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혼의 침묵

2013.06.22 13:29

연규호 조회 수:484 추천:45

단편 소설(브라질-화일이름) 제목: 근친혼(近親婚)의 침묵(沈黙) 1. 오늘 새벽 4시 30분, 뉴. 포트시(New Port city. 칼리포니아 소재)에 있는 호그(Hoag) 병원 중환자실에서 66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췌장암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소아과 여의사 김정순(金貞順)씨의 영혼이 바닷가 어디에서 나를 간절히 그리고 애절하게 부르고 있는 것 같아 저녁 해가 바닷물 속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는 해안으로 무작정 자동차를 몰고 갔다. 가파른 해안 절벽위에 깡충 머리를 깎다 만 것 같은 야자수 나무 꼭대기에 얼기설기 붙어 있는 부채처럼 생긴 길고 긴 나무 잎사귀들도 죽은 사람을 기억 하듯이 슬픔을 참지 못하고 꺽꺽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듯 했다. ‘인생은 외로운 것, 그러나 즐거움도 친구처럼 따라다닌답니다. 내 일생은 마치 연어의 일생과도 같았습니다. 작은 샛강에서 태어난 연어새끼는 어머니의 시체를 먹고 자란답니다. 결국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자식에게 주고 간다는 거지요. 숨겨진 비밀은 가슴에 묻고.’ 선배, 김정순씨의 마지막 말이 내 귓전에서 가물가물 메아리치고 있었다. ‘숨.겨.진.비.밀.은. 가.슴.에. 묻.고.’ 바다 멀리, 수평선에 예리한 칼로 살뚝 잘려 반쪽 둥박처럼 생긴 태양이 찌그러진 모자가 돼 바다 밑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었다. 순간 붉은 동백꽃이 피를 왈칵 토하듯이 섬광이 번쩍이고 난 후 세상은 순식간에 캄캄해지고 말았다. ‘아! 인생도 저렇게 가는구나. 저렇게. 가슴에 묻은 비밀을 저토록 토해 내면서. 저 멀리 캄캄한 암흑뒤편으로.’ 나는 앞뒤를 구분하기 힘든 바닷가 백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내 손에 잡히는 작은 돌들과 모래를 바다를 향해 쓰라렸던 과거를 분풀이 하듯 힘껏 던져 보았다. 순간 미소를 짓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멀리 지평선에서 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지난 몇 년, 마음속 깊이 꽁꽁 간직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비밀을 내게 전해 준 것이 마치 앞에 가로막혔던 절벽을 헐어 버린 것처럼 시원했는지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배님.” 나는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뉴.포트 해안을 향해 크게 떨리는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거친 파도 소리와 날개를 다쳐 집에 돌아가지 못한 갈매기의 울음소리뿐이었다. * 2006년 여름, 한국에서 소아과 의사 직을 은퇴하고 미국으로 이민 온 대학 2년 선배 부부가 나를 찾아왔다. 개업의사는 보통 70세가 돼야 은퇴를 하는데 어찌된 셈인지 62세에 은퇴를 하고 따듯하고 살기 좋다는 칼리포니아 실비치(Seal Beach) 은퇴 촌으로 이민 왔다고 하며, 이곳에 사는 동안 그들의 건강을 책임져 줄 주치의사로 가데나(Gadena)에서 개업하고 있는 나를 지목했다. 졸업한지 어느새 40년이나 되었지만 우리는 보자마자 서로를 알아보았는데 그동안 너무나 다른 세월을 보냈음을 알고 놀랐다. 선배는 한국에서 젊은 세월을 보내고 늙은 나이에 은퇴하여 미국으로 와 여생을 보내고자 하는데, 나는 미국에서 은퇴하면 반대로 한국, 고향으로 돌아가 논밭을 돌아다니며 메뚜기도 잡고 냇물에 가서 송사리도 잡고 싶은데..... 선배의 남편은 풍채도 인품도 좋아 보이는 호인으로 부인이 간절히 원해서 운영하던 사업체를 잠시 아들과 딸에게 맏기고 2년만 실비치, 은퇴 노인촌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미국이 썩 맘에 내키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사실 나도 노인촌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으니까.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흰 노인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면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선배님? 최선을 다해 건강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혜어졌다. 2. 그러나 김정순 선배가 미국으로 갑작스레 이민 오게 된 데는 숨겨진 또 다른 진짜 이유가 있었다. 소아과 전문의사로, 성공한 사업가로 부자동네, 강남에서 큰 아들(1974년생, 최용식, 결혼), 딸(1976년생, 결혼) 그리고 막내 딸(1979년 생, 최용연, 미혼)을 두고 화평하게 살아왔는데, 2003년 여름, 브라질에서 온 젊고 유능한 교포 청년이 SM 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이 기족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1955년, 한국과 브라질은 수교를 시작했는데 한국은 브라질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일인당 수입(GNP), 교역량도 열세정도가 아닌 빈곤국가와 부강국가의 수교였다. 못살기에 브라질로 이민을 갔었다. 그러나 2003년에 와서는 한국의 수출량이 브라질을 따돌렸으며 GNP도 엇비슷하게 가까워진 상태로 이젠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역이민을 하는 형편이 됐다. - 2003년 5월. 브라질에서 온 훤칠하게 잘 생긴 교포청년이 신입사원으로 특채돼, 선배의 아들이 과장(科長)으로 근무하는 해외수출과 과원으로 발령받아 왔다. 멀리 상.파올로 대학교를 나온 재능 있는 28세(1975년 생)의 미혼청년으로 고국에서 일하고 싶은 열정으로 SM회사에 원서를 내어 특채됐다. 교포 2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폴투갈어(브라질),스페인어 그리고 영어를 아주 완벽하게 구사함으로 고위층에서 특별히 최용식의 부서로 편입시켰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이철진(李哲眞, Carlos Lee), 6피트의 훤칠한 키에 180파운드의 몸무게를 가진 아주 건장한 청년이었다. -1963년, 제 일차 브라질 농업이민자로 한국을 떠났던 젊은 이민자의 2세인 그는 부모님이 일구어 놓은 사업체를 포기하고 발전된 조국을 동경해 찾아 왔다고 했다.- 최용식 과장은 이 청년을 보는 순간 호감을 느꼈으며, 그를 통해 잘 모르던 브라질을 이해하게 됐다. -브라질은 미국이나 중국과 비슷한 영토를 가졌으며 인구도 1억천만이나 되었다. 게다가 광물이 풍부하여 신흥 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브라질에는 엄청난 수의 교포가 자동차, 봉제, 페인트, 세탁소등의 사업체에서 성공을 했으며 2세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 뜻밖의 만남은 새로운 길을 만든다고 한다. 