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바닷물에 묻혀

2012.12.09 13:14

연규호 조회 수:592 추천:42

4.단편 소설, 바닷물에 묻혀 뉴 포트에 해안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한 폭의 수채화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라구나 해안(Laguna Beach)으로 이어진다. 해안 언덕 위에 서반아풍의 단층 건물로 된 퍼시픽 헤이븐(Pacifif Haven)양로병원이 있는데 내가 이 병원에 오고 갈 데 없는 노인환자들을 입원 시켜온 지도 어느덧 20년이나 됐다. (주:남 칼리포니아에 있는 뉴.포트 해안과 도시. 그리고 조금 남쪽에 있는 라구나 도시와 해안에. 노인들을 위한 양로병원이 있음) “큰 병원도 아닌 양로병원에 20여년이나 찾아오다니, 실력 없는 평범한 내과 의사시군?”이라고 불쌍하다는 듯이 비하해서 말하는 오만한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천만의 말씀, 어버이 같은 노인들을 입원시켜 도와 드릴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팜트리 아래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 해안 아래로 내려다뵈는 우아한 리츠 칼톤 호텔과 확 트인 태평양을 바라다보노라면 나의 마음도 시원해지며 멀리 태평양을 넘어 어디로인가 무작정 달려가는 것 같으니까요.” 뉴욕에서 수련의사(내과 레지덴트)를 끝내고 남가주로 이사와 개업을 갓 시작했던 30대 중반에는 리츠 칼톤 바(Bar)에 들러 고급 와인을 마시면서 이글거리는 태양과 눈부신 태평양을 바라다보며 돈 모으는 생각만 했었는데, 50살이 넘어서는 퍼시픽 헤이븐 양로원에서 멀지 않은 퍼시픽 헤이븐 공원묘지에 있는 작은 호숫가에 앉아 죽어 이곳에 묻힌 나의 환자들을 생각하며 그들과의 아련했던 과거를 생각해 보곤 했다. 오늘도 공동묘지 벤치에 앉아 며칠 전에 어느 여성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강석호(姜錫浩) 의사님! 저, 김신애(金信愛)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과 사랑이라고 하죠. 그리고 한해정(韓海晶)씨의 딸이랍니다. 김광수(金光洙),아저씨가 그 곳 퍼시픽 헤이븐에 묻힌 지 5년이나 됐군요. 광수 아저씨나 나의 어머니 두 분은 모두 애처롭게 마음속에 서로를 품고 살았던 거지요. 강석호 의사님! 우연의 일치인가요? 나의 어머니가 몇 개월 전부터 시름시름 앓으시더니 홀연히 임종했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나의 어머니가 남겨 놓은 유언입니다. “신애야! 내가 죽거들랑 나를 화장해 한줌의 재로 만들어 감포에서 멀지 않은 문무대왕 수중묘 근처에 뿌려주기 바란다. 태평양 바다 물결에 묻혀 망망한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 라구나 바닷가까지 가고자한다. 거기 가서, 신애야! 용서하거라. 퍼시픽 헤이븐이라고 하는 공원묘지에 스며들어가, 그곳에서 안식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놀라기도 했고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기장에 묻혀 있는 남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거부하고 한 줌의 재가 돼 태평양에 뿌려지고 싶다고 하니...그리고 말도 안 되지, 잘 알지도 못하는 옛 사랑, 김광수 아저씨가 묻힌 공원묘지로 스며들어 가 그곳에서 안식하겠다니. 문무왕 수중묘가 있는 감포 앞바다에서, 화장(火葬) 재를 뿌리면서... 김신애 드림. ‘아-한해정 씨가 세상을 떳구나. 그리고 김광수 씨와 죽어 드디어 만나는 구나!’ 나는 편지를 손에 들고 멀리 저물어 가는 태평양의 저녁노을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리츠 칼톤 호텔이 옆으로 보이는 라구나 해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아련한 기억을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 내가 김광수(미국이름으로는 마이클-Michael)씨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80년 여름이었으니 어느덧 21년 전 이었다. “ 닥터.강! 워싱톤 근교에 살다가 이렇게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사 왔습니다. 닥터.강의 선배 되는 김 박사님이 아나하임에서 개업하는 내과 의사 강석호(姜錫昊)를 찾아가소라고 알려 주었지요. 그 친구 느낌이 가는 다정다감한 의사요. 