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푸른잔디
2013.03.16 21:55
단편 소설:
제목: 고향의 푸른 잔디
1.
공항 관제탑 뒤편에서 저녁 해가 붉은 피를 토하며 이글이글 유화(油畵)를 그리고 있다. 잠시 후 베니스 비치(Venice Beach) 바닷물 속으로 슬그머니 빨려 들어가자 주위는 삽시간에 캄캄해 졌다. 정확히 5분 후, 붉은 섬광이 바닷물 속에서 용이 내뿜는 불처럼 지평선 위편으로 불끈 솟구쳐 오르더니 다시 바닷물 속으로 용광로에서 흘러나온 쇳물처럼 완전히 녹아들어가 버렸다. 내 주위는 칠훍같이 캄캄해져 옆을 구분하기가 힘들어졌다. 하루가 끝났으니 하던 일 다 중단하고 잠이나 자라고 명령하는 듯하다. 두 살 더 많은 누나의 장례식은 4시간 전에 완전히 끝나 30여명의 조객들은 묘지를 떠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 간지 오래였다. 누나가 들어 있는 매끈한 나무 관을 땅 속으로 내린 후, 인정사정없이 흙을 부어 말끔히 덥고 그 위에 초록색 잔디로 덮어 버리니 모든 것이 끝장이 났다. 불과 한 시간도 안 걸린 시간에 이생을 하직하고 저생의 경계선을 넘었으니 이젠 모든 것을 잊어야 했다.
그러나 땅속에 묻힌 누나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은 누나가 혹시라도 초록 잔디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땅위로 고개를 내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공원묘지 순찰차가 헤드라이트를 밝게 비추는가 했는데 어느새 검은 제복을 입은 흑인 관리인이 저벅저벅 다가와 내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선생님, 이제 공원묘지의 문을 닫습니다. 마음 아프시겠으나 공원 규칙상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내일 낮에 다시 오시든지.”
“예.” 나는 볼에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면서 땅 속에 묻힌 누나와 작별한 후 세워둔 차로 힘없이 걸어가야 했다.
“선생님, 장례 지내고 사 나흘이 문제랍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가족들은 매일같이 찾아온답니다. 그런데 그건 순전히 착각이랍니다.”
묘지 관리인이 설명해준 준 충고처럼, 나도 죽은 누나가 다시 살아 날거라고 믿고 있었다.
*
32년 전,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죽어 여기 로즈 힐에 묻혔다.
-장례지내고 돌아 온 그날 밤, 어머니가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 돌아 왔어요! ” 나는 소리를 치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뭐시! 어머니가 살아 왔다고?” 아버지도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밖에 없었다.
“석호야! 네가 허깨비를 본거야.” 실망한 아버지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다음날, 나는 혹시나 해서 로즈 힐로 혼자 찾아 갔다. 묘지 관리인에게 지난밤에 어머니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으니 묘지를 파 확인하자고 요청했다.
“강석호씨? 아니 닥터 강! 암 전문 의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쇼?” 관리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처다 보았다.
“분명 살아서 돌아 온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강석호씨? 어제 말했지요. 장례 후 며칠 사이에 가족들은 환상을 보고 묘지로 다시 찾아온답니다.”
“.......” 나는 마음속에 큰 혼돈이 찾아 왔었다.-
*
그리고 27년 전, 아버지는 중풍으로 죽어 어머니 옆자리에 가지런히 묻혔다.
그리고 3일전, 누나마저 죽어 아버지 옆자리에 나란히 오늘 묻혔다. 세 번째 치룬 장례이건만 나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란 끈끈한 정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나 관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
옛날을 회상해 보면, 누나와 나는 빨간 장미꽃을 들고 어머니날, 아버지 날 그리고 기일 날마다 여기 로즈 힐, 무덤에 왔었다. 등뼈(胸椎)를 다쳐 반신불수가 되어 휠체어에 앉아 내가 밀어줘야만 다닐 수 있는 누나와 나는 강춘영, 강현철이라고 쓰여 있는 대리석 묘비 앞으로 다가갔다. 중간쯤에 가로세로 10센티 깊이 18센티 되는 구멍에 뎅그러니 놓여 있는 녹이 슬어 거무튀튀한 철제 꽃병에 장미꽃을 정성들여 꽂아 놓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 번 큰절을 올렸다. 잠시 후 우리는 그들이 좋아 했던 흘러간 노래와 찬송 몇 곡을 살며시 불렀다. 눈물이 팽 돌았다. 물끄러미 지난 일들을 생각하다보면, 웬일일까? 너무나 행복했다. 마치 부모와 우리가 같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물론 내 고향, 청주 생각이 단골 메뉴였다. 특별히 무심천(無心川) 뚝 방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와 맑은 물속에서 헤엄치던 송사리 떼들이 눈에 더 간절했다.