선배의 막내 딸, 최용연은 명문대학을 나와 시립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며 대학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방년 24세의 미인이었다. 비교적 큰 키에 맑은 눈동자에서 풍겨 나오는 순수한 여성상이 남자들에게 매력적이었다. 그것보다 더 호감이 가는 것은 보조개 주위에 있는 근육이 특별히 발달이 됐는지 늘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선배의 가정은 행복과 웃음이 넘치는 모범 가정이었다. 최 과장은 기대했던 것 보다 아주 훌륭하게 일처리를 하는 교포 청년을 우연한 기회에 집으로 초대를 했다.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이철진과 최용연은 간단한 인사를 하게 됐다. 최용연은 교포 2세가 조국을 찾아 온 것이 신기하다고 느꼈으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교포 청년은 최용연을 보면서 “와!”하는 감탄을 하였다. 역시 조국이 좋은 곳이구나. 남미에서 보는 스페인, 인디안, 그리고 혼혈인(메소티조)이 아닌 순수한 한국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인연이 되려는지, 교포청년은 한국을 더 자세히 알기위해 인근에 있는 시립도서관을 자주 방문했다. 마침 근무 중인 사서, 최용연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게 됐다. 뜻밖이었으나 인연이었다. 책을 찾아 도서관에 오는 교포청년이 좋았다. 믿음직해 보였다. 몇 차례 만나다보니 서로의 마음을 열게 됐다. 최용연은 브라질과 포르투칼에 흥미를 갖게 됐다. 반면 교포청년은 한국에서 마음껏 조국을 만끽하다보니 배우자만큼은 본국 아가씨를 만나고 싶었다. 교포에 대한 피상적이며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게 된 것도 그동안 진지한 대화 덕분이었다. 이민자들은 우물 안 개구리같은 우리보다 나은 선구자요 개척자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이철진이란 청년을 보더라도 한국, 브라질, 스페인 그리고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둘의 데이트도 점점 양성적이었으며 부모님과 오빠의 찬성을 암암리에 얻고 있었다. 이철진은 최용연에게 고백을 했다. ‘한국으로 찾아온 것은 인연이요 숙명이라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부라질에 있지만 그들의 영과 혼은 여기 한국에 있다고 했다. 최용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운명과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했다고. 비록 그의 사랑을 안 받아 준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할 거라고.‘ 그들은 만나 사귄지 약 10개월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2004년 10월. 둘은 브라질로 가 시부모가 될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서울과 정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은 기후도 정반대였다. 브라질은 따스한 봄날이었다. 시아버지가 될 이진경씨와 시어머니가 될 심은순씨를 만나보니 그들은 가난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고 멀리 외국으로 튀어나가고 싶어서였음을 알게 됐다. 작은 한국 속에서 걱정 없이 밥이나 먹으면서 안주하려는 소승적인 마음을 버리고 더 넓게 그리고 진취적으로 성장해 가는 교포들은 넓은 브라질 대륙에서 마음껏 심호흡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3. 2005년 5월. 모란이 피고 장미가 피기 시작한 따스한 봄날, 남산 중턱에 있는 하야트 호텔로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의 약혼을 축하하려고 모여들고 있었다. 멀리 브라질에서 온 이진경부부와 한국 사돈이 되는 김정순씨부부는 신랑신부를 가운데 두고 양편에 가지런히 앉았다. 몹시 기뻣다. 약혼식은 화기애애했으며 즐거운 덕담만 오고 갔다. 서울 강남에서 소아과의사로, 제재소와 목재상의 사장으로 번듯하게 사는 부잣집의 규수를 며느리로 맞는 브라질 교포의 마음은 흡족하고 감격스러웠다. 더욱이 2세 교포 청년, 이철진은 더 그러했다. 주어진 샴페인, 와인 잔을 조금씩 비우다보니 얼굴에 홍조가 돋았다. 모처럼, 식구들과 친척들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사고가 생겼다. -신랑, 이철진이 그의 지갑에서 아주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옆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장모 김정순씨에게 슬그머니 보라고 건네주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색깔이 검고 갈색이 보일정도로 바랜 것으로 보아 족히 20년은 넘었을 명함판의 배가되는 사이즈의 사진이었다. 무심코 준 사진을 슬그머니 테이블 밑에 두고 바라보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흠칫 손이 떨리고 있었다. 40년 전에 집을 나간 남동생과 아주 비슷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이라고 사위 이철진이 작은 소리로 설명을 했다. “뭐라고? 돌아가신 부모라고? 그러면, 여기 계신 부모는 누군가?” 김정순씨의 목소리가 제법 떨리고 흥분됐기에 옆에 앉아 있던 사돈에게 들렸다. “아-사돈님? 사실 때가 되면 밝히려고 했는데. 아- 철진이는 저의 양아들입니다. 사돈 어르신---” 옆에 앉아 있던 신랑의 아버지 이진경씨가 아들을 대신해 대답을 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양아들이라니요?” 김정순씨는 마치 사기결혼을 당한 듯이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이진경씨는 머리를 굽혀 사죄하듯이 인사를 한 후 고아원에 있던 2살 조금 넘은 이 철진을 입양해 지금까지 길렀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신부의 아버지 최 사장이 볼멘소리로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순간 화기애애하던 약혼식장은 삽시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양자라는 사실을 미리 말하지, 돈이나 뜯어내려는 게 아닌가? 혹시 거짓말에 속고 있는 게 아닌가?- “일부러 늦춘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서서히 알려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진경씨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듯이 대답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지요. 지금 와서.” 김정순씨는 속은 듯이 말했다. “사돈? 철진이는 반듯하게 자란 애입니다. 역경을 극복하고. 순박하게. 