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내가 만든 감옥

2012.12.09 13:32

연규호 조회 수:547 추천:56

13.단편 소설: 내가 만든 감옥. 1. 콧수염을 가즈런히 기른 월남 계 우편배달부가 내손에 전해 주고 간 두툼한 서류를 뜯어보니 미국 연방정부에서 제공하는 메디캐어(Medicare 의료보험)카드가 들어 있었다. 내 나이 65세, 은퇴한 할머니가 된 것은 서운하나 예측 못할 늙은 노년의 건강을 보장 받게 되니 마음 든든하다. 한 가지 더, 나를 흥분 시킨 것은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은퇴연금으로 875딸라가 매달 내 손에 들어온다는 한통의 얇은 통지서였다. “와! 875딸라!” 나는 감격해 소리를 쳤다. 남편에게 지불되는 사회보장 보조금 815딸라에 내 연금 875딸라를 합치면 1690딸라가 되니 지금 사는 것보다 100% 더 윤택하게 살 수 있어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멀리 여행은 못 간다고 해도 남편과 같이 뉴포트 해안이나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 충동이 돋았다. “그래, 어디고 가자! 어디고 남편과 같이!” 나는 행복에 겨워 두 손을 불끈 쥐었다. * 어영부영하다 보니 바람에 밀려 어느새 내 나이 만 65세가 되었다. 아들과 딸을 통해 손자와 손녀가 도합 4명이 되었기에 애들 봐주는 대가로 아들과 딸로 부터 도합 1000딸라 정도의 용돈을 받아 아파트 값으로 충당했다. 며칠 전, 내 생일 날, 모인 10명의 식구들 앞에서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 나는 41세 중년으로 꿈도 많았고 행복했었다. 그런데 그 해 11월 5일 부터 오늘 까지 살아온 24년의 세월은 마치 내가 스스로 만든 캄캄한 감옥소에 스스로 같혀 밤하늘의 별빛만 바라보며 밖 앗 세상으로 뛰쳐나가려고 발버둥 친 지루하고 한스러운 세월이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발목에는 ‘윤리, 의리, 사랑, 체면 그리고 주저함’이라고 크게 쓰인 녹 슨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 족쇄를 떼어버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 해 보았으나 알량한 부부의 사랑, 아니 남편에 대한 동정심으로 인해 단념하고 살아 왔었다.- * 나는 손에 봉투를 움켜쥐고 아파트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여보, 왔어! 왔어!” “어엉, 어엉.” 마치 동물이 내는듯한 남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아파트이지 문을 열자 고약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전등불이 켜 있지 않아 어둠 컴컴하다보니 숨어 있던 바퀴 벌레가 내 발바닥에 밟히는 듯했다. 남편은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입 주위에 침이 흥건히 묻어 있었으며 한 손에는 기저귀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급한 일을 벌린듯했다. “여어보오!” 나는 기저귀를 빼앗았으며 봉투를 곁에 있는 책상에 던졌다. 남편은 내가 밖에 나가 우편물을 받아 가지고 오는 사이에 대소변을 참지 못하고 기저귀에 싼 것임을 나는 즉시 알아 차렸다. 나는 남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였다. 그리고 아랫바지를 내렸다. 대변이 옷 밖으로 나와 있었으며 소변을 같이 쌋기에 바지가 질퍽했다. “여보! 내가 미안했어. 조금 일찍 들어 왔어야 했는데....” “어엉. 어엉.” 남편은 손을 내 저으면서 말했다. 말이라고 했지만 벙어리가 내 뱉는 목구멍 속에서 나오는 잡음 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여보! 건강보험 하고 돈이 나온대. 돈이. 여보!” 나는 기쁜 소식을 다시 전했다. “어엉, 어엉.” 남편은 알았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기저귀를 갈고 새 옷으로 입혀 준 후 나는 남편을 부축해 다시 휠체어에 앉혔다. 그는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드는 듯했다. 아니 자신의 누추함을 아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듯했다. 문득 박 목사님이 24년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충고가 떠오른다. “김정순 성도님. 두려워 마소! 오늘 일은 오늘에 족하니 내 일 일은 염려하지 마시오. 하나님이 준비해주십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살아 온 것이 어느듯 24년이 되었다. 2. 우리와 같은 저 소득층 가난뱅이에게 월 875딸라와 메디케어(건강보험) 혜택은 가믐에 내린 단비와 같았기에 흥이 났으며 행복했다. 875딸라 란 있는 자에겐 저녁 한 끼에 해당 할적은 돈 일지 모르나 내게는 삶의 질을 높여 주는 엄청난 거금이다. 나는 전기 스읫치를 올렸다. 컴컴한 아파트가 밝아지면서 마음마저도 환 해 지는 듯했다. 저소득층과 불구자를 위한 시민 아파트이기에 들어오고 나가는 시설이 잘 돼 있으며 넘어져 다치지 않게 여기저기에 잔잔한 시설을 해 놓았다 그리고 월세가 아주 저렴하다.