그 푸른 공원 잔디에 누어 풀 베개를 베고 푸른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노라면, 같이 뛰어놀았던 동네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들! 어디에 가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사랑했던 ‘김정선(金貞善)은 어디에 가 있을까? 무엇을 할까? 누구하고 살고 있을까? 행복할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 휠체어에 앉아 졸고 있는 누나를 데리고 황급히 공원묘지를 빠져 나오곤 했었다.
*
정확히 말하면 5일 반전에, 휠체어에 의존해 살아온 누나가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입원 이틀 만에 죽었다. 누나의 시신은 어머니, 아버지 다음에 이어진 푸른 잔디 묘지에 매장되었으며 강석화(姜錫花)라는 대리석 묘비가 가지런히 연결되었다. 물론 대리석 묘비는 3개월 후에 땅이 궂은 후에나 갖다 놓게 된다고 묘지 관리인이 말했지만....
생각해 보니 지난 6일, 별로 먹은 것도 없었으며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장의사와 사람을 만나고, 친구 그리고 교인들에게 전화를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쳐 쓸어 질것 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고추잡고 푸른 잔디로 덮인 묘지에서 일어나 차로 오는 동안, 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누나가 내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젠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면 되었다. 누나라는 존재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지난 27년, 장애자가 된 누나 때문에 내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핑계 같지만 결혼도 못했으며 교수자리도 날려버렸다.
그러다 보니 내 나이도 어느새 68세의 노인이 되었다. 이젠 내가 죽어 땅에 묻힐 차례가 된 셈이다.
허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후련한 것은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에 따라 장애인, 누나가 죽을 때까지 돌보아야 했던 의무와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것만은 확실하다.
*
공원묘지를 떠나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있는 콘도하우스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기진맥진해 들어오니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싸늘한 공기가 내 코를 시큰하게 때렸다. 우중충하며 허전했다. 누나가 있을 때는 휠체어를 밀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가 이층으로 들어가는 불편함은 있었으나 사람냄새가 훈훈했었다. 그러나 이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층층대를 걸어 나 혼자 올라 갈 수가 있는데, 왜 그럴까? 사람 냄새가 없지 않은가....
전기 스위치를 눌렀다. 밝은 불이 들어 왔으나 아무도 나를 반기는 사람도 짐승도 없었다.
며칠간 정황이 없다보니 설거지를 하지 않아 음식 썩는 냄새가 내 코를 시큰하게 했다.
“아무도 없네...누나는? 와, 가버렸네. 나 혼자네....” 나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2.
오늘 장례를 치룬 누나(姜錫花)가 좋아했던 노래가 있었다.
-머나먼 저곳 스와니강물,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청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던, 꿈 많던 젊은 여류화가, 강석화가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서양화과 전임강사인 선배 화가와 결혼을 약속하리만큼 뜨거운 사랑을 했는데 어이없는 사고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누나는 슬픈 마음을 달래느라 ‘스와니 강’을 즐겨 불렀다. 아니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고 가슴을 쥐어짜면서 불렀다.
-4학년인 누나와, 의예과 2학년인 우리는 당시 주월사령부(駐越司令部) 참모장인 아버지 덕분에 종로 5가에 있는 단독 주택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학교에 다녔다.
누나는 6살 연상인 선배 화가와 같이 도봉산으로 가을 단풍을 보러 같이 갔었다. 그들은 즐겁게 손을 잡고 걷기도 했으며 숲속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사랑의 대화가 오고 갔으며 졸업하면 곧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다.
선배는 사랑스런 누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영원히 간직하려고 사진기를 들었다.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중에 누나는 뒤로 조금 물러나다가 미끄러져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생긴 불상사였다. 1,5미터라면 그리 높지 않지만 뒤로 떨어졌으니 밑에 있는 돌에 머리와 등뼈를 부딪치면서 정신을 잃었다. 붉은 피가 땅바닥에 여기저기에 지도를 그렸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애인은 누나를 등에 업고 산을 내려와 동네사람들이 불러준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혼수에 빠져 중환자실에 입원되었다. 흉추가 불어지면서 척추 신경이 끊어졌다.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반신불수가 돼 휠체어에 의존해 살아야했다. 게다가 지주막하 정맥 출혈로 인해 뇌수술을 받아 고인 피를 뽑아냈다. 더구나 오른편 팔목이 심하게 골절이 돼 오른쪽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로 3일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2주일, 6주가 돼서야 퇴원을 했다.
다행이도 더듬더듬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외편 손은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뇌성마비 환자처럼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져 얼간이 같았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소변보는 튜브를 갈아 줘야 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반드시 도와줘야 했다.