그리고 조국에 와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청년입니다.” 이철진씨는 당당하게 말한 후, 앞에 놓인 와인을 마셨다. 싫으면 그만두라는 듯이. 순간 김정순씨는 사진을 사위에게 돌려준 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다리 부러진 인형처럼 힘없이 옆으로 쓸어지고 말았다. “어머니! 괜찮아요?” 아들과 딸들이 달려들어 어머니를 부축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김정순씨는 고개를 들면서 괜찮다고 힘없이 대답했다. 약혼식장은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하나둘 수군대며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네가? 어떻게? 거기에?” 정신을 차린 김정순씨는 사진 속에서 본 두 인물을 생각하면서 혼자 중얼댔다. 4. “당신, 어디 아픈 거 아냐? 종합 진단이라도 받아보지 그래.” 어수선하게 끝난 약혼식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속에서 남편이 애내에게 걱정되듯이 물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마치 먼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나들이 갔다가 허겁지겁 돌아온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한 가족들은 응접실에 둘러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자”라는 사실이 불쾌해 당장 파혼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당사자인 딸은 반대였다. 불행을 극복하고 건실하게 자란 이철진과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마침내, 아버지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러나 사진을 본 김정순씨에게는 엄청난 오해와 꼭 해결해야 할 비밀이 있었다. * 이철진을 청담동에 있는 아담한 음식점에서 만난 김정순씨는 그 작고 바랜 사진과 양자에 관해 더 물어 보았다. -2살 되던 해, 교통사고로 사진 속의 부모님이 죽자, 고아가 된 이철진은 리로데자네이로에 있는 고아원에서 말세리노 루나(Marcerino Luna)라는 이름으로 약 6개월 살다가 운이 좋아 지금의 아버지, 이진경씨에게 입양돼 이철진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의 기억으로, 그의 친 아버지의 성이 현(玄)씨라고 기억했다.- “현씨? 그리고 성함은?” “정(正)자 운(雲)자, 정운이라고 했습니다.” 약간의 실망이었다. 선배가 찾는 사람은 김정우(金正羽)였기 때문이었다. 둘은 혜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식은 11월로 예정됐으니 그 사이에 시간을 내어 혼자서 찾아보겠다고 선배는 다짐했다. 꿀잠을 자야 할 그녀는 40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악몽을 꾸며 밤마다 허우적거렸다. -1963년, 선배의 남동생, 김정우가 고3 재학 중 공부하기가 싫어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이 돼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실종사망(失踪死亡)으로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본 그 낡은 사진이 마치 실종되었던 남동생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이 브라질에서 죽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더구나 사위 이철진이 남동생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말도 안 되지. 딸과 친 조카, 근친결혼(近親結婚)이 되는 셈이었다. 갑자기 그녀에게는 남동생의 행방이 아주 중요한 수수께끼가 되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 한 달을 고민하다가 그녀는 사돈을 만난다는 명목과 브라질 관광을 하자고 남편을 설득해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 브라질로 가 직접 알아보겠다고 24시간의 비행을 하면서 그녀는 초기 이민자의 고충을 느끼게 됐다. 가방 두 개를 들고 63일이나 걸리는 배를 타고 리오데자네이로에 내렸던 초기 이민자들의 용기와 비련이 마치 큰 배 밑창에서 큰 배를 받쳐주는 부력의 역할을 해주었기에 오늘날의 발전된 한국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포르트칼 문명의 냄새가 풍기는 상.파올로에 도착해 관광을 하면서 사돈을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김정순씨의 진짜 숨은 계획은 1970년초에 상파울로 연합교회를 이끌었던 김영빈 목사를 만나 사위의 친부모가 되는 현정운이라는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였다. 김목사는 80중반으로 이민초기부터 상파울로에서 외롭고 가난했던 이민자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였으나 몇 년전에 겪은 중풍으로 인해 거동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래도 그는 기꺼이 김정순씨를 만나 그녀가 찾고 있는 현정운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었다. 그가 알려준 현정운에 관한 내용은 이러했다. -1971년, 7월. 26세가 조금 넘은 현정운 청년과 세실리아 박(Cecilia Park)이라는 29살된 여성이 그를 찾아와 결혼 주례를 부탁했는데 눈물겹게도 비밀리에 둘만을 위한 식을 올려 달라고 했다. 서글프나 행복한 둘만의 결혼식을 거행해 주고 그들의 비밀을 지켜 주기로 했다. 그들의 숨겨진 사연이란? 현정운 청년은 8년전 1963년, 7월, 브라질 농업 이민자로 리오데자네이로에 도착한 후 버스편으로 적도 근처에 있는 빅토리아에 가서 2개월간 농사를 지었으나 경험부족으로 인해 200달러를 주고 산 농토를 포기하고 상파울로로 와 막 노동일을 했다. 친척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민 왔으니 돈도 없고 브라질 말도 못하다보니 자동차 정비소에서 막 노동을 하다가 한국사람을 만나 더 좋은 직장으로 옮겨 학교에도 다닐 수가 있었다. ‘왜, 이민을 왔던가? 내가 미쳤지.’ 부모님의 잔소리와 공부하기가 싫었기에 여기저기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온 브라질 이민은 낭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위한 생존 경쟁이었다. 아니 죽고 사는 피 비릿내 나는 지옥 같은 전쟁터였으며, 더 참을 수없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먼 하늘에서 외롭게 떠 있는 별과도 같았으며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와 같았다. ‘공부하라’, ‘피아노 치라’, 매일같이 강요하는 부모보다 그를 아껴주던 3년 연상의 누나가 유독 그리웠다. 누나는 공부도 잘했지만 못난 동생을 여러모로 지도해주었으며 위로해 주었기에 그는 멀리 브라질에 와서도 누나가 그리웠다. ‘정다운 말 한마디, 누나의 말’이 그리웠는데- 1965년 가을 그는 그 ‘정다운 말’을 듣게 되었다. 