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 버틀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역시 전기 버튼을 누르자 이내 물 끓는 소리가 마치 875딸라를 축하 해 주는 듯했다. 커피 잔을 집으려고 몸을 돌리자 문득 옆에 걸린 긴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아니?’ 나는 내 머리칼이 마치 솜사탕처럼 온통 흰 모습에 놀랐다. 매일 같이 처다 본 내 모습이 오늘은 왜 이다지도 늙어 뵈는지.... ‘아! 65세, 내 나이에 받은 보상이 고작 이것이던가? 875딸라가 고작 나의 전부였던가? 이돈 받으려고 미국에 왔던가? 물론 아니지. 그런데 오늘은 875 딸라가 왜 이다지도 크게 뵈는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초라한 노파의 모습이었다. 45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로 나의 1.5배나 되는 남편을 낑낑거리며 들어 침대와 휠체어에 올려 주기를 24년간 해왔다. 게다가 밥도 먹이고 똥, 오줌도 갈아주다보니 근자에는 허리가 아파 가끔 끙끙 앓기도 했으나 참아야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오던 1985년, 나는 38세의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었으며 머리칼은 아주 검었었다. 그런데 오늘, 거울에 비쳐 보니 완전히 솜사탕처럼 흰 모습이었다. 중년 여성으로 꿈도 컷으며 할 일도 많았는데, 어느 날, 단 한방의 총성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그 한방의 총성은 희망에 찼던 한 남성을 옆에 있는 휠체어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편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민 오던 그해 그의 나이 40세, 마치 유도 선수처럼 근육이 울퉁불퉁했었다. 균형 잡힌 그의 모습을 본 웬만한 여인들은 ‘와!’라고 감탄을 올렸었다. 그렇던 그가 오늘날은 내 손에 의해 대 소변을 처리해야 하는 불구자가 되다니.... 한방의 총성이 이토록 우리의 인생을 바꿔 놓다니...그리고 내 스스로 만든 감옥소에 나를 가두어 놓고 족쇄 찬 죄수로 24년간을 살아오다니.... * 1985년, 내 나이 38세 남편은 40세였다. 우리는 잘 나가던 한국의 직장에서 퇴출돼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어찌보면 행복한 이민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40년에 또 다른 인생을 살아 보는 것이 더 좋을 것도 같아 미국행 비행기를 탓을 때 우리는 아주 기뻣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기회와 아메리칸드림에 매료됐었다. 형님 내외가 사는 롱비치에 와서 형님의 도움과 갖고 온 돈으로 차도 사고 바다가 뵈는 꽤나 좋은 아파트에 들었으며 애들(아들과 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으니 출발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남편은 활달해 기회만 되면 자동차에 가족을 태우고 바닷가로 그리고 멀리 산으로 드라이브 갔다. 때가 되면 좋은 선물도 빼지 않고 준비했다. 롱비치에 아주 좋은 신발 가개를 구입해 장사를 했는데 수입이 좋아 돈도 모았다. 애들은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도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냈으며 형님내외분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그뿐인가 한국에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교회에 출석해 남편은 집사가 됐다. 롱비치 시(City of Long Beach)란 옛날에는 아주 좋은 시였는데 점점 흑인과 히스페닉이 모여 들어 어느 특정 지역은 마약과 알콜 중독자가 길거리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곳으로 변했다. 그러기에 목사님이 장사를 시작한 남편에게 가끔 주의를 줬다. “흑인들과 히스페닉에게 조금만 친절하면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사실이 그러했다. 가끔, 흑인과 히스페닉이 신발 가개에 와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 그 중 한 두명은 남편에게 잡혀 신발을 도로 빼앗기고 간적이 있었는데 웬지 께름직 했었다. 혹시 복수한다고 찾아올지 모르니까.... 1988년 11월 5일. 이민 온지 3년 후였다. (물론 한국에서는 88 올림픽이 끝나고 조용해 진 때였다.) 저녁 5시, 롱비치 상가 주위는 어느새 컴컴해 졌다. 나는 잠시 옆집 가개에 볼일을 보러 갔었다. 그 사이에 앙심을 품은 어느 흑인이 가개로 들어와 물건을 보는 척하다가 갑자기 강도로 돌변해 반항 하는 남편의 왼쪽 목 부분에 한방의 총성을 울리고 도망을 하다 경찰에 잡혔다. 한방의 총성은 온통 주위를 시끄럽게 했다. 앰뷰란스가 오고 경찰차가 와 웽웽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급히 가개로 돌아와 보니 남편은 핏덩이가 돼 앰뷰란스에 실리고 있었다. “여보!” 