내 이름만 대면 아주 잘 해 줄 거라고 추천을 해 주었지요.” 알고 보니, 김광수라는 사나이는 44세를 갓 지났는데 아주 유쾌하고 농담도 시원시원 했기에 나와 그는 곧 친해 졌으며 나는 그를 형처럼 대해 주었다. 아주 특이 한 것은 그도 역시 라구나 해안을 좋아 하여 바닷가에 앉아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았었다. “김광수 씨? 낚시를 하십니까? 바다를 좋아 하시는 군요?”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아, 닥터.강은 웬일로 여기에? 바다를 좋아 하시나보군요?” 오히려 그가 내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바다를 좋아 하지요. 그리고 저기 언덕에 있는 양로원에도 여러 명의 환자가 있어, 거의 매주 한 두 번은 들렸다가 이렇게 바닷바람을 쐬고 갑니다.” “양로원에? 저기 저 건물이, 노인들이 죽기 전에 가서 산다는 곳...” “그렇습니다. 죽기 전에는 양로병원에서, 그리고 죽은 후에는 옆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힌다고요.” “그렇군요. 닥터.강? 나도 하나 부탁합시다. 나도 늙어 갈 데가 없게 되면 저기, 퍼시픽 헤이븐 양로원에 입원 시켜 주시고, 죽으면 공원 묘지에 묻어 주시겠습니까? 저, 의료 보험도 있습니다. 닥터.강!” “그러지요. 김광수 씨.” 그 후부터 나와 김광수 씨는 라구나 해안에서 곧잘 마주 쳤는데 그는 웬지 혼자 있기를 원하는 듯해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 반면 김광수 씨의 아내는 갸름한 얼굴에 비교적 말이 적었으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함부로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아니 가끔, 나는 그녀의 눈 가장자리에 눈물방울이 젖어 있다고 느꼈는데 그 사연을 알게 된 것은 무려 6개월 후였다. “닥터. 강? 내 아내의 우울증이 꽤나 심각합니다.”라고 김광수 씨가 알려 줬다. 우울증이라니? 사연이 애처러웠다. -김광수 씨가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은 공교롭게도 내가 미국으로 오던 바로 그 해, 1972년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칭 인생의 실패자요, 부모도 없는 고아로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아주 어렵게 공부해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경찰과 정보부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정부 고위 관리들을 위해 개처럼 일하다가 너무나 역겨운 마음에 미련 없이 9살짜리 딸과 7살 짜리 아들 그리고 그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와 살기 좋다는 워싱톤 근교의 알링톤에서 살았다. “어차피 북한에서 피난 나온 몸, 남한도 타향인데, 지상 천국이라는 미국에 가서 마음 놓고 한세상 살아 보려고 왔습니다.” 알링톤에서의 생활은 힘은 들었으나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 아내는 전자 조립공장에서 남편 김광수 씨는 반듯한 회사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저축해 멀리 아팔라치아 산이 올려다 보이며 알링톤 국립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꽃같이 아름다운 딸은 곱게 자라 알링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알아주는 ‘공부 잘하는 예쁜 소녀’로 소문났기에 이들 부부는 자랑스러웠다. 딸의 이름은 아팔라치아 산에 살았던 인디안 추장의 딸, 쉐난도아를 줄여서 쉐난이라고 불렀다. 쉐난도아란 인디안 말로 별들의 딸이라고 하듯이 예쁜 이름이었다. 자랑스러운 쉐난도아(줄여서 쉐난)에게 얼굴 반듯한 백인 소년, 애인이 있었다. 그 역시 자랑스러운 소년으로 공부도 잘하며 음악에도 뛰어나, 바이올린에 능통했기에 알링톤 고등학교에서는 쉐난과 그 애인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토록 우수한 소년 소녀들은 엉뚱하게도 동반자살을 해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짧은 사랑을 멀리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누리며 살아 보자고 하는 망상이 그 이유였다. 쉐난은 알링톤 국립묘지가 보이며 쉐난도아가 뵈는 카운티 공원묘지에 묻히고 말았다. “쉐난아 네가 이렇게 죽다니...” 