그의 나이 20세 때, 23세의 처녀 세실리아 박을 상파울로 한인 천주교회에서 만나게 됐다. 고장난 천주교회 소속 짚차를 수리해 직접 운전해 성당으로 갔을 때, 우연히도 성당직원들은 휴게실에서 라면을 점심으로 먹고 있었다. 담당 수녀가 지불한 수리비를 받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라면을 끓이고 있던 처녀가 느닷없이 점심을 먹으라고 권했다. “저보고 하신 말씀이세요?” 청년은 자기에게 친절을 베푸는 그녀에게 수집은 듯이 물었다. “사양마시고 잡수세요. 또 있으니까요.” 그때 얻어먹은 라면 한 그릇과 그녀의 따스한 ‘정다운 말’은 마치 누나를 만나듯했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민 사회에서 받은 따스한 ‘정’이었다. 끈끈한 ‘정’은 계속 이어졌다. 누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생으로 불렀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마음을 읽게 됐다. 외로움을 나누다 보니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다보니 목숨보다 더 귀한 아가페의 사랑도 생겼다. 1968년, 현정운은 23세, 세실리아는 27세가 됐다. 매일 만나야 하는 이 둘 사이. 며칠째 정운은 세실리아를 만나지 못했으며 어디에 갔는지도 모르는 사건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그녀 혼자 리오데자네이로(리오)에 갔다 왔음을 알았다. 정운은 화가나 다그쳐 물었다.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만 했다. 속인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 그녀를 거의 반강제로 데리고 리오로 달려갔다. 정운의 강력한 요청에 굴복한 세실리아는 뜻밖에도 그를 데리고 비린내 나며 더러운 리오 항구 부두로 갔다. “세실리아? 왜 더러운 부두로 가는 거야? 비린내 나는 곳에?” 정운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녀는 냄새나고 더러운 부두 맨 끝에 가서 바다를 향해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하였다. “뭘 하는 거야?” 정운은 격한 말로 물었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 세실리아는 몇 년간 정운을 속이고 살았다고 흐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다. “정운씨? 사실, 나 남편을 만나고 있어요.” “엉? 남편을? 그게 무슨 말야?” -세실리아는 본명이 박점덕(点德)이라고 했다. 어려서 등판에 큰 점이 있어 부모가 점덕이라고 지었다. 강원도 강능에서 여자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녀는 사랑하던 동네 오빠가 있었다. 6살 연상이었는데 건강하고 똑똑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육군소위가 됐다. 몇 년 후,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점덕은 우체국에 교환수로 취직해 근무하던 중, 동네오빠와 결혼했다. 결혼 2개월 후 남편은 중위로 진급이 되었으며 월남전에 차출돼 월남중부 퀴논 맹호부대로 배속되었다.- 남편이 월남으로 전속가면서 늙은 시어머니와 괴팍한 두 시누이와 같이 살았다. 월남에서 부쳐오는 월급은 시어머니가 모두 챙겼으며 점덕은 손도 못댔다. 1964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 월남에서 온 편지는 청천벽력이었다. ‘곽영준 중위, 월남 중부 풀레이크에서 전사함. 대위로 추서함.’이었다. 남편이 죽자 슬피 우는 점덕에게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엉뚱하게 ‘가난뱅이, 공부 못한 년을 며느리로 맞아서 아들이 죽었다’라는 누명을 씌우고 학대했다. 남편이 죽은 것도 분하고 힘든데, 우울하다 못해 그녀는 강릉 앞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해안경비대에 의해 구조돼 병원으로 실려갔다. 다리와 복부에 큰 상처와 더 심한 우울증만 남겨 놓은 채 퇴원했다. 그리고 시집에서 나와 강릉 성당으로 찾아가 수녀가 되고자했다. 이미 결혼도 했으며 자살까지도 시도 했으니 당연히 수녀가 되는 것은 거부됐으나 천주교 신자로 영세를 받았다. 해를 넘겨 1965년 3월,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브라질 이민선에 자원해 상파올로로 오게 됐다. 이민 오기 전, 그녀는 국군묘지를 방문해 남편 무덤 주위에 있는 잔디 풀, 나뭇잎을 성경책 갈피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성경책은 낡았으나 ‘남편’으로 모시고 생각날 때마다 만져보곤 했다. 그리고 이민 와서도 전사한 날에 맞춰 리오 항구 부둣가를 찾아 남편 곽영준 대위를 생각하며 성경책을 만지곤 했다. 그리고 먼 바다를 바라다보며 외쳐 보았다.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죽을 때까지....여보.’라고. “아! 세실리아? 왜 오늘에서야 그 슬펐던 일을 말 하는 거야. 위로를 못해준 내가 부끄럽네. 그 슬펐던 과거를 오늘 나와 같이 저 바다에 흘려보내자. 그래 과거는 깨끗이 흘려보내자. 세실리아.” 정운은 망설이는 세실리아를 설득해 그녀가 갖고 있던 ‘남편인 성경책’을 멀리 바닷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오열하는 세실리아를 힘껏 포옹했다. 월남전에서 전사했던 곽 대위가 손을 흔들며 ‘현정운씨! 내 아내 점덕을 사랑해 주소!’라고 말하며 멀리 바다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정운은 울고 있는 세실리아를 부축해 멀지 않은 호텔로 간 것은 한밤중이었다. 울고 있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지난 십년의 애환이 교차되고 있었다. 육군소위로 임관하면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던 늠름한 모습. 월남으로 가면서 손을 흔들던 애처로운 모습. 영원한 남편이었는데, 오늘 그 자리에 ‘현.정.운.’이 대신하다니. “정운씨.” 그녀는 쿵쿵 뛰고 있는 정운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정운에게 무한한 감사를 했다. 한번 결혼한 그녀, 그리고 마음속에 아직도 품고 있는 남편을 속이고 사랑한 그녀를 감싸주며 더 큰 사랑으로 그녀를 대하겠다고 맹세하는 정운의 사랑 앞에서 감격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는 뜻밖의 고백을 했다. “정운씨! 나는 그대의 노예가 되렵니다.”라고.- 3년 후, 1971년 7월. 둘은 김영빈 목사를 찾아와 정식으로 결혼 주례를 부탁했는데 둘만의 결혼이었다. 그리고 김 목사는 모든 것을 비밀로 지키겠다고 했다. 결혼 후 신혼여행으로 간곳은 당연히 리오였으며 냄새나는 부둣가를 방문해 3년 전 흘려보낸 성경책의 주인, 곽 대위를 만난 것도 특이했다. “여보! 여기 정운씨를 보세요. 나, 정운씨를 사랑합니다. 당신도 기뻐해 주세요.” 그 후 그들은 상파올로 남쪽에 있는 산토스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브라질 사람이 운영하는 정비소에서 그리고 세실리아는 의류가게에서 착실히 일을 해 작은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으며 1973년, 아들을 낳았다. 