“생명을 건진 것만도 다행입니다.” 신경외과 교수는 최선을 다했다고만 강조하였다.
누나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능력이 없었다.
그래도 화가가 되고 싶었던 희망은 여전했는지 한 손으로 그림을 그려 보려고 하다가 잘 되지 않자 낙담이 돼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이 소식이 월남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해지자 아버지 강 대령은 전쟁터를 누비는 군인이기에 딸이 병신이 됐는 대도 가까이에서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더 마음 아픈 것은 철석같이 믿었던 누나의 애인이 연락을 끊고 마침내는 얼굴을 내 밀지 않았다.
애인으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반신불수가 되어 대. 소변도 도와줘야 하는 가하면 머리 수술로 인해 바보처럼 된 애인을 아내로 맞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망과 분노로 인해 누나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아니 무서워했다. 오로지 남동생인 나, 강석호만을 믿었다. 나 역시 불행한 누나를 위해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가 전담했지만 나도 시간이 되는 대로 휠체어를 밀어주고 대소변도 도와주었다. 음식도 먹여 주었다.
이때부터 누나는 ‘스와니강’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 옛날의 꿈, 아, 그리워라 멀고먼 옛 고향.’
누나의 나이 22살, 꽃다운 나이었으나 잠간의 사고로 인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내가 곁에 있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처참한 장애인이 되었다.
1964년 가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
1965년 1월, 20년을 살아 온 고향 청주에서 원주로 이사 온지 2년이 됐다. 겨울 방학을 이용해 나를 찾아 온 사람은 청주에 살고 있는 김정선이었다.
우리는 청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옆집에 살던 처녀, 김정선은 어려서부터 한 식구처럼 나를 좋아했으며 누나를 따랐다.
장애인이 되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누나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문득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와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생각됐다.
‘정선아! 누나를 그토록 사랑하다니, 그렇다면 너는 내 동생이요 한 가족이다.’
나는 문득 큰 진리를 터득한 느낌이었다.
기술고등학교를 1월에 졸업하고 4월에 청주 간호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입학하기 전 2-3개월 동안 전신전화국에 교환양으로 취직해 이미 일을 시작해 학비를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간호학교 3년을 마치고 훌륭한 간호사가 돼 누나를 정성껏 돌보아 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내 마음속에 따듯한 강물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내 누나를 정성껏 돌보아 준다면, 당연히 그녀를 내 몸처럼 평생 돌봐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비록 운이 없어 김정선 마저 누나처럼 장애인이 돼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거리낌 없이 그녀의 대 소변까지도 받아 주리라고 맹세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나와 한 마음을 갖은 나의 지체이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을 다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붉게 핀 사과 같았으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 그 얼굴에 내 마음이 녹아 있는 듯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계방을 운영해 겨우 의식주를 해결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몇 개월 전부터 갑작스레 망막분리증으로 시력을 잃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전신전화국의 교환양이 돼 밤에 일하고 그 돈을 모아 등록금이 싼 청주 간호학교(3년제)에 입학을 했다. 1965년 4월이었다.
청주 간호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서울의대 본과 학생인 나를 몹시도 자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심한 불안감을 느끼는 듯했다.
“오빠는 서울의대 학생, 나는 청주 간호학교 학생이니 상대가 안 되지, 서울에 있는 일류 여대생들이 오빠를 따르겠지...,”
“정선아? 청주 간호학교가 어때서? 네가 간호사가 되는 것, 아주 좋아. 우리 같이 일하자. 의사와 간호사! 어때?” 나는 진심으로 말했으나 그녀는 그렇게 받아 드리지 않았다.
서울의대학생인 나를 믿지 못했다. 분명코 때가 되면 정선을 버리고 일류 여자를 택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호사다마라고 했듯이, 불운이 겹치기 시작했다. 주월사령부 참모장이인 아버지가 혁명주체 세력으로부터 배제되어 실권도 없는 한직을 받아 월남을 떠나 1965년 초에 귀국했다. 권력에서 밀린 아버지는 우울한 마음과 배신당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한국 천하를 호령하는 육사 8기생이긴 했지만 실권을 잡은 동기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면서 장군 진급에서 탈락 되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대령으로 명예 제대를 했다. 말이 명예 제대이지 쫒겨난 셈이었다. 그뿐인가 언제 어떤 보복성 위험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다. 불평불만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거의 강제로 미국 이민이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불구가 된 딸을 위한다는 이유로 미국, 칼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오게 됐다. 1967년이었다.
가족 이민이기에 나에게도 이민의 기회는 주어졌으나 의과대학에서 공부해 의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이민에서 빠졌다.
