미 아내를 통해 병명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자현아-” 순간 나는 내 눈에서 주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느끼고 있었다. “짜식. 울긴. 의사가 환자 앞에서 울면 환자가 어떻게 너를 믿고 따라 가냐?” “사실... ” 나는 다시 한 번 울먹였다. “알았어. 루 게릭” “......”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계속 울먹이고만 있었다. “사실이구나. 나도 생각해 봤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찾아 봤어. 그런데 석호? 너 울긴 왜 우니? 지난 66년, 나 잘살았어. 일도 열심히 했고, 풍족하게 살았어. 더구나 너를 만나 즐거웠어. 너를 만난 것은 내게는 행운이요, 하나님의 은혜였어. 이제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니 아무 말 말고 내 고향으로 찾아 가는 거야. 가서, 더 행복한 생을 누리는 거다. 그러니 걱정 말고 내게 인생을 정리할 시간을 좀 달라.” “.......” 나는 쇠뭉치로 한방 맞은 듯 한 느낌이었다. 그의 입에서 원망, 후회, 분노의 말이 없었고 오히려 감사하다니.... 자현아 너는 어떤 사나이이기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냐. 물리치료와 영양공급을 잘하면 근육이 좋아질 뿐 아니라 걸을 수도 있으니 노력하자고 나는 자현에게 용기를 주었다. 순간 그는 내게 말했다. “석호? 산소를 주고 호흡기계를 이용하면 1-2년간 산다고 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네. 그냥 있는 대로 두게. 하나님이 오라고 부르시는데 몇 개월 더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네.” “........” 나는 그의 결단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의지와 믿음을 볼 수 있었다. * 루 게릭병은 흔히 생각하는 낭만적인 병은 아니다. 호흡기계에 의존하다 어느날, 살며시 죽는 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죽는 과정 자체가 고생스러운 길이요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천로역정이다. 폐염, 천식, 골절, 변비, 위장 협착, 소변 불통등...수많은 합병증과 싸우다가 가슴 통증 그리고 기관지 협착 등으로 숨을 못 쉬고 죽어야 하는 긴 여정이다. 그러기에 자현도 여러 차례 천곡병원 응급실, 중환자 실 그리고 입원실을 오갔다. 그러나 그는 재활병원에 가기를 거부하고 집에서 죽기를 원했다. 그것은 어려움을 초월한 그의 아내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자현을 안 이래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강한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죽기 일개월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나와 단둘이 있었다. 주치의사인 내 손을 꼭 잡고 그가 한말이 내 머리에서 왕왕 떠 오른다. -“석호야! 잘 들어라.” “어, 그래.” 나는 의아해 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했어. 나는 보지 못하는 내세, 천국을 늘 바라보며 살았어. 그러기에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천국에 간다네. 죽기 전에 네게 하나만 부탁하자. 나 죽은 후 홀로돼 외롭게 지낼 내 아내를 잘 돌봐 주기 바란다. 꼭...너만 믿으마...그리고 너도 천국을 소망하고 살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그는 내 손을 더 꽉 잡고 울기 시작했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자현의 눈물이었다. “그래, 약속하마. 자현아.....” 나도 눈물을 흘렸다. 엄청난 믿음이었다. 나 같은 범인은 감히 생각도 못해본 그런 믿음이었다. 죽음과 공포를 초월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실상을 눈에 보는 믿음, 그리고 당당하게 죽어가는 그의 행동 앞에 나는 작은 어린아이가 되었다. ‘지난 66년, 같이 웃고 울었던 친구가 소유한 그 믿음, 바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나도 갖을 수 있어. 그와 나는 언제나 같았으니까.’ 나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 자현은 예상대로 호흡기계를 거부했다. 고통스럽더라도 자연스레 죽고 싶다고 했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숨이 차도 그는 찬송을 불렀다. 4월 18일 저녁, 나는 마지막 회진을 7시에 했다. 그의 손을 잡고 찬송을 불러주는 것이 나의 회진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왔다. 하루의 일과가 나를 녹초로 만들었다. 너무나 피곤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순간 천곡병원 간호사가 내게 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30분 전까지도 괜찮던 환자 자현이 갑자기 숨을 몰아쉰다고 했다. “석호, 인공호흡은 하지 마라. 그냥 천국에 가려니까..”라고 했던 그의 부탁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자현을 보낼 수가 없었다. 간호사에게 동맥에서 피를 뽑아 산소 측정을 하고 산소를 더 올려 주라고 한 후, 인공호흡기계를 준비하라고 부탁한 후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쁜 숨을 쉬고 몰아쉬고 있었으며 죽어 가고 있었다. “닥터.강? 산소 측정치가 여기 있습니다. 산소의 농도가 아주 낮군요. 호흡기를 걸읍시다.” 어느새 달려 왔는지 호흡기 내과 동료의사가 제안을 하며 호흡기를 걸으려고 했다. “잠간! 닥터. 존스. 그냥 두십시오. 호흡기는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환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아주 평안하게...” “예? 닥터. 강! 환자를 죽이렵니까?” 닥터 존스는 이해하기 힘든 듯이 나를 쳐다봤다. “알고 있습니다. 내게 맡기십시오.” 나는 죽어가는 자현의 손을 잡았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했듯이 그가 바라고 소망하던 그의 고향, 낙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현아! 잘 가거라. 나도 너를 따라 가마. 네가 간 그 고향으로.” 자현은 깊은 숨을 몰아쉬더니 내 손을 사르르 놓았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심전도는 일직선을 긋고 있었으며 맥박은 제로를 가르키고 있었다. -퍼뜩 내 눈에 활동사진처럼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푸른 잔디가 있고 시냇물이 흐르는 무심천에서 자현과 더불어 고기를 잡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암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꺽으며 유쾌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순간, 60년 전, 땅속에 묻혔던 내 동생 석진의 모습이 보이더니 자현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자현 형? 이리로 오소. 고향을 찾아 오셨군요. 그런데, 하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여기가 아니고 저쪽이요. 형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같이 가십시다.”라고.- * “닥터.강! 무엇을 하십니까? 환자는 운명했습니다. 어서, 환자의 사망을 선언하시고 여기 서류에 사인을 하셔야죠!” 백인 간호사가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예...” 나는 퍼뜩 놀랐다. 화가 난 듯한 백인 간호사가 퉁명스럽게 내민 서류에 “환자, 구자현. 2011년 4월 18일 오후 10시 12분. 사망하다.”라고 쓴 후 “주치의, 내과 강석호”라고 서명을 했다. 그리고 그 밑에 추신을 달았다. “환자. 구자현. 돌아가는 길로 갔음.” 소설 끝. 주: 이 소설은 2011년 2월8일에 소천한 죽마고우 “H”를 생각하며 쓴 자전적 소설임. 실제와는 많이 다름. 저자: 연규호. 소설가. 내과 의사. 연세의대 졸업. 미국 내과 전문의 PEN(USA & Korea) 회원. 미주, 한국 문협 소설가 협회 회원. 미주 펜 문학상 수상(소설) 연세의대 동창회 공로상(문학) 미주 장한 연세인상 장편소설, 안식처외 13편 www.mijumunhak.com/yunkyuho kyuhoyun@yahoo.com 714 636 0133(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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