나는 남편을 붙잡았으나 피해자의 아내임을 안 구급요원은 나를 번쩍 들어 앰뷰란스에 같이 태워 롱비치 메모리알 병원 응급실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내가 그 때 남편 곁에 같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나의 불찰이었다고 생각하니 온통 후회막급이었다.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메모리알 병원의 신경외과 의사의 수술로 남편의 목숨은 건졌으나 남편은 혼수에 빠져 있었다. 범인이 쏜 총은 비비 건이었다. 그러나 총알이 왼쪽 목 부위에 있는 경동맥(Carotid Artery)을 스치고 지나면서 왼편의 뇌로 가는 핏줄이 끊겨 산소 공급이 되지 않아 뇌사상태가 됐다고 했다. 환자가 살아서 응급실에 온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CT(단층 조형 촬영)라는 사진으로 보여준 남편의 머리의 왼쪽 편은 완전히 뭉그러져 오른쪽의 반도 안 되었다. 사람의 뇌가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왼쪽 뇌는 전혀 작용을 하지 못하며 살아난다고 해도 말도 못하며 기억도 못하고, 완전히 바보가 될 것이기에 차라리 생명보조기(호흡기계)를 떼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신경외과 의사와 호흡기 내과 의사가 내게 권유했다. 순간 나는 소리를 쳤다. “살려 주세요. 바보가 돼도 좋으니, 살려주세요. 의사 선생님!” “예, 압니다. 그러나 생명에도 의미 있는 생명과 그렇지 못한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강력히 호흡기를 떼라고 추천 한 것입니다.” “그래도...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잘 생각하십시오. 평생 후회를 할지 모릅니다. 부인!” 나는 그를 살려만 주면 언젠가는 정상이 돼 우리가 바라던 그 행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 했었다. ‘평생 후회 할지 모르니 지금, 동정심을 접으십시오. 호흡기를 떼고 평안하게 죽게 하십시다.’라고 말했던 의사들의 추천을 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은 짓이었다. -남편은 혼수에 빠진지 35일 만에 눈을 뜨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리치료덕분에 부축하여 설 수가 있었다. 대 소변은 스스로 보지만 뒤처리는 내가 해야 했다. 목소리는 나지만 짐승처럼 ‘엉엉, 어어’와 같은 단순한 소리일 뿐이었다. 벙어리가 됐다. 듣기는 하나 의미를 모르는지 마치 갖난 애기 같았다. 반 귀머거리가 됐다. 보기는 보지만 형태가 부정확한지 제대로 집질 못했다. 반 눈먼 장님이 됐다. 우람하던 그 육체도 바짝 말랐으며 몸에서는 냄새가 풍겼기에 다른 사람들은 불쾌하게 느끼는지 은근히 피했다. 뇌는 괴사됐기에 살아 있다고는 하나 죽은 것만도 못했다. 그래도 남편이 살아 있는 것이 좋았다. -“살려만 주세요! 의사선생님!” “부인 잘 생각해 보세요. 스스로 감옥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살려주세요. 남편을 사랑하니까요.”- 2개월 만에 집으로 퇴원했다. 남편을 간호하느라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말을 가르쳐 보았으며 비디오 가개에서 한국 방송을 빌려와 보여 주었으나 허사였다. 병원과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정부에서 제공한 저 소득층의 아파트로 옮겼으며 휠체어와 온갖 의료혜택을 받았다. 심지어 불구자를 위한 주차 혜택도 받았으나 그는 조금도 좋아 지지 않았다. 2-3년 후부터 남편은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으며 “밥, 물. 똥. 오줌”과 같은 기본적인 단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 상태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 과연 이런 남편이 나의 남편인가? 살 의미가 있는가? 목사님은 말했다. “당신의 남편이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일은 오늘에 족합니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갖고 온 돈은 모두 썻으며 가개도 싼값에 팔았다. 그래도 미국은 좋은 나라였다. 세금도 별로 안낸 내 남편에게 매월 715딸라의 생활 보조금과 의료 혜택을 100% 해 주고 있으며 값싼 아파트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3.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듯이 나에게도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병 수발하기에 짜증이 났으며 은근히 남편이 죽기를 바랬다. 내가 나쁜 년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남편을 덜 사랑했나? 나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남편이 내 옆에 누어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아이처럼 보였다. -내가 남편을 만난 것은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니 나면서 부터라고 해야 하겠다. 