휠체어에 탄 누나와 부모가 김포 공항을 떠나 미국으로 가버리니 갑자기,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된듯했다.
“석호! 열심히 공부해 꼭 의사가 돼 미국으로 와!” 아버지의 비장한 명령이 내 귀에서 쟁쟁 울렸다.
*
1968년, 봄, 내 애인 김정선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 후 정식으로 간호사가 됐다. 그리고 내수 보건소에 취직이 됐다. 취직이 되자 그녀는 눈먼 아버지를 먹여 살리는 당당한 여성 가장이 됐다.
망막세포가 탈락돼 맹인이 된 아버지를 먹여 살릴 수가 있었다.
군 현역에 있을 때, 아버지는 아버지를 형님으로 따르는 정선의 아버지를 특별히 도와주곤 했었다. 물론 이민을 가기 전에도....
정선은 아버지의 도움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첫 월급을 받았다고 기뻐하며 넥타이를 사들고 왔다. 나는 감격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고마워’ 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정선은 내 손을 꼭 잡고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다. 그리고 ‘미국에 간 누나도 내가 맡을게.’라고 말했다.
“사랑해, 정선아.” 나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정선은 사랑한다는 말은 믿었으나, 결혼에 대해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한국 제일의 서울의대생이 가난한 지방 간호사를 거들 떠나 보겠는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불신의 의구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조선 시대의 양반 도령이 상놈 처녀를 보고 결혼하겠다고 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미국으로 이민 간 아버지의 강력한 명령 때문이었다. “졸업하면 곧바로 미국으로 오라. 결혼은 미국에 와서 내 맘에 드는 규수와 내 앞에서 하라!”-
정선은 딱하게도 눈먼 아버지를 봉양하여야 했기에 미국에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미국을 생각한 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한국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미국에서 살 것인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국으로, 정선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장애인이 된 누나를 네가 평생 도와 주거라!”라는 아버지의 또 다른 명령이었다.
‘장애인이 된 누나는 나 없이는 못산다.’ 라는 강박감이 언제 부터인가 내 마음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 장애인이 된 누나를 위해 나를 희생하자.” 나는 내 마음을 다스렸다.
“석호 오빠? 미국에 가지 말고 여기 한국에서...나와 같이 살자! 오빠!” 마침내 나의 사랑 정선은 체면을 다 내 팽개치고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어!, 정선아! 그래. 그래.” 나는 “그래, 그래” 라고 수락했지만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허공에 뿌린 지킬 수가 없는 공허한 대답이었다.
4.
1969년 2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에 함박눈이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나는 마침내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은근히 기대는 했지만 놀랍게도 나는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기에 대통령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의과대학 수석 졸업에 대통령상을 받는 나는 앞길이 훤히 틔인 행운아였다. 아니 100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거나 다를 바가 없는 행운아가 됐다.
-원하기만 하면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의과대학 교수가 되는 것은 100% 보장되었다.
의과대학 교수는 의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길이기 때문이다.-
일간지에 나에 대한 기사와 인터뷰가 며칠째 오르내리고 있었다.
“의대수석, 대통령 상 수상자 강석호. 장래, 암 전문 의사, 교수가 희망.”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내 사진이 대문 짝 만했다.
이 영광스러운 졸업식장에 가족은 없었으나 청주에서 올라온 김정선이 나를 축하해 주었다. 그녀의 눈에는 ‘석호씨, 졸업했으니 나와 결혼해 줘요.’라고 쓰여 있었다.
*
졸업 후 2주, 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다.
-100% 보장된, 대학병원에서 암전문의사가 되는 수련을 시작하느냐, 아니면 100%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미국으로 가야 하는가? 눈먼 정선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에 가서 장애인이 된 누나와 같이 살아야 하는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장애자가 된 누나를 돕기로...
미국으로 가기 위해 육군 군의관, 3년을 복무해야 했다.
100% 보장된 교수의 길과 김정선과의 결혼도 포기한 엄청난 희생이었다.
“그래, 아버지와 누나를 위해 나를 희생하자!” 나는 10주간의 군사 훈련을 마치고 군의관 중위로 임관돼 강원도 인제로 갔다.
군의관 시절, 나의 사랑, 김정선은 강원도 산골로 나를 찾아 와 웃기도 했으며 울기도 했다.
눈먼 아버지를 두고 차라리 나를 따라 미국에 가고 싶다고 하며 ‘엉엉’ 울었을 때 나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순진한 정선의 가슴속에 시퍼런 비수를 꽂고 흔드는 망나니라고 생각됐다.