상파울로에 사는 한국 사람들과는 거의 관계를 끊고 잊고 살았다. 오로지 각자의 노예로서 주인을 잘 섬기고 있었다. 1975년, 아들을 낳았으며 브라질로 이민 온 것이 행복했으며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목적도 없이 찾아 온 브라질이 이젠 자유의 나라 그들의 영원한 고향이 됐다. 5. 세실리아 그리고 두 아들을 거느리고 사는 현정운 가족은 성공한 이민자의 가족이었다. 1977년 7월 둘째 아들이 두 살 되던 해, 이민 온 지 14년 만에 현정운은 도망치듯이 나왔던 고국에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가기 전에 리오 부둣가에 가서 곽대위의 영혼을 만나보기로 했다. 행복한 마음이었다. 12년 전 눈물을 흘리며 시집 식구들을 피해 도망쳐 나왔던 세실리아 역시 이젠 당당하게 고국에 가 시집식구들을 보란 듯이 만나고 싶었다. 어찌 보면 시원한 복수를 하려는 기분이었다. 국군묘지를 방문해 전 남편 곽 대위의 영전에 가서 마음껏 울고 싶었다. 산토스를 떠나 리오항구 부둣가에 다시 서니 멀리에서 등대가 보였으며 출렁이는 바닷물에서 문득 곽 대위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정운씨. 고맙습니다. 아내, 점덕을 이렇게 행복하게 해 주었으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공간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 노을이 항구 저편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여보! 어서 서둘러 갑시다. 아니면 오늘 저녁을 호텔에서 머물러야 하는데. 괜히 비싼 돈 내지 말고.” 아내가 멍청히 서있는 남편을 재촉하고 있었다. 항구는 점점 더 캄캄해지고 있었다. 일행은 리오를 떠나 쌍 파울로-산토스를 향해 차를 몰았다. 달리는 승용차에 두 아들은 잠이 들었으며 옆에서 조잘거리던 아내도 잠이 들어 조용했다. -순간, 정운의 머릿속에 영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공부 좀 해라! 형처럼, 누나처럼!” 성난 아버지의 얼굴이 이글어저 보였다. “예, 아버지!” 그리고 그는 정신이 멍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고속도로 반대편에서 성난 사자처럼 환한 불빛을 비치며 달려오는 큰 트럭이 마치 현정운을 향해 입을 벌리며 솟구치는 굶주린 사자라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붕’소리를 들으며 현정운의 차는 고속도로 밑으로 굴러 떨어지다가 ‘펑’하는 폭팔음을 내며 불길에 휩싸였다. 이 끔찍한 사고로 현정운 부부와 큰 아들은 즉사했으며 작은 아들은 용케 뒷자섯 귀퉁이에서 밖으로 튀어나와 발견됐는데 기적적으로 살아있었다. 더 불행한 것은 사고를 당한 이사람들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정부에서 일주일간 보관했다가 시립공동묘지에 합장해 버렸으며 살아있는 아이는 정부가 운영하는 값싼 고아원에 수용됐다. 신문에 기사로 실렸으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6개월 후, 리오에 사업차 갔던 이진경씨가 우연히 고아원에 들려 그곳에서 버려진 한국아이를 발견하고 입양했다. 자식이 없는 이진경씨는 말세리노 루나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해 이철진이라고 했다. 2개월 후 이진경씨는 입양한 아들, 이철진을 데리고 김영빈 목사를 찾아가 유아 세례를 부탁했다. ‘복받은 고아로군요.’ 라고 말하며 김영빈 목사는 세례를 주었으며 지금까지 까막득하게 잊고 있었다. 아니, 그가 들은 비밀을 끝까지 지켰다. * 김목사의 설명은 다 끝이 났으나 결론을 지을 수가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나 결정적으로 이름이 틀렸다. ‘현정운과 김정우’는 비슷하나 100% 같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론을 짓지 못하고 더 찾아보기로 하고 서둘러 사돈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아직도 관광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2살 반 된 고아를 입양해 훌륭한 청년으로 길어준 사돈이 대견해 보였다. 결국 근친결혼이 아니라는 결론을 짓고 보니 마음이 턱 놓이며, 11월에 있을 결혼식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해 11월 12일, 약혼식을 했던 남산 하야트 호텔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작은 결혼식을 치렀다. 둘은 축복 속에 제주도를 다녀온 후, 장인 장모를 모시고 한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서. 6. 귀한 딸이 결혼을 해 사위와 더불어 매일매일 즐겁게 그리고 건강하게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것이 무한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직도 게름직한 문제, 근친결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선배를 괴롭히고 있었다. 혹시라도 현정운과 김정우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딸은 근친결혼을 한 셈이 된다. 근친결혼이란 사회적인 문제도 되지만 의학적으로 유전인자의 결핍으로 인해 기형아와 정박아의 출산률이 현저하게 높은 것도 큰 문제였다. * 결국 2005년 12월, 스트레스 때문에, 소아과 진료실을 닫고 남편에게 반 강제적으로 설득해 5년만 따스하고 평안하다는 남가주로 이민 가서 살자고 했다. 우선 그해 12월 말, 한국의 추운 날씨를 피해 따스한 로스앤젤스 근교, 실비치(Seal Beach City)에 있는 노인타운을 둘러보았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인생의 황혼을 눈으로 보는 듯했다. 2006년 1월, 선배부부는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를 탓다. 두 번째 찾아 가는 브라질은 덜 생소했으며 오히려 친근감이 생겼다. 혹시라도 동생, 김정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는 남편을 따돌리고 사돈에게도 알리지 않고 상파울로에 도착해 다운타운에 있는 H 호텔에 투숙했다. 그리고 전에 만났던 김영빈 목사를 만나 다시 한 번 도움을 요청했다. 현정운씨가 어떤 경로로 브라질에 왔는지를 알고 싶어 했는데 뜻밖에도 목사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현씨 성을 가진 봉제업자를 만나보면, 혹시, 혹시.” 목사님이 생각해 난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은퇴해 한인타운에서 꽤 먼 곳에 사는 85세의 로베르토 현(Roberto Hyun)을 혼자 찾아 갔다.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그는 자초지종을 듣고 물었다. “현정운이란 청년을 아십니까? ” 김정순은 가까스로 물었다. “알다마다요. 