김광수 씨의 아내는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녀는 통 말을 하지 않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살기 좋다는 알링톤도 그들에게는 슬픔과 죽음의 도시가 됐다. “여보, 이렇게 여기서 눈물이나 흘리면서 사느니보다 차라리 보따리를 싸 멀리 캘리포니아의 아나하임에 있는 친구 곁으로 이사를 갑시다.” 이런 연유로 김광수 씨는 사랑하던 죽은 딸을 가슴에 묻고 아내는 죽고 싶은 마음을 딸의 무덤에 눈물을 뿌리고는 마지못해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를 와 나를 만나게 되었다. 아나하임으로 이사온 김광수 씨는 석유 시추회사인 스미스 툴에서 직장을 구했으나 그의 아내는 인근에 있는 한국인 소유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을 하는 전형적인 한국 교포가 됐다.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으나 한 길 사람의 마음속은 알기가 힘들다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김광수 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김광수 씨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그는 이북에서 피난을 나와 부산에서 겨우 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갖고 잘 살다가 뜻한 바가 있어 미국으로 이민 왔다고 하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리고 라구나 해안에서 먼 바다를 바라다보는 조용한 사나이였다. 김광수 씨는 59세, 나는 50세의 고개를 넘고 있으니 세월도 많이 흘렀음을 그의 흰 머리칼과 횡하게 빠진 나의 대머리가 말해 주고 있다. 나의 생활도 다람쥐 체 바퀴 도는 듣한 반복의 생활이었다. 진료실과 병원 그리고 이곳 태평양이 훤히 보이는 퍼시픽 헤이븐 양로원과 공원묘지를 오고 간 것이 고작이었으니.... 나는 오늘 오랜만에 여기 공원묘지에서 마주치게 됐다. 사실 도리켜보면 나는 김광수 씨를 이곳 라구나 해안, 뉴 포트 해안 그리고 공원묘지에서 만난 때 마다 ‘바다를 좋아 하는 사나이니까...’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조금은 달라 보였다. 축 처진 모습에 얼굴 가장자리에서 흘러내린 눈물방울들이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김광수 씨, 울고 계셨나요?”“ 나는 민망해 물었다. “아, 닥터 강? 나도 늙어 거동하기가 힘들면 이곳 퍼시픽 헤이븐 양로원에 입원 해 있다가, 어느 날 죽으면 이곳 공원묘지에 묻힌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는 군요.” 그리고 그는 멀리 태평양을 바라다보며 울기 시작했다. “아니? 정말로 우시는군요. 왜요? 왜?” 나는 철없는 질문을 던졌다. “...........” 그는 대답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마지막 용트림을 하는지 멀리 지평선과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이내 캄캄해 졌다. 그리고 때를 맞춰 들어온 공원묘지의 밝은 수은등이 캄캄함을 밀어 버리고 더 더욱 환해지자, 울고 있는 김광수 씨의 모습이 더 더욱 애처로웠다. 인생 60살, 비교적 짧은 인생이건만 그는 저녁노을로 생각하고 있었다. “닥터.강? 내 말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의사이니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과는 다르겠죠. 어쨋거나, 닥터. 강? 당신은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있었는지요? 아니, 누군가를 무한정 기다려 본 적이 있는지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과는 다를 거라는 그의 말 속에서 나는 무슨 말 못할 사연을 연상해 보았다. -사실, 그의 질문대로 나라는 인간도 별것 아니었다. 말이 의사이지,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사람으로 다른 미국 의사들 처럼 고층 건물로 된 메디칼 센터에서 당당하게 목에 힘을 주어 떠들기는 커녕, 멀리 뵈는 지평선에 매일 찾아오는 석양의 노을처럼 가물가물 꺼져 가는 돈도 없고 힘도 없는 노인 환자들이나 진료하는 삼류 의사이니까.... 그뿐인가 오고 갈 데 없어 한적한 공원묘지 나무 벤치에 앉아 멀거니 태평양이나 바라보며 고향 생각을 하며, 오지도 않을 그 무엇이나 기다리는 하잘 것 없는 양로원 담당 내과 의사이니까....