1972년, 6월, 마침내, 육군에서 제대를 한 후 미리 신청한 대로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김정선과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각자 갈 길을 약속했다. 야속한 운명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녀는 피를 토하듯이 슬피 울었다. 그 후 우리는 편지와 전화 연락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 서로 각자의 길로 가자고.....
‘비겁한 놈...’이라고 나 스스로를 학대했다.
*
미국에 온 나의 길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뉴욕에서 인턴, 내과 레지덴트와 암전문의 과정, 도합 6년을 혼자 살았다. 로스앤젤스로 가 부모들을 만나며 누나를 돌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나를 전담했었다.
의대 수석, 대통령상을 받은 것에 걸맞게 나는 뉴욕에서 훌륭하게 암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암전문의 시험에도 당당하게 합격해 마침내 뉴욕 의과대학 암센터에서 전임강사자리를 얻게 됐다. 1979년 10월이었다.
내 나이 34세, 앞길이 탄탄하게 보장되었기에 여기저기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거절했다.
정선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번번이 좋은 기회를 놓쳤다. 아니 일부러 날려 보냈다.
*
평소에 심장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 3월, 돌연 사망했다.
“어머니! 어머니를 위해 나는 무엇을 했던가요?”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었다.
부랴부랴 어머니를 로즈힐 공원묘지에 장례를 지내고 난 후, 나는 지금까지 나의 행복과 명예를 위해서 살아 왔다고 생각했다. 암 전문의사가 되기 위해서였을 뿐, 누나를 위한 것이 전혀 없었다. 마음에 가책이 들었다.
“아버지? 로스앤젤스에서 직장을 구하든지 개업을 하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누나를 돕기 위해 뉴욕의과대학에서 얻은 교수(전임강사)직을 사임하였다.
“닥터. 강?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뉴욕의대를 떠난다면 어디 가서 이런 자리를 구하겠나? 잘 생각해 보게.” 동료 의사들의 말이었다. 어머니가 죽자 이젠 나와 아버지가 불구자 누나를 맡아야 했다.
*
그러기에 나는 외로운 아버지를 돕고 같이 살려고 로스앤젤레스로 무조건 이주했다.
-196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온 아버지는 한국에서 누렸던 육사 8기생, 대령의 특권을 모두 포기하고 세탁소를 운영했다.
‘육사 8기, 대령이 세탁소 주인이라?’ 말도 안 되는 변화였으나,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세탁소는 상상도 못해본 직업이었다. 영어 미숙에 기술이 없다보니 몸으로 때우는 세탁소가 한국인, 특히 퇴역, 육군 대령에게는 적격이었다.
불구자인 누나는 특수학교에 입학했으며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아버지와 같이 일을 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찾아 온 군인들, 특히 육사동기생으로 출세한 장성들과는 일절 만나지 않았다. 구걸을 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몰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은둔 생활을 하다 보니 아버지는 자연 술을 많이 마셨다. 자주 눈시울을 적시며 울었다고 했다. 그래도 아들이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환하게 웃었다고 했다. 그리고 전문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 활짝 웃었다고 했다. 좋은 혼처를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했다.-
5.
누나의 장례식이 끝 난지 어느새 일주일 되었다.
로즈힐 공원 묘지 한 귀퉁이에 나란히 누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나의 무덤 앞에 장미꽃이 끊이지 않고 놓여 있어 마치 작은 화원을 옮겨 온듯했다.
어머니만 묻혔을 때는 아버지, 누나 그리고 나 셋이 찾아왔기에 사람 냄새가 훈훈했었다. 그러나 이젠 나 혼자만 달랑 찾아오다니, 외로웠다. 마치 죽은 사람들로부터 버려진듯했다.
문득 생각나는 사건이 떠오른다.
-과연 암 전문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일반 사람들은 암 전문의사는 어떤 암이든 다 치료해 살리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암 의사라고 암을 고칠 수가 없었다.
*
존경하는 선배 의사가 이 순간에 나를 위로한다.
암전문의사 수련과정을 받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그 선배는 서울의대가 다 알아주는 천재였다. 나는 이 선배의 영향을 받아 암전문의사가 되었다.
그 선배가 ‘의사가 할 일’을 정확하게 설명해줬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비록 내가 암 전문 의사라고는 하나 내 힘으로 암을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의사로서 내가 암전문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어 가는 암 환자들을 위로하는 일, 그리고 그들과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
그렇다. 죽음 앞에서 가장 필요한 치료는 ‘같이 있어 주는 위로’일 뿐이라고 했던 그 선배와 교통사고로 인한 뜻밖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나는 암 전문의사(癌 醫師, Oncologist)가 되었다. 의대 수석에 대통령상 수상자의 선택은 이러했다. -
*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때가 생각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5년 후였다.