정운은 내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민선을 타고 같이 온 것과 세실리아라는 며느리와 두 손자가 있었는데, 벌써 20여년 전, 사고로 죽었다고 말하자 김정순씨는 또 한 차례 실망을 하고 말았다. 사진 속의 남자, 현정운과 그녀가 찾고 있는 김정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임이 판명됐기 때문이다. 비록 동생의 행방은 못 찾았으나 껄끄러웠던 근친결혼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호텔로 돌아온 그녀는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치락거리다가 새벽에 겨우 잠이 들어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침 11시나 돼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는데, 호텔 로비에 있는 안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뇨라, 정순 킴! 여기 로비에 로베르토 현이란 분이 찾아 왔는데 급히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로베르토 현?” 그녀는 급히 로비로 내려갔다. 김 목사와 더불어 로베르토 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저녁, 김 목사가 혹시 한국에서 온 소아과 여의사가 찾아왔는지를 물었더니 로베르토 현이 갑자기 질문을 했다. “잠간! 그 여의사, 아직도 여기 브라질에 있습니까? 어디 있습니까?” “다운타운, H 호텔에 있답니다. 장로님!” “목사님? 내일 아침 나하고 그분을 만납시다.”- 로비에서 만난 로베르토 현은 미안하다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뜻밖의 말을 했다. “닥터. 김? 어젠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현정운은 나의 양 아들입니다.” “양 아들이라구요. 그러면 본래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정우라고 합니다. 김.정.우.” “맙소사. 하나님!” 설마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로 밝혀졌으며 마침내 동생을 찾았으나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7. 동생 김정우가 현정운이란 이름으로 브라질에 이민 온 사연과 경로가 애처러웠다. 1963년 봄. 동생 김정우는 D고등학교 3학년으로 진급을 했으나 다음해에 치러야 할 대학시험에 도무지 자신이 없었으며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무서웠다. 행인지 불행인지, 같은 반의 친구 현성룡을 만났는데 7월 달에 전 가족 브라질 이민을 간다고 하자 자기도 같이 가게 해달라고 떼를 썻다. 부모가 허락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뇌물을 주고 호적도 고쳐 등치가 큰 현성룡의 동생이라고 속여 마침내 7월에 떠나는 이민선에 합류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일로 성룡의 아버지, 로베르토 현도 말릴 여유가 없었다. 큰 이민가방 하나와 가짜 여권을 들고 냄새나는 이민선에서 로베르토 현의 아들로 63일간의 길고 힘든 항해를 하였다. 홍콩-싱가폴-인도양-케이프타운-대서양-리오데자네이로가 이민선의 항로였다. 배가 몹시 흔들리자 점점 메식거려지며 머리가 빙빙 돌기도 했다. 혹시라도 가짜 서류가 들통 날까봐 입을 다물었다. 후회스러웠다. 누나에게 알리지 않고 나온 것이 더 한스러웠다. 밤하늘에 초롱초롱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김정우(현정운)는 집 생각을 하며 후회를 했으나 업지러진 물이었다. 그렇지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좋았다. 망망대해에서 만난 폭풍우가 무서웠다. 미친듯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정우야? 너 어디 있니?”라고 아버지가 노한 목소리로 묻고 있는 듯 했다. “아버지? 나. 공부하기 싫어 이민선을 탓습니다. 10년만 기다리세요. 성공해서 돌아갈게요. 10년만.” 지저분한 이민선에서 성룡의 식구들과 같이 기거하다보니 이젠 정말 한식구가 됐다. “너, 불효하는 거여. 대신 꼭 성공해서 돌아가거라.” 성룡 어머니가 격려를 해 주었다. 밤마다 정우는 선실 밖으로 나와 갑판에서 넓은 바다를 보며 울기도 했고 다짐도 했다. ‘브라질에 가서 무엇을 한담. 누나는 잘 있는지. 농사는 어떻게 한담. 포르트칼 말은 언제 배우고.’ 항해 63일 되던 날, 눈에 뵈는 것은 리오데자네이로 항구 언덕에 우뚝 솟은 예수님의 동상과 십자가였다. 길고 긴 항해 끝에 이민국에서 현성룡의 동생으로 입국이 허락됐다. * 어정쩡한 상황에서 이민자들은 준비된 버스를 타고 무려 8시간을 달려 적도가 가까운 빅토리아라는 농장에 가서 정착했다. 말이 농업이민이지 먼저 와 있던 일본사람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농사를 짓겠다고 온 사람도 없었으며 초청한 브라질 당국도 한국 이민자들을 우롱하기는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땅을 주었다. 정착지에서 어영부영 2개월을 보낸 이민자들은 비싸게 준 땅을 포기하고 짐을 꾸려 쌍 파울로로 흘러 들어가 막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성룡의 아버지 혼자 애써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데 거기에 얹혀 있다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정우(현정운)는 집을 나가 자립하겠다고 했다. “힘들면 언제고 돌아와! 너도 현씨니까. 정우야.” 그러나 그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18살 난 김정우(현정운),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으며 포르트칼 말도 못하니 자연 한국 사람이 일하고 있는 브라질 사람의 정비소에서 막노동을 하였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 간간히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이민 4년, 상파올로 단과대학에 적을 두었으며 웬만한 정비공의 수준이 됐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야 할지,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김정우(현정운)는 한인천주교에서 세실리아 박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두 아들을 데리고 1977년 리오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교통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고 오로지 둘째 아들만 살아남아 고아원에서 양육되었다. 그리고 이진경씨에 의해 입양돼 이철진으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렀음을 김 목사와 로베르토 현을 통해 알게 됐다. 얘기는 끝났다. 김정순씨는 40여 년간 참고 참았던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슬피 우는 사람은 울만큼 울어야 마음을 비울수가 있는법, 그리고 인생은 홀로 일뿐 어느 누구도 동반하지 않는다. 8. 