더욱이 남편의 동생과 나는 이웃 친구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이었다. 중앙청이 보이는 창성동 옛 고옥(古屋), 기와집 동네에서 살았다. 잘사는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았으니 첫 사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철이 들어서부터 조금씩 감성이 통했다.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 때 그는 K 대학교에 입학했다. “정순아 나, 대학생이 됐어.” “와! 멋있다 오빠.” 그리고 6개월 후, 그는 군에 간다고 했다 “정순아 나, 먼저 군대 마치고 올게...” “군대?” 그리고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2년 후 나는 오빠가 다니는 K 대학에 입학했으며 곧이어 그도 복학을 했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학생 커플이 됐다. 내게는 남편(정성택)뿐 아무도 없었다. 졸업 후 남편은 중앙정보부에 나는 사직동 도서관에 취직이 됐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시해된 후, 1980년 초부터 정권의 바뀜에 따라 남편은 정보부를 사직했으며 반강제로 미국 이민을 하게 됐다. 그것이 1983년 5월이었다.- * 내 곁에 누어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그의 옛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토록 초라하게 누워 있는가? 그 육중했던 근육과 골격이 이토록 말라, 앙상하게 수축돼 있다니... 대학생 때, 그와 같이 놀러 다니던 기억이 왜 나를 이토록 초라하게 만드는가? 가을비가 내리던 서오능(西 五菱)에서 와락 껴안아 주었던 그의 그 힘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누어있는 남편을 살며시 건드려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보, 나 좀 안아줘!” 그러나 그는 기척도 없었다.- * 남편의 건강 상태가 조금은 좋아 졌지만 먹고 자고 소 대변 보는 것일 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토록 우람했던 성기도 콘돔을 차고 소변을 보는 것에 만족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부인? 언젠가는 성기도 힘을 쓸 날이 있을 겝니다.” 비뇨기과 의사가 윙크를 하면서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김 박사님? 놀리지 마십시오!”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어, 부인, 제가, 용서하십시오. 괜한 말을 해서....” 비뇨기과 의사는 사과했다. 그날 밤 집에 와 남편을 휠체어에서 옮겨 침대로 누일 때 나는 비뇨기과 의사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살며시 그 부분을 건드려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득 결혼 식 후 호텔에서 그와 보낸 그 저녁이 생각났다. 그는 나를 만족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크게 팽창함을 알았을 때 나는 드디어 그의 아내가 되었다. 사내와 계집이 따로 있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리고 왜 조물주가 우리에게 성의 만족을 주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사내가 아니나, 나는 정상적인 계집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나? 내가 나쁜 년인가?’ 기저귀를 갈아 줄 때마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보았다. 남편은 한 살짜리 애기나 마찬가지였다. 한 살짜리..... * 나의 하루하루가 이토록 고달플 수가 있으랴마는 세월은 흘러간다. 휠체어에 실어 나르는 남편을 수발하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을 보살피랴, 내게는 쉴 틈이 없었다. 형님 집에서 한 달에 1000딸라를 도와 줬으며 친정 오빠가 보다 못해 가끔 큰 돈을 주었기에 아들 딸, 공부도 시켰다. 말이 공부지 남들이 생각하는 일류 대학은 꿈도 못 꾸고 칼리포니아 칼리지(2년제)를 졸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남편의 일과는 눈뜨면 세수 시켜 휠체어에 올려놓고 대 소변을 시키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남편에 대한 미련이 있어 말하기 글 읽기를 해 보았으나 진전이 없었다. 내과 의사에게 찾아가 받은 당뇨 그리고 각종 치료약을 챙겨 먹이는 것도 큰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리치료도 받았으며 귀가 솔깃해 한방에도 찾아가 침도 맞고 한약도 먹였다. 가장 큰 고충은 소변이 안 나와 쩔쩔매는 순간 소변 카테타를 넣어 소변을 빼 주어야 했다. 그리고 변비가 심할 때는 고무장갑을 끼고 딱딱한 대변을 손으로 파내어야 했다. 