홀로 세탁소를 운영하랴, 불구의 딸을 도와주랴, 아버지는 과로했으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국에 와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한국 육사 8기 육군 대령이 할 일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묵묵히 이 일을 해 냈다.
고장난 세탁기계를 고친다고 일요일 오후 세탁소로 나갔는데 밤늦게 까지 들어오질 않았다. 예감이 이상해 찾아가 보니 불이 켜진 세탁소 안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쓸어져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 굳 사마리탄 병원으로 실려 갔다. 많은 의사들의 치료 덕분에 의식은 회복했으나 예측 못할 상왕이었다.
“석호야! 너만 믿는다. 네 누나를 돌보거라.”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석호야, 누나를...석호야 누나를...석호야 누나를.....석호, 누나. 석호 누...누...누..누나.” 이 말만 반복하다가 운명했다. 아버지 나이 고작 61세였다.
어머니 옆 자리에 장례를 지냈다.
-참담한 일생이었다. 청주 사범학교에서 수재로 알려졌던 아버지.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육사에 입학했다. 그 유명한 8기로 졸업하자마자 6.25전쟁터로 총알받이 소위로 출전했다.
총알이 그를 비켜 갔는지 아버지는 불사조처럼 살아 숨 쉬었다. 진급 그리고 또 진급을 했다.
1961년, 원주 1군사령부 총참모로 5.16군사혁명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주체가 아니었기에 몇 년 후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왜? 아버지는 묵묵히 세탁소 일을 했나? 그리고 말없이 세상을 떠났다. 아니 사라졌다.
육사 8기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 장례식에 찾아 온 사람도 그리고 화환도 없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옆에 조용히 묻혔다.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서 멀어졌다. -
아버지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지만, 나에게는 큰 멍애가 내 목을 꽉 조리고 있었다.
그토록 큰 멍애란 “석호야! 네 누나를 돌보거라!”
아버지의 간절한 유언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지난 27년간 이 유언을 충실히 지켰다.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한 일은 누나를 돌봐줄 ‘도움이 아주머니’를 찾는 일이었다.
가까스로 50세가 조금 지난 한국인 도움이 아주머니를 구했다.
암 전문의사 개업을 하는 낮 동안, 도움이 아주머니는 누나의 음식을 차려 주고 집안 빨래, 청소 그리고 누나를 목욕 시켜주는 일로 꽤나 바빳다. 6시 이후에 퇴근을 하던지 집에서 자도 되었다.
누나와 같이 있기 위해 개업시간도 반으로 줄였으며 입원환자도 사양해야 했다.
누나와 나는 분명 2촌 지간이다. 한 부모의 피를 받았으니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누나를 위해 음식 장만하고 옷도 사 입혀야 했으며 잠자고 숨 쉴 잠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 나의 일이었다. 그러나 목욕 시키는 일과 속 내의와 팬티를 갈아입히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내 나이 40세 누나의 나이 42세 였다.
*
암 전문의사요 대통령상을 받은 경력으로 인해 나에게 괜찮은 여성을 결혼상대로 소개 받았다. 누가 보아도 인물이 좋고 학력도 좋은 규수가 여러 명이 있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의사들의 세계에서는 학벌과 가문이 결혼의 척도를 가르는 잣대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탠포드대학과 칼리포니아 약학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여성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녀는 키도 훤출하며 몸매가 뛰어나 한 눈에 ‘와!’하는 탄성이 나왔다. 게다가 마치 성모님처럼 온화하게 보이며 말 소리도 잔잔하였다. 더 좋은 것은 남자에 대한 존경심이 눈에 돋보였다.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너무나 우아했다. 사치스럽지 않은 평범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훌륭한 규수였으나 오히려 내게는 괴분한 규수였다.
‘이토록 귀한 규수와 결혼한다면 그녀는 장애인인 누나 때문에 평생을 희생하리라. 안되지, 대소변도 치우고 기저귀도 갈고. 안되지. 안돼!’ 나는 그녀와 결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결혼해 누나를 위해 많은 희생을 기쁜 마음으로 하겠노라고 약속하며 사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예스”라고 대답을 못하고 “미안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라고 거절을 했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요?” 라고 물었다.
“예.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말없이 내곁을 떠나갔다.
안타까웠다. 나도 남자요, 한 집안의 아들인데 누나로 인해 좋은 혼처도 사양해야 하다니...
나도 남자이기에 때로는 아가씨를 안고 싶었으며 비오는 날은 같이 우산을 쓰고 거닐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아이를 갖아 학부형이 되고 싶었다.
아내와 같이 훌훌 배를 타고 멀리 멀리로 여행가고 싶었다. 아니 더 하고 싶은 것은 외로움을 나누고 싶었다.