슬픔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선배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두문불출, 죽은 동생과 부인되는 세실리아를 생각했다. 특히 세실리아는 김정순씨 자신과 같은 나이였는데 참으로 운명적으로 태어 낫다고 생각하니 위로의 마음이 생겼다. 결국, 사위, 이철진은 친조카가 되니 근친결혼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태어날 자식들은 어찌되는가? 소름이 끼쳤다. 다음날 아침, 김정순씨는 사돈집에 전화를 걸어 상파올로에 와 있음을 알려주었다. 깜짝 놀란 이진경씨 부부는 즉시 호텔로 달려와 집으로 데리고 갔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녀는 일체 입을 다물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음 날 용기를 내어 사돈에게 리오 항구에 데려다 주기를 요청하니 의아해 했다. “항구에요?” “예. 이민배가 도착했던 그 부둣가에.....” 5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리오 항구의 부둣가는 썰렁했다. 그리고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김정순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등대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죽은 동생과 세실리아의 영혼이 이곳에서 맴돌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번화한 리오를 벗어나 상 파올로로 가는 고속도로를 약 한 시간 쯤 달렸다. 어디에서인가 동생과 그 가족들이 김정순씨를 부르는 듯했다. 잠시 고속도로 변에 차를 세워 달라고 부탁한 후 차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어디 몸이 불편하십니까? 사돈어른?” “예, 조금 어지러워서...” 김정순씨는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기에 좀 천천히 달려요.” 사돈댁이 남편 이진경씨에게 충고를 했다. 그리고 달려온 상.파올로. 캄캄한 저녁 불빛이 그녀를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아마존 장글위를 지나고 있었다. 태평양을 가로 질렀다. 여기저기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남편, 딸 그리고 사위가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딸과 사위의 손을 잡으면서 겉으로는 웃었으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 마침내, 김정순씨는 딸과 사위와 같이 사는 것이 큰 부담이 돼 과감하게 은퇴를 결단하고 주저주저하는 남편을 설득해 5년간 남가주에서 살기로 하였다. 2006년 5월. 미국으로 이주하기 며칠 전. 김정순씨는 사위와 청담동에 있는 아담한 그 음식점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자네, 아직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사진을 갖고 있나?” “예.” “그렇다면 그 사진을 내가 잠시 갖고 싶은데.” “보시고 돌려주시는 거지요?” “그럼세.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동생, 정우는 죽었지만 그 사진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궂게 닫았다. 침묵(沈黙), 침묵 그리고 침묵이었다. 9. 2006년 6월. 김정순씨 부부는 이민을 왔지만 미국으로 휴양하러 온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이민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막상 이민자가 되고 보니 이민자는 ‘밥 먹기 위해 조국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고 모험과 드림을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연유로 한 달 후, 그들의 건강을 책임져 줄 의사를 찾아 온 것이 가데나에 있는 나, 김명수 의사였다. 선배 부부와 나는 자주 만나 식사도 했으며 동창회에도 같이 나갔다. 나의 권고에 따라 그들은 알라스카 크루즈에도 다녀왔다. 2006년 겨울 그녀는 브라질에 가서 약 2주간을 보내고 왔다. 그리고 해를 넘겨 연초에 나를 찾아와 정기 검사를 받았는데 아주 좋은 건강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을 다녀 왔는가 했는데 어느새 브라질을 방문하고 왔다고 했다. “리오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특히 산에서 내려다 본 항구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뵈는 등대와 부두는 절묘한 사진과도 같습니다. 후배님, 그러니 언젠가 휴가를 내 나하고 브라질에 한번 갑시다. 사실, 후배님, 내 사위가 브라질에서 온 교포랍니다.” * 2007년, 어느새 11월. 어느 금요일 아침. 한동안 뜸했던 선배가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와 진찰을 받았다. 얼마 전, 선배는 브라질에 갔다가 심한 복통이 생겨 상 파올로에 있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췌장암일지도 모르니 미국에 가면 꼭 검사를 하라’고 했는데 웬지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나 또한 섬찟했다. 며칠에 걸쳐 내시경, 초음파, 그리고 단층촬영을 한 결과 과연 췌장에 암 덩어리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도사리고 있었다. “위플(Whipple)수술로 암을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선배님!” “꼭, 그렇게 해야 하나? 그냥 죽으면 안 될까?” 선배는 나의 설득에 마지 못해 수술을 받기로 하였다. 수술받기 전날, 선배는 내게 특별 부탁을 했다. 수술을 받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 망설이다가 깊숙이 보관했던 딸과 사위의 결혼, 근친결혼의 비밀들을 내게 말해 주면서 침묵을 지켜 달라고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들먹이면서.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비밀을 털어 놓고 보니 어쩌면 이렇게 후련한지 ‘푸-’하는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수술 후, 선배는 정신력이 강한지 통증을 잘 견뎠으며, 죽음 후에 올 천국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신 후 영생을 찾은 것 처럼.- 그리고 해를 넘겨, 2008년이 되었다. 갑자기 황달이 심해지며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검은 피를 토하며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으로 보아 운명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보호자들을 배제하고 선배는 나에게 못 다한 비밀 얘기를 하였다. 