- 결국 나는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닥터. 강? 인생은 먹다 맘은 사과 반쪽이요. 반쪽! 무슨 소리냐고요? 들어보소! 다른 사람이 먹다 남긴 사과 반쪽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 내 인생이란 말이오. 시골에 사는 한 소년이 매일 같이 학교로 가는 한적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가에 정말 우연히도 임자 없는 사과나무를 발견했답니다. 그런데 아, 놀랍게도 사과 하나가 달려 있었습니다. 딱 한 개가....남이 도저히 볼 수없는 곳에 딱 한 개가... 소년은 지나 갈 때 마다 찾아가 보았으며 남이 보지 못하게 종이로 덮어 놨습니다. 신통하게도 사과는 점점 익어가고 있었지요. 드디어 내일 오후에, 지나가는 길에 그 사과를 따서 먹으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와보니, 그 먹음직한 사과를 어느 누군가가 먼저 따 먹었습니다. ‘아니? 누가? 누가?’ 세상에 나 말고 누가 여기에 있는 사과를 알고 있었는가? 세상에 나 말고 누가?‘ 야속했습니다. 그보다 더 원통한 것은 따 먹으려면 곱게 다 먹었으면 좋으련만 반쯤 먹다가 땅바닥에 팽개쳐 놓고 가다니...소년은 너무나 야속했습니다. 그러나, 닥터 강? 한편 생각해 보니 반쪽이라도 남겨 놓고 간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쪽이라도 남겨 놓다니...꼭지까지도 남겨 놓은 것이...“- “아니, 김광수 씨? 반쪽 남겨 놓은 것을 다시 먹었다는 거요, 불결하게?”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소! 닥터. 강. 당신에게는 더럽게 생각되겠지만 그 반쪽 사과는 분명, 그 소년에게는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그 사과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소년에게는 분명히 그 사과를 다시 찾았기에 기뻣으며 그 손에 들리운 그 반쪽 사과는 분명 조금도 손상 없는 훌륭한 본래 그대로의 사과였습니다.” “와!” 분명 사연이 있었습니다. 남이 먹다 남은 반쪽 사과를 들고 만족해야만 하는 무슨 사연이....... *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아나하임에 살고 있는 김광수 씨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멀리 서울에서 온 전화로 어느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김광수 씨? 혹시 부산에 살다가 서울로 간 한해정(韓海晶)이라는 분을 아시나요?” “예? 한해정이라고요?” 김광수 씨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가 지난 15년간 라구나 해안에 앉아 멀리 태평양을 바라다본 것이 바로 한해정이라는 여인 때문이었는데.... 해정(海晶)! 바다 속의 수정이라고나 할까, 바다 속에 묻혀 변함이 없는 그 수정을 찾으려고 김광수 씨는 라구나 바닷가와 뉴 포트 해안을 망상병자 처럼 해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얼굴을 생각하며 살아온 사나이였다. 그 뿐인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함추러니 서 있는 퍼시픽 헤이븐을 찾아와 공원 벤치에 안장 묵묵히 먼 바다를 바라다보며 눈물을 지어온 마음 약한 사내였다. “한해정씨가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 지난 30년간 그 작은 가슴속에 아저씨를 꽁꽁 품고 살아왔답니다. 나의 어머니가 이제 60세 환갑을 넘겼답니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장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소녀 시절, 그 어느 날/ 길 떠남은 시작되어/조약돌 주우며 무심히 시작된 길. 청순하게 핀 들꽃들도 만나고/ 이마에 불어 주는 시원한 산들바람으로/작은 언덕 넘어서니 눈앞에 펼쳐진 푸른 소나무 숲/ 가던 길 다시 눈앞에/ 눈 감아 도리질 치며 그대로 여기서 밤을 만나/ 이슬에 묻혀 잦아든다 해도......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가슴에 품고만 잇는 그 사랑의 주인공이 바로 김광수 씨임을 알아내었지요. 용서하세요. 이렇게 전화를 드려서...“ 아! 보잘 것 없는 반쪽 사과를 그토록 반기던 김광수 씨가 그토록 기다리던 여인이 있다고 하니, 더구나 딸이 어머니의 비밀을 알아내어 어머니의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주다니... 