*
늦은 밤, 집밖, 마당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총총했다. 북극성, 오리온좌 그리고 이름 모르는 저기 저 하늘의 별들이 내 눈 앞에서 소근댄다.
어린 시절, 청주 무심천(淸州 無心川)가에서 고기잡이 하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이 떠 오른다.
밤이 돼, 원두막에 앉아 별을 헤던 그 밤도 생각난다.
문득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석호야! 내일 낮에 무심천에 가서 메기를 잡자.”
“메기?” 나는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단지 별들이 총총히 빛날 뿐....
그런데 그 목소리는 분명 김정선의 어린 시절의 그 목소리였다.
“정선아!” 나는 작은 소리로 불러 보았다.
“석호야!” 작은 대답이 들려왔다.
아! 김정선의 가는 목소리였다. 어느새 40년이 되었다. 서로 각자의 길로 가자고 한 것이...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눈먼 아버지는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신다면 90살이 넘었을 텐데....
40년? 40년이면 거의 반세기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미국이란 이 거대한 외로움의 나라에서 저 하늘의 별처럼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았단 말인가?
내 나이 68세, 머리가 희끗희끗하구나. 마치 함박눈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선아, 너는?’ 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저 별 중에 숨어 있을 김정선을 찾고 있었다.
6.
웬일일까? 나는 마치 지갑 속에 감춰두었던 100딸라 짜리 지폐를 찾듯이 나의 사랑, 김정선을 찾았다.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을 통해 며칠 후 나는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는 내수 보건소에서 간호사로 평생 봉사하다가 퇴직을 해 내수 국제 공항근처 아파트에서 살고 있음을 알았다. 세종대왕이 특별히 찾아와 마셨다는 초정 약수터가 멀지 않은 곳에 초정노인병원이 있었다. 나무로 된 벤치 주위에는 큰 나무가 가 있었으며 꽃이 만발했다.
그녀는 혹시나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눈먼 아버지의 성황에 못 이겨, 노처녀가 된 그녀는 상처한 의사를 만났다. 지방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와 결혼해 30여년을 말없이 살았다고 한다. 먼 하늘을 바라다보며 한숨을 쉬는 버릇도 있었다고 했다.
폐암으로 남편이 죽자, 그녀는 60세의 나이로 정년퇴직을 하고 음성, 꽃동네에 가서 노약자를 봉사하는 착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고 있었다.
김정선이라기보다, 세실리아(Cecilia) 김으로 불리 운다고 했다.
‘정선아? 아니, 세실리아씨?’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 때마다 그녀와의 추억이 살아나는 듯했다. 새로웠다.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아니 그녀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마치 코키리가 죽음을 알게 되면 아이보리코스트(상아해안)의 어느 골짜기를 찾아가 죽듯이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연어가 4-5년 후면 어김없이 멀리 태평양을 가로질러 알라스카 해안의 작은 강가로 찾아 올라가 죽듯이 나도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고향, 청주. 무심천으로 가 송사리, 메기를 잡고 싶었다. 우암산에 올라가 참꽃(진달래)을 따 먹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김정선을 다시 만나 손을 잡고 메뚜기가 뛰어다니는 논길을 걷고 싶었다.
“정선아!” 나는 별을 헤듯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다음날, 멀리 한국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17번지로 편지를 써 보냈다.
-사랑하는 김정선씨. 아니 보고 싶은 세실리아에게.
세월이 물같이 흘렀군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끔 흥얼대며 부르던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는군요.
‘이 강산, 낙화유수(落花流水) 흐르는 물에 새파란 잔디 엮어 맺은 맹세야...’ 아!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네요. 40년의 세월이 너무 빨라서 그런가보죠. 정선씨! 어머니는 미국에 와 몇 년 못 사시고 일찍이 돌아가셨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가셨답니다. 결국 나는 누나를 돌보며 살았지요.
몇 주전에, 누나마저 죽었답니다. 누나가 좋아 했던 노래, 아시죠?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훌로리다에 있다는 스와니강을 좋아 했지요.
이제 누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보니, 정선씨? 나는 갑자기 나이 많은 고아가 됐군요. 68세의 고아....
한국에서 쫒기다시피 온 아버지와 여기 미국에서 보낸 세월이 마치 물거품 같네요. 고향을 잃고 방황한 이방인이었군요.
나와 색깔이 다른 인종과 섞여 살아온 40년이 마치 물거품 같군요.
내게는 물거품 같은 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또 다르네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이곳에 보냈다고 하네요. 그러나 내게는 명쾌한 대답이 아니네요.
그렇다고 이제 모든 것을 접고 고국에 간들, 내 한 몸 바람 막을 집도 없으며, 따스한 밥 먹을 곳도 없군요.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나를 반겨줄 부모, 누나 그리고 친구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군요.