선배의 배는 물로 차있어 땡땡하게 불러 보였으며 손과 다리를 누르면 1센티 이상 푹 들어갔다. 게다가 숨이 차 헐떡였다. 선배는 침대 곁에 보관하고 있던 아주 낡고 바랜 흑백 사진을 내게 주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동생과 그의 아내라고 했다. 며칠 전에 소상하게 들어 알았듯이 사위 이철진의 친아버지요, 선배의 남동생이 되니, 아! 근친결혼이었다. “닥터. 김. 잘 간직하소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지키듯이. 혼자만 알고 계시소.” “예, 선배님.” 나는 그 사진을 내 지갑 속에 보관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올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 호스피스 간호원이 나에게 환자가 운명했다는 보고를 해주었다. * 시신은 화장하여 한국으로 보내졌다. 천안근교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히던 날, 나는 사진 속에서 애잔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느껴졌다. 이 사진을 어찌해야 하는지. 사위에게 돌려 줘야 하는지? 그 후 3개월, 나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롱비치 바닷가에 갔다. -항구에서 바라본 태평양에 작은 등대가 기능을 잃고 서있었다. 퀸 메리 호가 정박한 바닷가에 몇 개의 종이배가 떠 있었다. 누가 띄웠을까? 작은 종이배는 가다가 소용돌이에 잡혀 더 가지 못했다. 두고 온 것이 아직도 그리워서 일까? 마침내 종이배는 파선이 돼 갈기갈기 찢긴 종이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떠나 버린 님을 찾지 못해 맴돌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저기 뵈는 등대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으츠러지게 떠내 보낸 애잔한 마음과 그리움이 밀려오는 작은 파도가 돼 마침내 작은 포말(泡沫)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갖고 온 작고 입이 큰, 빈 맥스웰, 브라질 산 커피 병에 사진을 조심스레 집어넣고 성냥불을 그어 불을 부쳤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사진은 타기 시작하면서 작은 화염이 사그러지더니 흙갈색의 재로 변해 통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색이 점점 회색빛으로 바뀐 종이 재를 몇 번 가볍게 흔들어주니 더 작은 잿가루로 변했다. 커피병 밑에 차곡히 가라앉았다. 순간, 나는 내 볼에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내가 왜 우는 거지? 그까짓 바랜 사진을 태우면서. 슬퍼서? 아니면, 그들이 불쌍해서? 아니었다. 그들의 슬프고 훈훈한 사랑에 취하고 있었다. 아- 내게도 저런 사랑을 잠시라도 가져 볼 수가 있을까? 그들의 사랑을 훔쳐갖고 싶은 마음이었다. 입이 넓고 높이가 낮은 맥스웰 커피통에 들은 사진재를 어떻게 해야할런지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바다에 그 재를 뿌려 멀리 보낼까? 아니면 사막에 뿌려 바람에 날려 보낼까? 결국 커피통을 바다에 통째로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집으로 가지고와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몇 개월이 바람개비 돌듯이 훌쩍 지나고 보니 이젠 커피통에 대한 안타까움도 잊을 때가 얼추 됐다. 그러던 어느날 커피통을 무심코 바라보다 브라질에 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투덜대는 아내를 데리고 11월 어느날, 브라질 행 비행기를 탓다. 아내는 아마존 장글, 리오의 십자가 그리고 이과수 폭포를 반드시 보겠노라고 벼르고 있었으나 나는 정작 리오 항구로 가 사진의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부두에 가려고 했다. 관광 스케쥴에서 하루를 특별히 변경했다. 그러자 아내도 같이 가야한다고 아우성이었다. 마지못해 택시를 타고 항구로 향했다. “아니? 왜 항구에 가는 거요?” 아내는 내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 하는 듯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등대가 보이는 쪽을 향해 멍청히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마치 죽은 곽 대위와 던져 버린 성경책이 멀리서 뵈는 듯했다. 잠시 아내가 방심하여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나는 맥스웰 커피병을 들어 바다를 향해 마음껏 던지며 죽은 김정우, 세실리아 박 그리고 곽 대위를 생각해 보았다. 맥스웰 커피병은 잠시 물 위 아래로 출렁이더니 이내 바다 속으로 묻혀 들어가고 말았다. “당신? 무얼 바다에 던진 것 같은데? 뭐야?” 아내는 뒤늦게 물었다. “아- 돌을 던졌어.” 나는 힘없이 대답을 했다. “돌? 꽤 크던데.” 아내는 다시 물었으나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서둘러 우리는 다시 리오 시내로 나와 관광팀에 합류했다. 저녁이 되면서 상파울로로 간다고 하며 관광버스는 리오를 빠져나와 상파올로로 가는 101번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한 시간 쯤 달려가다 보니 ‘노바이카쿠아’라고 쓴 안내판이 보였다. 현정운, 아니 김정우씨 가족이 사고를 당한 지점이었다. 리오 항구 부둣가에서 던져 버린 사진재의 주인공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35년 전, 청년 김정우에 의해 바다에 던져진 낡은 성경책과 그 속에 간직돼 있었던 풀, 나무 잎새가 오늘 내가 던진 사진재와 서로 엉켜 하나로 뭉뚱그려지고 있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고 다시 만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가득 찬 슬픈 과거를 버리고 한스러운 슬픔을 내려놓는 것이 평안을 찾는 지름길일진대, 나도 모든 것을 버리고 타인을 바라다 볼 때 사랑과 긍휼이 솟아난다고 믿고 있다. 선배가 주고 간 그 사진을 파도 속에 던져주고 로스앤젤스로 돌아오는 나 자신도 곤욕스러운 비밀 속에서 풀려나 훨훨 날아 갈 듯한 자유를 느꼈다. 상파울로를 떠난 비행기 속에서 나는 마침내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소설 끝. (주: 나의 친구, 황익주가 내게 주고간 소재를 근거로 쓴 단편소설임) 글쓴이: 연규호 소설가, 의사. 연세의대 졸업, 청주 출생. 한국, 미주 문협. 펜. 소설가 협회 회원. 미주 펜 문학상(소설)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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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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