비록 남편이기는 하나 구역질이 나게 마련인 것은 나도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입술에 키스를 해본 기억이 없음은 아무래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라기보다 병든 어느 인간을 동정심으로 도와주는 도움이 일 뿐이었다. ‘나는 도움이 일뿐....그리고 남편은 옛날 동네에서 만났던 그 오빠 일뿐 ....’ * 어느 순간인가? 남편이 아주 쉬운 단어를 알아듣고 있음을 알게 됐다. 한국 티비를 틀어주면 무엇을 아는지 웃기도 했다. “와!” 나는 감격했다. 하늘도 우리를 도와주는구나. 남편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떡이며 손으로 무슨 글을 쓰는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무어인가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남편에게 우울한 감정과 기쁜 감정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그의 표현을 보며 남편이라고 하는 존재보다 어린 아이나 기르는 동물, 개가 무엇을 깨우침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내 마음속에는 남편이란 존재가 인간이라기보다 인간 이하로 느껴지다니..그렇다면 남편은 아내인 나의 주인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럴까?’ 나는 생각할 수 록 마음이 괴로웠다. 마치 발기 불능한 남편의 성기를 보면서 불가능을 체념으로 받아 드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 남편은 기적적으로 혼자 밥을 먹을 수가 있었으며 한국 티비를 보면 무슨 내용을 이해하는지 킥킥 소리를 내기도 했다. 조금만 부축하면 혼자 설 수가 있어 휠체어에 옮기기가 아주 쉬웠다. 모처럼 나는 딸에게 남편을 맞기고 여고 동창회에 간 일이 있었다. 나를 모처럼 만난 동창들은 마치 불쌍한 신델레라를 보듯이 위로를 했다. “소식 들어 알고 있어. 남편이 불구가 됐다면서?” 한결같이 나를 동정하는 말이었는데 그 속에는 비하하는 듯한 말도 있었다.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대학 때부터 나를 흠모했다고 하는 남자 동기였다. 나도 사실은 좋아 했던 친구였다. 은근히 나에게 윙크를 하며 연락할 전화 번호와 주소를 주었다. “힘들면 내게 전화해줘. 나 아직 혼자 살아. 정순아, 너만 기다렸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래, 아직도 혼자서? 거짓말?” 나는 왜 이런 대답을 했는지 나도 모른다. “속아만 살았니? 그러니까 그런 남편을 만난거지. 남은 인생 멋지게 살아보자구!” “남은 인생?” “그래. 남은 인생, 나하고....” 그 말을 한 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아- 이 친구, 나를 아직도 좋아하는 구나.’ 내 가슴은 온통 뛰었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그가 준 명함과 전화번호를 여러 차례 보고 또 보았다. 컴퓨터 부속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엘리트 컴퓨터 회사. 사장 김준섭. 성공했구나...’ 나는 남편 몰래 그 친구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문득 대학 때 일이 생각났다. 남편과 이 친구는 나를 좋아 했으니 소위 삼각관계였다. 그러나 먼저 알게 된 남편은 우람한 육체와 2년 선배라는 실리로 나를 독점했었다. 결국 준섭은 패자가 됐다. 준섭은 내 결혼식에도 참석해 뒷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었다. 수줍어했었다. - 그날 밤 나는 남편을 침대로 옮겨 기저귀를 갈아 준 후 침대 옆에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잠을 청했으나 김준섭의 얼굴이 맴돌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녘이나 돼서 겨우 잠이 들었다. -순간, 김준섭이 내 침대로 찾아왔다. 그리고 알몸이 돼 나를 더듬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가 하는 대로 내 몸을 맞겼다. 황홀했다. 그리고 만족했다. 참으로 몇 년 만에 가져본 애정의 즐거움이던가.. 순간 눈을 떳다. 꿈이었다. 아니 상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운했다. 차라리 눈을 뜨지 말고 그냥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김준섭의 존재가 내게 그토록 엄청날 줄이야.- 남편은 옆에서 잠을 자는지 코를 골며 ‘엉엉. 어어’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니 남편이 옆에 있는데 내가 이런 꿈을 꿔도 되는가?’ 나는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꿈속에서 동창 김준섭이 내게 해준 애정행위가 어찌보면 정당해 보였다. ‘그럴 수 있지... 남편이 못해주는 것을, 아니 기다리고 있었어. 누군가, 사내라면...’ 나는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고 눈만 멀뚱거렸다. 그리고 그가 준 명함에 적힌 전화 번호가 눈앞에서 큰 글자로 보였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도 전화의 주인공이 직접 받았다. “김준섭? 나야. 나. 김정순.” “와! 정순아! 웬일이야? 이렇게 전화를 해도 되는 거야?” 