정선씨?
먼 하늘에서 빛나는 집시의 별처럼, 마야의 별처럼, 쉐난도아의 별처럼, 그렇게, 그렇게 빛나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인생이겠지요.
한 때는 대통령상을 받아 앞 길이 창창하다고 신문에도 났었건만, 그래서 암 전문의사의 길을 걸었습니다마는, 이젠 나도 여기 미국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나가 장례된 로즈 힐 공원묘지에 묻혀야 하겠지요. 그리고 더 슬픈 것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거지요. 정선씨? 우울하네요. 편지를 계속해 쓰고 싶지 않네요. 아니 힘들어서 오늘은 여기서 접겠습니다.
고향 잃은 방랑자의 넋두리라고 생각하시고, 행여 이 편지를 받게 되면 몇 자 소식을 전해 주소서.
방랑자 강석호 -
*
나는 더 이상 편지글을 계속하지 못하고 종이를 세 번 접어 흰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침을 발라 봉투 끝을 봉했다.
다음 날 아침 오피스로 가는 도중에 차에서 내려 US POST라고 쓴 우체통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마음조이며 매일처럼 답장을 기다리는 ‘늙은 소년’이 됐다.
과연, 그녀는 내게 답장을 해 줄까? 설령 답장이 오더라도 원망의 글이겠지. 그녀의 인생을 무참하게 만든 것이 바로 나였으니까, 그녀의 가슴속 깊이에 비수를 꽂아 응어리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나 강석호였으니까.
눈먼 아버지 때문에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나를 포기했던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한(恨)’이 뭉쳐 있을까?
40년의 혜어짐이 이토록 길고 힘든 세월이었나?
그녀도 힘들었지만 나도 그러했다. 희생도 많았다. 내게 찾아온 행운을 잡아 보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사랑하는 정선을 포기한 것도, 대통령상을 받은 그 특권도 포기했으니 안타까웠다. 그뿐인가 좋은 규수도 포기했다.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외로움’ ‘외로움’ 바로 외로움뿐이었다.
누가 나를 알아줄까? 누가 나를 위해 보상을 해 줄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문득 찬송시(讚頌詩) 한 귀절이 내 귀에서 뱅뱅 돌고 있다.
“주님을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는, 얼마나 좋으랴.”
나는 이 가사를 음미하며 그녀에게서 올 편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정선을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는 얼마나 좋으랴...’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다. 그녀의 얼굴이.
*
간절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리며 매일 우편함을 열어 보았다.
우체부만 나타나도 가슴이 설레였다. 죄 지은 사람이 경찰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불안감도 같이 있었다. 나에 대한 한과 슬픔을 나열한 편지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편지를 보낸지 22일 되던 날, 나는 그녀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가 보낸 편지처럼 얇은 것으로 보아 나를 꾸짓는 원망의 편지라고 생각을 하니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
_“사랑하는 석호씨.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흐르다니,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석호씨! 저의 대답으로 톰 존스(Tom Jones)의 노래, '고향의 푸른 잔디 (Green Green Grass of Home)'를 보내 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까지 돌아가고 이젠 석호씨와 나만 남았네요. 죽기 전에 소식을 받아 다행이네요.
-고향에 돌아오니 산천은 그대로 있네. 기차에서 내리니 부모님이 마중 나왔네. 언덕 아래를 보니 , 붉은 입술에 금발의 머리를 한 나의 사랑, 매리가 달려오네....-
석호씨, 비록 고향에 오면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고 산천도 변했지만 머리 희고 허리 구불어진 김정선이 석호씨를 기다린답니다. 어서 오세요. 우리 손 잡고 고향의 푸른 잔디밭을 거닐고 싶어요.
무심천에 가서 고기 잡고 우암산에 가서 참꽃을 따고, 푸른 잔디밭에 누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요. 석호씨.
정선드림. “
*
‘아- 정선아! 고마워. 고마워.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고 고향의 푸른 잔디밭이 있는 그곳으로 갈게.
나를 기다려 주는 그대가 있는 한 나는 외롭지 않아.‘
나는 편지를 손에 들고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고향의 푸른 잔디가 그리고 정선의 얼굴이 보인다. 나를 향해 흔드는 두 손이 보인다.
“어서와. 석호씨.”
“사랑해, 정선아.”
소설 끝.
(주: 서울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어느 후배 의사의 순애보를 마음에 두고 쓴 소설임.)
저자: 연규호, 소설가
내과 전문의사
미주. 한국 문협. 소설가 협회
펜(Korea & USA)
미주 펜 문학상(소설)
장한 연세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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