양로원이나 찾아다니는 볼품없는 내과 의사의 마음에 그녀의 딸이 들려준 옛 이야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1945년 8월 15일은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반가운 날이었으나 엉뚱하게도 남북이 갈리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성계가 말을 달렸다고 하는 발용산과 치마대가 있는 함흥에는 기독교 학교인 영생고등하교가 있었다. 이 학교를 일제 치하에서도 굳건하게 지켜온 교감선생님과 교목 선생의 집에도 뜻밖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북한 땅에 기독교를 말살하였기에 교감과 교목선생과 그 가족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목선생은 어느날 멀리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1년 후 소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불리던 6.25 한국전쟁을 북조선군은 남한으로 물밀듯이 진격했으나 불과 몇 개월 후엔 오히려 북으로 쫒겨오게 됐다. 그리고 함흥은 자유의 도시로 해방이 되는듯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불가불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를 하게 됐다. 영생고교 교감과 그의 가족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고자 유엔군 짚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뜻밖에도 발악적으로 들이닥친 인민군에 의해 교감선생과 부인 그리고 할머니는 집에서 총살을 당했으나 마침 밖에 잇던 15살의 김광수 소년은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유엔군에 의해 가까스레 구출돼 짚차를 타고 흥남으로 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군 수송선에 실려 부산으로 가게 됐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소년 김광수는 부모를 현장에서 잃고 고아가 됐으며 망망한 흥남 앞바다처럼 그의 운명을 점칠 수가 없었다. 총탄을 맞고 쓸어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김광수는 슬피 울었다. 캄캄한 밤에 진눈깨비와 멀리 흥남과 함흥에서 울리는 총소리가 김광수를 무서움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던 광수 소년은 뜻밖에도 갑판 한 구석에 다른 피난민들과 엉켜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여인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광수 아냐? 광수? 교감선생님은 어디에 있어?” 얼마 전에 만났던 교목선생님의 부인과 그녀의 딸을 퀘퀘한 냄새가 나며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흥남철수-피난민 수송선에서 만났다. 자초지총을 광수로부터 들은 부인은 소스라쳤다. “교감선생님도 어머니도 그리고 할머니도 다 살해당했다니... 가엾게도....광수야!” “..........” 소년 광수는 울고만 있었다. “그렇다면, 광수야! 너, 우리와 같이 가는 거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이 되는 거다. 그리고 여기 누워있는 해정이는 너의 누나가 되는 거야.” 이것이 김광수와 한해정의 만남이었다. 16살, 소녀 해정은 생각보다 약했기에 갑판에 누어 끙끙 앓고 있었다. 반동의 여식이기에 아오지로 아버지가 끌려간 후 먹을 음식이 없어 해정은 바짝 마른 가냘픈 모습이었다. 게다가 고열이 나며 갈증이 심한지 광수를 멀거니 쳐다만 볼 뿐, 말이 없었다. ‘아- 해정은 죽어 가고 있구나. 어떻게 하든지 살려야 하는데....’ 소년 광수에게는 해정에대한 긍휼과 연민의 정이 솟구치고 있었다. 해정을 위해 무엇을 할 까? 생각하다가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경비를 하고 있는 미군 병사에게 다가가서 물과 먹을 것, 그리고 약을 달라고 했다. 흑인 병사로부터 그가 받은 것은 비스켓과 쥬스 그리고 해열제였으며 이것은 죽어가던 해정을 회복시켜주는 영양제가 됐다. 아니, 이것은 이들 소년 소녀를 평생토록 가슴속에 품고 살게 해준 사랑의 시작이었다. 부산에 온 광수와 해정은 한 사모님의 아들과 딸이 돼 영도다리가 보이는 천마산 피난민촌에서 살게 됐다. 