김준섭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흥분과 감격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어. 그냥 안부전화 했어. 잘 있어.”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준섭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이 마치 패잔병이 구걸하는 듯 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둑질 하다 들킨 것 처럼 가슴이 울렁이며 두근거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순간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분명 준섭으로부터 온 전화 같았기에 일부러 받지 않았다. ‘준섭이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그리고 혼자 살고 있는데...’ 나는 남편을 한번 처다보았다. ‘저 사람이 없다면, 아니 죽어 없어진다면, 나도 자유로울 수 있는데...’ 나의 가슴은 아까보다 더 울렁거렸다. 마침내 나는 밤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에게 전화를 거는 버릇이 생겼다. 4.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은 미국으로 이민와 열심히 일해 돈 많이 벌어 큰 집 사고 좋은 차타고 다니는 것은 물론, 친정집에 듬뿍듬뿍 때가되면 선물을 사서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편이 불구자가 된 이후, 선물은 커녕 여고 동창회와 대학 동창회에도 가본지 오래였다. 궁상스럽게 신문에서 할인 쿠폰을 잘라 두었다가 식료품 살 때 요긴하게 썻으며 교회에 가서도 주는 밥은 잘 얻어 먹었으나 남을 위해 밥 한 끼 사본 일이 없으니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복권(롯토)을 사는 버릇이 생겼다. 아픈 남편이 돈을 벌어 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없는 돈에 5딸라, 때로는 10딸라 많게는 20딸라를 사봤으나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 그럭저럭 복권에 바친 돈도 꽤 됐다. 아니면 라스베가스는 멀다 치고 롱비치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칼손이나 시티 오브 커멀스에 있는 카지노에 가서 돈을 따보려고 찾아 가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내가 왜 이리 됐나? 돈에 환장을 했지...’ 나는 나 스스로를 억제해 보려고 노력을 했다. 카텔라길에 있는 경마장과 파사데나에 있는 경마장에도 가보았으나 시간이 너무 걸려 포기를 했다. 돈은 내 손에 걸리지 않았다. 취직을 하고 싶어도 남편 병 수발하다보니 가당치 않아 포기했다. 이러기를 24년.... 오늘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니 주름살이 여기저기에서 늙은이로 보였으며 머리칼이 솜사탕처럼 아주 흰 모습이 내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듯했다. * 미국에 와서 아들 딸 잘 길러 하바드. 예일대학과 같은 명문 대학에 보내려고 과외도 시키고 특기도 살려 줬으나 권총 한방으로 인해 자녀 교육도 내 팽개쳐 버렸다. 그 결과 두 놈 모두 마약을 복용하다 학교에서 징계를 받았으며 대학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각각 군에 입대한 것이 요즘에는 오히려 고마웠다. 불구자 아버지를 보기가 싫다고 이락과 아프카니스탄 전쟁에 자원을 하고 보니 내게는 더 큰 부담이 되었다. 갑자기 남편이 죽는다면 나는 어찌 살 것인가? 아들 딸과 같이 오순도순 살기도 틀렸으며 그렇다고 이 나이에 재혼하려고 해도 어느 누가 거들떠 볼 것 같지도 않았다. 흰 머리에 구부러진 허리의 노파를 데리고 갈 남자가 있던가? 그러던 차에 혜성같이 내게 나타난 대학 친구 김준섭은 나의 희망이었다. ‘김준섭? 남편이 죽은 후 그와 재혼한다?’ 나는 오늘 밤도 그를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5. 며칠 새, 남편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체온이 오르고 숨이 차, 앰뷰란스에 태워 응급실로 갔다. “폐염에 심 부전증이 겹쳤군요.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김정순씨!” 첫날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상태가 좋아져 다음날 부터는 일반 병실에서 산소 마스크를 쓰고 항생제와 이뇨제를 번갈아 주사를 맞았다. “면역이 약한 환자는 폐염으로도 죽을 수가 있답니다. 혹시 호흡기계를 달고 숨을 쉬어야 할 상황이 되어도 계속 할까요? 아니면 치료를 중단할까요? 보호자 님?” “의사 선생님, 집에 가서 애들과 상의를 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아! 그렇게 하시지요. 꼭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하는 말이니까요...” 밤늦게 남편을 병실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자식들과 상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문득 김준섭과 의논하고 싶어서였다. 