말이 산다고 했지, 피난민이면 누구나 겪어야하는 굶주림, 추위, 경멸 그리고 절망감을 극복해야 하는 밑바닥 인생이었다. 먹고 살기위해 어머니는 밤낮없이 일을 해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냈다. 어린 광수는 신문팔이, 껌 장사, 구두닦이 그리고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야간고등학교에 다녔다. 가냘픈 해정은 그래도 어머니와 광수의 특별 배려로 어려운 일은 면할 수가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에는 아담과 이브가 살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정해준 낙원에서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었으나 선악과(善惡果)나무의 열매는 결코 손대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듯이, 한 사모님을 모시고 사는 이곳 천마산 기슭에 있는 피난민의 집에도 엄격한 법이 있었다. “해정아, 그리고 광수야! 너희들은 비록 다른 집에서 태어나 각각 살다가 피난중에 이렇게 만나 한 식구가 됐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계획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 가족이요 아들과 딸이요 누나와 동생이다. 그러기에 너희들은 서로를 사란하며 아껴 주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기억하라. 너희들은 남매이기에 결혼은 결코 안 되느니라.” 당연한 경고였으며 윤리였다. 남매의 윤리..... 광수는 어엿한 남성으로 해정은 꽃같은 여인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해정과 광수는 남매라기보다 연인으로 태종대를 찾아와 멀리 오륙도와 그 주위의 바다를 바라다보며 두고 온 함흥을 생각해 보았다. 인민군에게 무참히 살해 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는 어찌됐는지...그리고 아오지로 끌려간 아버지는 살아 있을까..... 마음대로 되지 않은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은 이들을 염세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이 둘은 더 의지하며 마침내 손을 꼭 잡고 결혼을 맹세했다. ‘우리는 결혼한다. 그 때까지 우리는 순결을 지킨다. 너와 나를 위해서....’ 마침내 그들은 서로를 포옹했다. * 가난은 예기치 못한 일을 만들었다. 한 사모님은 피난지에서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그래도 함경도 또순이 처럼 억척스레 일을 해 천마산 판자촌에서 벗어나 영도구 영선동에 작은 집을 마련해 이사를 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21살 된 딸 해정을 돈 잘 벌고 인물 잘난 어느 공군 상상에게 결혼을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나이는 정보계통에서 일을 하며 부산으로 들어오는 밀수꾼들을 감독하는 직위였으니 돈이 수중에 쉽사리 들어 왔기에 생각보다 알부자였다. 나이도 8살이나 위인 이 공군사나이로 인해 20살 난 광수로서는 청천 벽력같았으며 가난한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이 택한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었다. 희망 없는 피난민으로 사느니 차라리 동반자살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둘은 태종대 숲 속으로 들어가 준비해 온 면도칼로 손목의 혈관을 찔렀을 때, 그들이 느낀 것은 가물가물 꺼져가는 혼돈이었다. 인근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 수술을 받고 그들은 살아 날 수가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꼭 지켜야 할 법률인 선악과를 따 먹은 죄와 같았기에 광수는 더 이상 한 사모님을 어머니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해정아! 나를 기다려줘! 성공하여 너를 데리러 올 때까지....”라는 편지를 남기고 광수는 서울 가는 12열차를 타고 말았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더 더욱 힘들었다. 사랑하는 해정을 두고 온 것이 후회스러워 몇 차례 부산으로 내려가 두고 온 집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해정은 돈 잘 번다는 공군 상사와 결혼을 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멀리 간 애인 광수뿐이었다. 