만일 그가 나와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궂이 남편을 그런 상황에서 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밤마다 남편을 휠체어에서 내려 기저귀를 갈아 끼고 침대에 누여 잠을 재웠는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모처럼 가져보는 자유였다. 땀에 젖은 몸을 샤워로 깨끗이 한 후 나는 찬 물을 한잔 드리켰다. 시원한 느낌이 식고를 통해 대장까지 느껴졌다. 잠시 침대에 큰 대자로 누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모니터를 누르니 모처럼 한국 티비에서 뉴스를 전해 주고 있었다. 초등학교 여학생을 이불로 덮어 납치해 성폭력을 한 후 무참하게 칼로 찌러 죽였다는 끔찍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성폭력을?” 나는 순간 친구 깁준섭을 생각하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신호가 4번 울리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어 보세요?” 졸린 듯한 목소리였다. “준섭씨? 나, 정선이야. 정선.” “어 정순? 웬일이야?” 그는 놀래는 듯이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남편의 상태를 설명해 주면서 치료 불가능한 경우에 생명 유지기계를 떼어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걸 왜 내게 묻지? 네 남편의 문제인데...” 그의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어-어-” 나는 머뭇거렸다. 그는 눈치를 챘는지 이렇게 말했다. “정선씨? 이젠 우리도 늙은이가 됐어. 늙은이가...이제 와서 재혼한들 무슨 유익이 되겠나? 그냥 사는 거지. 남편을 살려야지. 남편을, 어떻게 해서라도.” “재혼한들?”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렇다니까. 나도 재혼하면 그래도 한 10살은 어린 여자를 만나야 나 병들면 수발해주겠지....” “열 살 아래?” “그렇다니까. 정선씨?” 앗뿔싸, 그렇다면 그가 내게 했던 말은 다 거짓이란 말인가? 나만 순진하게 그의 말을 믿고 있었다니.... “날 기다렸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어? 준섭아?” 나는 결심을 한 후 그에게 물었다. “정선아? 우린 늙었어. 너도 나도...” 순간 나는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쾌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분했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갔다. 놀랍게도 남편은 어제보다 훨씬 좋아져 숨도 스스로 쉬고 있었다. “내일, 집으로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김정선씨?” 내과 의사가 내게 일러주면서 병실을 나가버렸다. 남편은 분명 나를 필요로 하는 불구자요, 나 스스로 만든 감옥소의 간수장이었다. 병이 없는 내가 오히려 그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죄수와 같았다. 몇 년을 더 이 감옥 속에서 살아야 할지 판사의 판결도 없는 무한정의 감옥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확 막혔다. 순간 24년 전 목사님이 내게 해 준 그 충고가 떠 올랐다. “감정선 성도님?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신답니다.” 마음이 답답했다. 무엇을 해준단 말인가? 무엇을? 오늘 하루도 밥 주고 소변 대변 갈아 주고 휠체어에 앉혀 주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침대에 누여주는 다람쥐 체바퀴 도는 그 하루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인가? 나는 나 스스로 감방의 문을 닫고 잠을 청한다. 잠이 들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는 그 세계에 들어가니까..... 어느 누구도 내 남편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머리가 희고 허리가 굽은 나 하나 뿐. 어제 받은 875딸라에서 조금 돈을 꺼내 내일은 특별히 롱비치 바닷가로 나아가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멀리 태평양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훨훨 날라보리라. 내가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스스로 기어 나와 알에서 부화된 나비가 되어 멀리 멀리 태평양을 날라 어디고 가리라...... 미주 소설가 협회 소설집(2012년)에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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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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