말라죽은 왕거미의 빈 껍데기와 번지르한 가식과 허영으로 가득찬 공군 상사와의 결혼은 죽은 삶이었다. 그래도 그들에게서 아름다운 딸이 태어났다. 이름을 신애(信愛)라고 지은 것은 누군가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다. 성장한 딸 신애가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를 읽게 됐으며 격분했다. 일기: “남편이란 언제나 여자보다 나이가 많아야 하는가? 광수는 나보다 어리기는 하나 더 어른스럽고 성숙했다. 그와 같이 있으면 늘 평안했다. 그런데 어딜 가서 왜 안 오는 거야? 나를 잊었나? 아니지...“ 아니, 나의 어머니가 광수라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구나. 지금도. 그렇다면 이건 분명 불륜이다. 불륜! 아버지를 두고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있다니... 그러나 딸 신애도 더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는데, 그녀가 성장해 결혼을 하고 아들을 하나 낳고 나서였다. ‘그럴 수도 있다. 나의 아버지를 보자. 나를 낳아 준 아버지이기는 하나 술이나 마시며 수많은 여자들과 문란하게 살았기에 간경화증을 앓다가 죽지 않았던가? 사회 제도상 아버지는 합법적인 남편일 뿐 그는 애정도 없었으며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고 살다간 기억조차 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광수라는 사람을 보자. 나의 어머니가 가슴속에 이토록 애타게 품고 사는 사람이 아니던가? 딸, 신애가 어머니의 애인인 김광수 씨를 찾는 데는 꽤 많은 노력이 들었으며 특별히 신애의 남편의 도움이 컷었다. * 퍼시픽 헤이븐 공원묘지에서 김광수 씨로부터 들은 그들의 과거와 특히 한해정씨의 얼굴을 생각해 보았다. 궁굼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세월도 빠르지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났다. 뜸했던 김광수 씨로부터 한번 만나자고 하는 전갈이 와 리츠 칼톤 호텔 식당에서 만났다. 놀라운 것은 60살의 환갑을 기념해 부인과 같이 훌로리다에서 바하마 군도를 거쳐 오는 호화 유람선을 타고 왔다고 했다. 그뿐인가 부러워하는 나에게 더 놀라운 사실을 일러주었다. 몇 개월 전에 부인과 같이 한국을 방문하게 됐었는데 그는 기회를 보아 부인을 따 돌리고 부산으로 가 누나가 되는 애인 한해정씨를 만났다고 하며 한숨을 쉬었다. 15살의 소년이 60살의 할아버지가 되어 61세의 할머니가 된 옛 애인을 만났는데 그래도 고마운 것은 죽기 전에 만나본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 그래서 반쪽의 사과라도 내 손에 있다면 행복하다고 했군요, 김광수 씨?” “예. 성공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세상은 공평하더군요. 가난했기에 어머니의 성황에 못 이겨 그녀는 결혼을 했지요. 나도 역시.....” * 김광수 씨가 그의 60살 생일에 30여명의 친구들 앞에서 구성지게 불렀던 유행가가 기억에 난다.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순정을. 옥녀야 잊을 소냐 흘러간 추억. 이제는 모두 잊고 내 품에 잠들어라.”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미리 점치며 사는지도 모른다. 불과 1개월이 지난, 늦은 밤이었다. 나는 오렌지 카운티 검시관의 전화를 받고 소스라쳐 놀랐다. “닥터.강 당신의 환자인 마이클 킴(김광수)이 뉴 포트와 라구나 사이의 캐릴포니아 1번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해 호그 병원으로 이송되어 왔는데, 당신의 기억으로 그 환자가 우울증이나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사용했거나 자살했을 기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라는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없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을 했으나 분명, 그는 우울증 환자였다. 사랑하는 딸을 잃고 가슴속에는 사랑하는 애인을 평생 품고 살아온 우울증 환자였었다. * 며칠 후: 더 가슴 아픈 것은 나의 사랑하는 김광수 씨를 퍼시픽 헤이븐 공원묘지에 장례를 지내면서 나는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닥터. 강. 내가 죽거들랑 공원묘지에 묻어주시고 죄송하지만 부산에 가서 내가 죽어 퍼시픽 헤이븐에 묻혀 있다고 해정 씨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태평양 바닷물에 묻혀 부산 앞 바다까지 찾아 가리라고요.” 나는 그이 말을 들어 주는 것이 가정주치의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어느날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나의 아내에게 한 말은 췌장암으로 죽어 가는 선재가 세상을 뜨기 전에 한번 보고 싶다고 해 서 간다고 했으나 실은 한해정 씨를 만나 그가 한 말을 전해 주고자 해서였다. 아니 내가 전해 주지 않으면 그녀는 소식도 없는 그를 또다시 가슴 아프게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김광수 씨는 얼마 전 뉴포트 해안 길에서 교통사고로 죽어 퍼시픽 헤이븐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식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 그가 말하기를 당신을 보기 위해 태평양 물에 묻혀 부산 앞바다까지 가겠노라고...” “태평양 바다를? 그 먼 거리를?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 가슴속에 있는데...” 그녀는 울고 말았다. 야윈 얼굴에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이 마치 라구나 해안가의 이슬과도 같았다. 그리고 나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전과 같이 퍼시픽 헤이븐 양로원과 묘지를 찾아오곤 했다. * 김광수 씨에 대한 기억은 점점 내게서 사라자고 있었으며 더더욱 한해정이라는 여인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한해정 씨의 딸, 김신애 씨로부터 온 편지를 읽으며 나는 꿈속에서 깨어 난듯했다. “강석호 의사님? 나의 어머니와 김광수 씨의 사랑을 알았을 때 나는 이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불륜이라고 단정했지요. 그러나 나이가 더 들면서 나는 순수한 소년 소녀의 사랑은 고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후 나는 아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위로하기 시작했답니다. 이제 어머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멀리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는 김광수 씨를 어서 속히 만나고자 환장을 해 문무왕 수중묘 근처에 뿌려달라고 했습니다. 반쪽 남은 사과라도 완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살아온 어머니의 사랑 앞에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나는 먼 옛날 의과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과 같이 경주로 해서 감포를 지나가다가 들렸던 문무왕 수중묘가 기억에서 떠 올랐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작은 강물이 동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서 생긴 하늘이 내려준 바다속의 묘지였다. 신라의 혼이 살아 움직이는 그곳에서 한해정씨의 사랑은 멀리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들은 어느 곳에서인지 분명 만나리라. * 사람들은 나에게 묻곤 했다. “닥터 강? 당신, 정신 있소? 라구나 바닷가에서 무엇을 하는 거요? 물을 항아리에 가득히 퍼부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요? 의사가 환자는 안보고...” “아, 예....바닷물 속에 들어 있는 한해정 씨의 혼을 항아리에 담아 퍼시픽 헤이븐에 묻힌 김광수라는 내 환자의 묘지에 부어 주어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게 하려고요.” 한국 펜문학 2012년, 2002년 월간문학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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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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